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가 웃는 순간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소 <망내인>, <13·67>과 같은 사회파 추리소설로 유명한 찬호께이가 이번에는 특별하게 호러 미스터리 장르로 돌아왔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비판적인 사회파 추리소설 작가가 쓰는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호러물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증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띠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염소가 웃는 순간>에서는 아주 전형적이고 뻔한 스토리의 캠퍼스 호러물이 등장한다. 어느 학교에나 있을 법한 7대 불가사의에 관한 이야기로 등장인물들은 막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이다. 캠퍼스, 신입생, 기숙사, 7대 불가사의라니 이런 소재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 등 여러나라의 하이틴 영화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설정이다. 그런데 이런 흔하디 흔한 클리셰 범벅의 이야기도 찬호께이가 쓰면 다르다고 자신있게 말하니 기대를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었다.

등장인물은 총 9명으로 남녀 신입생 8명과 4학년 선배 1명이다. 이 중 '아화'는 이 책의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남들보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아주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오죽하면 자기 소개할 때 평범한게 특징이라고 할 정도로 평범의 극치를 달린다. 외모도 평범, 성적도, 성격도 평범한 주인공은 자신이 묵게된 기숙사에 떠도는 7대 불가사의 이야기를 듣고도 자신처럼 평범한 인물에게는 귀신도 재미없어서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평범하다.

기숙사에 입소하게 된 첫날 아화는 고등학교 친구인 '버스', '위키'와 함께 휴게실에서 신입 여학생들과 4학년 선배인 '아량'을 만나게 된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아량 선배로부터 노퍽관 기숙사에 얽힌 7대 불가사의와 11년 전 기숙사에서 났던 화재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11년 전 발생한 화재 이전에도 불이 났던 적이 있는데, 100년 전 현재의 기숙자 자리에 살던 이스트베스트 백작이라는 사람이 지하실에서 주술의식을 벌이다 화재로 사망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때 이스트베스트 백작이 주술의식을 벌였던 지하실이 실제로 지금의 기숙사 지하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화와 친구들은 아량 선배와 함께 지하실로 향한다.

지하실에 도착한 아화와 친구들은 바닥에서 주술의식에 사용되었던 염소 그림의 도안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버스가 제안한 초혼게임을 하게 된다. 이 후 모두들 다시 올라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지만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나갔던 '칼리'라는 여학생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칼리를 찾던 중 아화의 친구 버스가 <444호실> 미스터리에 등장하는 책상에 먹혀 버리고 만다. 그리고 사라진 칼리는 7대 불가사의 중 <거울에 비친 모습>에 등장하는 거울 속에 갇혀 있었는데 거울 속에는 긴 머리를 늘어뜨린 귀신이 칼리를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아화와 친구들은 평소 괴담과 주술에 관심이 있었던 샤오완으로부터 자신들이 장난삼아 한 초혼 게임이 기숙사에 떠돌던 귀신들을 소환해버렸다는 사실을 듣게 되지만 7대 불가사의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친구들은 하나 둘씩 사라지게 된다.

과연 지극히 평범한 주인공 아화는 사라진 친구들을 구해내고 무사히 살아서 기숙사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이야기는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의 도입 부분에 기숙사 7대 불가사의에 해당하는 내용들이 먼저 소개된다. 이후 앞에 소개한 불가사의대로 친구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인데 불가사의에 대한 이야기를 몰아서 듣는 것이 아니라 각 장 마다 사건이 분리되어 불가사의 내용 다음에 바로 현재의 사건이 이어지니 이야기의 집중도와 몰입도가 더해졌다.

노퍽관 7대 불가사의는 대략적으로 아래와 같다.

<444호실>

교통사고로 죽은 여학생이 매일 밤 자기가 살았던 444호실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는데 룸메이트가 자신의 자리를 치울까봐 포스트잇에 "내일 돌아올께"라는 글을 남겨놓고 사라진다.

<거울에 비친 모습>

화장실에 서로 마주보게 설치된 거울 앞에 서면 거울이 서로 반사돼 거울 앞에선 사람의 얼굴과 등이 무한히 반복되는데 한 여학생은 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이 아닌 낯선 여자의 얼굴을 보게된다. 이후 두려움에 떨던 여학생은 룸메이트에게 전화했지만 룸메이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다음날 룸메이트가 기숙사로 돌아와보니 그 여학생은 목이 180도로 돌아가 뒷통수가 천장을 향한 채 죽어있었다.

