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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온 - 잔혹범죄 수사관 도도 히나코
나이토 료 지음, 현정수 옮김 / 에이치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온> 은 일본에서 출간된 이후 엄청난 인기를 끌며 2016년에는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ON 이후에도 CUT, AID 등 시리즈물로 계속 나오고 있다고 하니 조만간 한국에서 다음 작품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드라마의 줄거리는 소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캐릭터들의 설정 면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인 히나코가 사이코패스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소설에서는 어딘지 나사가 풀린 듯 하면서도 엄청난 기억력의 소유자로 꽤나 사랑스러운 캐릭터다. 소설의 결말을 고려했을 때는 드라마보다는 소설의 캐릭터가 히나코라는 인물에게 더 적절한 설정이 아닌가 싶다.
주인공 히나코는 여형사를 동경하며 형사부를 지망했지만 실상은 현장직이 아닌 내근직으로 산더미 같은 서류 업무만 담당하게 된다. 그래서 현장에서 뛰지 못하는 대신 자신의 뛰어난 기억력을 이용해 그동안 일어났던 미제사건 파일을 모조리 암기해 머릿속에 넣고 다닌다. 히나코가 머릿 속에 넣고 다녔던 이 미제사건들은 추후 벌어질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히나코의 특이한 점은 기억력 뿐만이 아닌데 항상 엄마가 선물하신 고춧가루 양념통을 가지고 다니면서 어디든지 뿌려먹는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코코아와 껌에도 고춧가루를 뿌려먹는 특이한 식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한 번 본건 절대 잊지 않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일본어 한자는 잘 몰라서 글씨 대신 그림으로 현장과 관련된 내용을 메모한다.
히나코는 '간 씨'라고 불리는 베테랑 형사(원래 이름은 '아쓰타 이와오')와의 대화 중 머릿 속에 저장돼 있던 미제사건과 관련된 인물의 프로필을 알려주면서 앞으로 벌어질 연속 자살 혹은 연속 살인 사건에 합류하게 된다.
그 첫 번째 시작은 여성 피해자를 스토킹하고 성폭행했던 '미야하라'라는 사람으로, 자신이 피해자에게 했던 짓과 똑같이 속옷으로 입속이 틀어막히고 항문에는 콜라병이 꽂힌 채 죽어있는 것이 발견된다. 사건 현장에서는 스마트폰이 발견됐는데 스마트폰은 녹화모드로 세팅되어 사건 당시의 상황이 찍혀 있었지만 화면 어디에도 범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후로도 엽기적인 사건들이 줄줄이 발생하는데 공통적인 것은 모두 범죄자들이었으며 자신이 저지른 범죄와 똑같은 방법으로 죽었고, 죽는 당시의 상황이 영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발생한 사건은 어머니와 숙모를 죽인 연쇄살인범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던 '사메지마'라는 인물이다. 그는 교도소 독방에서 자신의 이마를 벽에 찧어 자살한다. 그리고 세 번째 '사사오카' 는 자신의 목에 개목걸이를 걸고 옷에 불을 붙여 죽는다.
해당 사건들은 모두 자살로 보이지만 마치 죽은 피해자들이 복수를 하기라도 하듯 자신이 저지른 범행과 동일한 방법으로 죽었다는 점, 그리고 피해자들의 수만큼 자해 시도를 하다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점 등 수사를 진행할수록 의미를 알 수 없는 공통점들이 발견된다.
처음 책을 접했을 때 '잔혹범죄 수사관' 이라는 서브 타이틀은 이해가 됐지만 왜 하필 제목이 ON 인지 궁금했는데 이야기의 중반에 다다르면서 살해된 인물들 간의 연결고리가 밝혀지고 어느 정도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ON'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감이 오게 된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어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제목 자체가 소설의 핵심이자 모든 사건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잔혹범죄 수사관'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사건들 자체가 엽기적이고 잔혹하다보니 보기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예상보다(?) 살해 장면에 대한 묘사가 거북하지는 않았다. 물론 살해 현장을 머리속으로 상상하다보면 꽤나 엽기적이겠지만 피가 흥건하고 난자된 시체를 묘사하는데 치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잔인한 내용을 잘 못보는 독자들이라도 충분히 볼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된다.
소설은 약 300 페이지 정도의 비교적 짧은 분량으로 페이지가 길지 않은만큼 사건들이 스피디하게 전개된다. 그리고 강력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또 죽은 범죄자들과 그 범죄자들의 피해자, 그리고 주인공의 동료 형사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개성 강한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다만 다양한 사건들이 얽혀 있으면서 범죄자들이 벌인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어 읽다보면 약간 헷갈릴 수도 있다는 점과 주인공인 히나코가 클라이막스에서 제대로 된 활약상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은 약간 아쉬웠다. 특히 히나코는 형사지만 여성이라는 점 때문인지 아니면 평소에 현장이 아니라 주로 서류 작업을 담당했었다는 점 때문인지 막상 사건이 눈 앞에 닥쳤을 때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만일 이게 실제 상황이고 히나코라는 여성이 살인범과 대치하고 있었다면 별다른 조치를 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니만큼 주인공인 히나코가 형사로써 스스로 사건을 헤쳐나가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줬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뛰어난 기억력과 추리력은 흥미롭고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대하는 따뜻한 모습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어쨌거나 히나코의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살벌한 사건과 잔인한 분위기를 좀 더 가볍게 풀어준다는 점에서는 제 역할을 다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주인공인 히나코 외에도 베테랑 형사 '간 씨'나 법의학부 교수인 '사신여사' 등 인간미 넘치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특히 '사신여사'는 잔인한 사건 현장에서도 눈을 반짝이며 해부에 열을 올리는 괴짜로 사신여사가 주인공인 또 다른 소설이 나와도 재밌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생각보단 잔인하지 않고 예상외로 따뜻하고 인간적인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하는 재밌는 소설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