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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쌍곡선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굳이 추리소설을 탐독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1939년에 출간된 꽤 오래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봐도 전혀 올드하거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없어 현재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있다. 저자 역시도 자신의 10대 작품 중 하나로 이 책을 꼽는 것을 보면 그만큼 이 작품에 대한 애착과 자신감이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세계적인 명작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민 책이 바로 니시무라 교타로의 '살인의 쌍곡선' 이다. 일본의 추리소설 작가로 우리나라에서는 낯선 이름이지만 일본에서는 국민 추리소설가로 불릴만큼 많은 사랑과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원로 작가라고 한다.
1930년대 생으로 1963년에 데뷔한 이후 지금까지 약 6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다작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평균 이상의 퀄리티를 유지한다는 평이다.
이 책은 도입부부터 대놓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비교하는 대사도 자주 등장하고 전반적인 전개 또한 흡사하다.
여섯 명의 남녀가 무료 숙박 초대장을 받아 도호쿠의 외딴 호텔에 모이게 되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공짜라는 말에 혹해서 가긴 했지만 왜 하필 자신들이 선택됐는지 알지 못한다. 호텔 지배인은 그 이유를 밝혀내는 사람에게 10만 엔의 상금을 지불하겠다고 하지만 호텔에 모인 사람들 간의 공통점을 찾아내기란 쉽지가 않다. 어쨌거나 다 함께 스키도 타고, 식사도 하며 화기애애하게 저녁을 보낸 다음 날 숙박객 한 명이 살해당한 채 발견되고, 호텔 오락실의 볼링핀이 하나 사라진다.
인물들의 이런 살해방식 또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비슷한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는 누군가 살해당할 때마다 인디언 인형이 하나씩 사라진다.
이런 식으로 인물들이 모이게 되는 방식이나 살해 방법 등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비슷하게 전개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비슷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구분되는 이 책만의 가장 큰 특징은 외딴 곳에 고립된 사람들이 살해되는 사건 외 또 다른 장소에서 발생하는 미스터리한 사건이 한 가지 더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건은 도쿄에서 발생하는데, 쌍둥이인 강도들이 자신들이 쌍둥이인 점을 이용해 대놓고 강도 행각을 벌인다.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똑 닮은 쌍둥이 중 한 명이 범죄를 저지르지만 정확히 누가 범인인지 알지 못하는 이상 무죄 추정의 원칙에 의해 두 사람 다 처벌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해 계속해서 형사들을 우롱하며 대범하게 강도 행각을 벌인다. 물론 형사들도 이 사실을 알고 계속해서 두 사람을 감시하지만 매번 교묘한 수를 써 빠져나가니 범인을 알면서도 잡을 수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저자는 이야기의 도입부부터 쌍둥이가 등장하는 점을 강조해 묘사하고 있고, 또 강도 행각이 벌어질 때는 두 사람이 범죄를 모의하는 과정을 독자들도 모두 알게끔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쌍둥이 트릭에 대해서는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형제의 강도 행각이 고립된 호텔에서 발생하는 살인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알아채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살인의 쌍곡선'이라는 제목에서도 예상할 수 있듯이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던 두 사건이 결국엔 어떤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나는 마지막까지 두가지 사건이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지만 작가의 힌트를 염두해둔 독자라면 사건의 실체를 빨리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지루할 틈없이 빠르게 전개된다. 그리고 두 가지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에 사건 사이의 연관 관계를 추론하느라 분주하게 머리를 굴리게 되는 재미가 있었다. 다만 작품의 배경이 1970년대 일본이기 때문에 요즘 세대들이 이해하기 힘들 설정들이 다소 있긴하다. 호텔 전화선 하나 끊겼다고 외부와 전혀 연락을 할 수 없다던가 설상차가 고장났다고 폭설에 스키로만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은 2020년의 독자들이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쓰인 시대적 상황을 미리 감안하고 읽기 시작한다면 50년 전 작품이라는 걸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전혀 촌스럽지 않은, 흡입력과 재미를 갖춘 작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