<5층 반>

기숙사 5,6층에 살던 커플이 엘리베이터에 탄 후 남학생이 5층에서 내렸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실종된 지 이틀만에 엘리베이터에서 갑자기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된다. 이틀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남학생은 정신착란 상태가 되었고 엘리베이터를 점검하던 사람들은 5층과 6층 사이 엘리베이터 통로에서 '구해줘'라는 글씨를 발견하는데 그 글씨는 마치 누군가 벽 안쪽에서 쓴 것처럼 반대로 쓰여있었다.

<나무에 매달린 시체>

한 남학생이 어느 날 기숙사 계단에서 창밖 나무를 바라보니 나무에는 죽은 시체들이 걸려 있었고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해보니 시체들은 사라져있었다. 이런 현상은 매일 반복됐고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나무에 걸려있던 시체들이 하나씩 줄었다. 드디어 나무에 걸린 시체가 한 구 뿐인 마지막 날 내일부턴 시체가 보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남학생은 웃었지만 그 시체는 환영이 아니라 실제로 나무에 목을 매단 자신의 룸메이트였다.

<방문세기>

새벽 3시부터 해 뜨기 전까지는 기숙사 복도에서 방문을 세지 말라는 규칙을 어기고 한 커플이 방문을 세는데 세다보니 방문 갯수가 1개 더 많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서워진 커플은 복도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가도가도 복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 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남학생은 어느 방의 문을 몸으로 들이받는데 남자는 그 길로 7층 창밖으로 추락한다.

<살아있는 조각상>

비오는 날 남학생 몇 명이 기숙사에 세워진 염소 조각상 한 바퀴를 돌아오는 달리기 시합을 한다. 한 명씩 조각상을 돌고 들어올 때마다 조각상이 달라진 것 같다고 한 남학생이 이야기했고, 달리기가 끝나고도 남학생 중 한 명이 돌아오지 않자 찾아 나서보니 조각상 옆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조각상이 달라진 것 같다고 말한 남학생이 누구였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불길 속의 원혼>

기숙사에는 사감 가족이 살고있었는데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된 아내는 동반자살을 위해 새벽 3시에 가스밸브를 연다. 하지만 가스 냄새를 맡은 남편이 깨어나자 다급해진 부인은 라이터를 켰고 그 순간 화재가 일어나 딸을 제외한 일가족은 사망한다. 이후 새벽 3시만 되면 죽은 가족의 모습이 기숙사를 떠돈다는 소문이 들린다.

역시나 추리 소설의 귀재답게 귀신이나 유령이 등장하는 호러물이지만 추리 소설의 구성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 전반에 복선과 트릭을 깔아놓았다.

그래서 이야기의 결말에서 그 동안 깔아놓았던 떡밥들이 어떻게 회수되는지 보여주는데 마치 호러물을 탈을 쓴 추리소설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소하게는 불가사의에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의 인과관계를 통해 사건들 간에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던가 거울에 갇힌 칼리를 구하는 장면에서 칼리의 손목 밴드가 반대쪽에 채워진 것을 보고 칼리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장면은 추리소설에서도 쓰일 법한 트릭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찬호께이는 초현실적인 호러물에서도 논리적으로 사건을 설명함으로써 이야기 속 사건들이 초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고 현실처럼 느끼고 납득할 수 있게 만든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550 페이지가 넘는 긴 분량이다보니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1장은 하이틴 캠퍼스물 같은 분위기로 약간 지루하게 느껴졌다. 물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 2장부터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호러물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러물의 분위기가 끝까지 이어지지 않고 추리 쪽으로 장르의 변주가 이뤄진다는 점이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아쉽기도 했다. 만약 찬호께이가 쓰는 본격 호러물을 기재한 독자라면 이야기 중반부까지 한 껏 기대감과 재미를 고조시킨 후 마지막 클라이막스에서 결국 이성의 끈을 놓지 못하고 사건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찬호께이에게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호러물이 존재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호러는 초현실적인 맛에 읽는건데 한참 그 재미를 쫓아가다가 마지막에 호러물을 추리물로 바꿔버린게 아닌지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호러도 찬호께이가 쓰면 다르다는 자신감답게 기존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호러물을 접하게된 것 같아 신선했다.

 

필력 좋은 찬호께이답게 흡입력과 가독성은 최고였지만 그래도 역시나 찬호께이는 사회파 추리소설로 보는게 가장 반가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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