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남
슈노 마사유키 지음, 정경진 옮김 / 스핑크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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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목에서 대놓고 알 수 있듯이 이것은 여성 피해자의 목을 졸라 살해한 후 목에 가위를 꽂아 놓아 '가위남'이라고 불리는 살인범에 관한 이야기다. 흥미로운 것은 가위남의 살인과정과 살인범을 뒤쫓는 형사들에 대한 스토리라기보다는 자신이 노리고 있던 표적을 다른 모방범에게 뺏기고 모방범의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형사나 피해자들의 시선이 아니라 주로 살인범인 가위남의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된다.

일단 도입부는 연쇄 살인범인 가위남이 한 여고생을 세 번째 타깃으로 정하고 계속해서 주변을 맴돌며 가족과 친구관계를 조사해 나가는 과정으로 시작한다. 이 날도 어김없이 그녀의 하교길이 보이는 가게에 자리를 잡고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여고생의 집 근처로 자리를 옮겨 그녀가 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평소라면 집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 지나도 집에 돌아오질 않았고 가위남은 다음 날을 기약하며 자신의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가위남은 집으로 가던 길 공원에서 웅크리고 있는 검은 물체를 발견하고 가까이 가보니 가위남의 타깃이었던 여고생이 아주 익숙한 모습, 즉 가위에 목이 찔린채 살해된 것을 발견한다. 가위남인 내가 봐도 가위남에게 살해된 모습이었지만 난 아직 계획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럼 이건 과연 누구의 짓인가?

이번 일만큼은 나의 범행이 아닌데 모든 경찰과 언론은 가위남으로부터 피해자가 살해당했다고 떠들어대고 도대체 누가 자신을 모방해서, 그것도 자신의 타깃이었던 소녀를 죽인 것인지 궁금한 마음에 가위남은 소녀의 진짜 살인범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런 독특한 소재와 스토리를 쓴 작가인 슈노 마사유키는 얼굴을 공개하지 않아 아주 미스터리한 인물로 남아있었는데 2013년, 49세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하는 바람에 생의 마지막까지 미스터리한 인물로 남아있다. 그 중 <가위남>은 추리소설 강국인 일본에서 1999년 메피스토상을 수상하고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독특하고 탄탄한 스토리를 인정받았던 소설이다. 한국에는 12년 전 출간된 이후 올해 복간되었다.

일본에서는 다른 장르보다 유독 미스터리, 추리 장르에서 강세를 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서술트릭과 관련해서는 <가위남>이 항상 추천리스트 상위에 랭크될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한 트릭을 선보여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준다.

<가위남>에서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독자들이 가진 모든 편견에 도전하듯 범인, 피해자, 경찰,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있다.

보통 연쇄 살인범이라고 생각하면 음침하고 어두운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밤만 되면 거리를 쏘다니며 피해자를 물색할 것 같지만 가위남은 그렇지 않다. 평일에는 성실하게 출판사에서 알바를 하고 피해자를 미행할 때는 회사가 바쁘지 않은 날을 골라 상사에게 꼭 허락을 받고 휴가를 사용하고 은근히 성실하고 눈치가 빨라 원치않게 정규직 전환을 제안받기도 한다. 또 피해자를 정할 때도 본인만의 명확한 기준이 있는데 단순히 외모가 화려하고 아름답다던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원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누가봐도 모범생에 두뇌가 명석한 여학생을 고른다.

하지만 이렇게 누가봐도, 심지어 가위남이 봐도 단정하고 성적이 우수한 여고생이 알고보니 연상의 남자들과 아무렇게나 의미없는 관계를 맺고 다니는 문란한 사생활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이 우리가 피해자에게 부여하는 이미지에 대한 반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초반에 가위남 본인 스스로도 이야기하지만 살해 동기 또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어린시절의 트라우마나 학대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이유가 없다. 어떻게 보면 묻지마 범죄라고도 볼 수 있다. 어떤 의도나 악의 없이 순수하게 아무런 이유없이, 가끔은 호기심에, 피해자를 죽이고 뺨을 찢기도 한다. 심지어 죽이는 대상은 타인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죽이기 위해 끊임없이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자살시도를 한다. 크레졸 비누를 마시기도 하고, 쥐약을 먹기도 하는데 결국에는 모두 실패한다. 물론, 자살시도를 하는건 피해자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은 아니다.

이렇게 범행에는 명확한 이유가 없는데 티비에서 범죄 심리학자나 논픽션 작가, 르포라이터, 소설가 등 소위 전문가라는 다양한 사람들이 출연해 범인이 어떤 상처와 동기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떠들어대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그들을 비웃는다.

 

방금 말했듯이 범인은 전형적인 쾌락 살인자입니다. 소녀를 목 졸라죽이고 가위로 목을 찌르는 것이 범인에게는 가장 성적 쾌락을 느낄 수 있는 행위인 것이죠. 이 쾌락을 위해 범인은 살인을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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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쾌감. 나는 성적 쾌감을 느꼈던가. 대관절 쾌감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나는 고니시 미나와 마쓰바라 마사요와 다루미야 유키코의 육체에 흥미가 있었던 적은 없었다. 조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녀들의 얼굴조차 몰랐다. 내가 끌린 것은 그녀들의 학업 성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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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이들 세 명의 희생자 누구에게도 성폭행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성적 불능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가위로 찌르는 것이 성적 행위에 대한 보상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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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의사가 심리학자를 무시하지, 하며 나는 고개를 내둘렀다.

p147~148

어둠 . 괴물. 내 마음속에 어둠이나 괴물이 존재할까. 나는 눈을 감고 찾아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내 안은 텅 비었다.

그리고 내 바깥도, 텅 비었다.

p151

이 책은 두 번째 읽을 때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게 된다. 그 동안은 편견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것을 두 번째부터는 확실히 보게 되면서 처음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읽게 된다.

어린 여학생들의 목에 가위를 꽂아넣는 범행을 보고 유혈이 낭자하고 쫓고 쫓기는 스릴을 기대했다면 스토리가 기대보다 좀 밋밋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100페이지에 다다랐을 때는 전혀 다른 세상에 들어서며 이 앞의 모든 이야기들은 마지막 100페이지를 위한 서막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동안 알고 있었던 모든 사실들이 뒤집히고나면 내가 얼마나 편협하고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했는지 반성하며 마지막 장을 덮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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