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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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소 책을 즐겨읽지 않는 사람들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 '히가시노 게이고'이다. 일본 작가이지만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어떤 책이든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름이 들어갔다 하면 일단 흥행은 보증됐다고 볼 수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부분 작품들은 미스터리, 추리 형태를 띠고 있긴 하지만 트릭이나 사건의 촘촘한 구성보다는 인물들 간의 감정과 관계에 집중하는 편이다. 많은 이야기들이 인물들의 감정선에 집중해 서사가 전개되고 범인들도 철저한 악인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순간적인 감정에 치우쳐 잘못된 판단으로 범죄를 저지른 경우가 많아 독자들이 범인과 주인공을 가리지 않고 인물들에게 빠르게 몰입하게 된다. 그래서 항상 듣는 말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가독성이 좋다는 말이다. 물론 가독성이 좋은 것은 비단 인물들에 대한 감정이입뿐만 아니라 술술 읽히는 쉽고 흡입력 있는 문체와 빠른 스토리 전개 때문이기도 하다.

<방과 후>라는 작품도 데뷔작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만의 특성이 잘 드러나 역시나 가독성이 좋고, 평범한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에 따라가기가 쉽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에시마라는 수학교사로 여고 양궁부 고문을 맡고 있기도 하다. 원래는 공학 전공으로 개발 부서에서 일하다 회사가 시골로 이전하게 되자 회사를 관두고 여고의 수학교사가 되었다.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저냥 2,3년만 해볼까라고 시작했던 일이 5년이나 이어졌다. 처음부터 남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가르치는 일에 열의가 있었던 것도 아닌 터라 그냥 입력된 정보를 내뱉는 기계처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지극히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지만 최근 들어 누군가로부터 계속해서 살해 위협을 받고 있었다.

첫 번째는 만원 지하철역 플랫폼에서 열차가 들어올 때 갑자기 누군가 고의로 밀었다. 두 번째는 발목까지 물이 찬 샤워실에 누군가가 전기코드를 떨어트려 놓았다. 그리고 세 번째는 창가를 지나가는 순간 누군가가 머리 위로 화분을 떨어뜨렸다. 처음에는 긴가민가 했던 마에시마도 이제 더 이상은 이 모든 일이 우연이라고 볼 수가 없게 됐다. 그러던 찰나 교사용 탈의실에서 학생지도부 교사가 청산가리를 마시고 죽은 채 발견되고 이 사건으로 경찰이 수사에 나선다. 마에시마는 자신이 살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야 할까 고민하지만 자신과 관련된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후 의심 가는 사람들은 몇몇 있지만 이렇다 할 결정적인 소득 없이 하루하루 지나가고 어느덧 학교 축제 날이 다가왔다. 이 날 운동부 학생들과 운동부 고문들은 가장행렬을 하기로 하고 마에시마는 깜짝 이벤트로 아무도 몰래 다른 선생과 역할을 바꾸게 된다. 그런데 마에시마와 역할을 바꾼 선생이 전교생이 지켜보는 운동장 한가운데서 청산가리를 마시고 살해된다. 장난으로 역할을 바꾸지 않았다면 청산가리를 마시고 전교생 앞에서 죽게 되는 사람은 바로 마에시마가 됐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처음부터 마에시마를 노린 사건이었다.

과연 이렇게 끈질기게 마에시마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지 사건은 점점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는데...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답게 가독성이 좋다. 주인공이 여고 교사면서 동시에 양궁부 고문을 맡고 있기 때문에 학교를 배경으로 운동부 여고생들과 선생들의 일상이 주를 이룬다. 이야기는 주인공인 마에시마의 시선에서 주로 서술되지만 함께 생활하고 있는 여고생들의 평범한 일상생활과 친구들과의 주고받는 대화들을 통해 여성 독자들이라면 여고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마에시마 외에 주요 인물은 졸업을 앞둔 3학년 학생들인데 믿음직한 양궁부 주장인 게이코와 3학년이 되자 갑자기 오토바이를 타고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일탈을 시작한 요코, 설립 이래 최고의 재원이라고 불리는 3학년 A 반 반장이자 검도부 주장인 마사미이다.

각각 스타일은 다르지만 학교를 무대로 한 드라마에는 단골로 꼭 등장할 법한 캐릭터들로 고등학교 시절을 돌이켜보면 전교에 한 둘쯤은 이런 친구들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야기는 사춘기 여고생들이 겪는 섬세한 감정들과 학교 행사를 준비하며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살인사건까지 극과 극을 오가며 전개된다. 이 중에서 물론 핵심사건은 마에시마가 겪는 계속된 살해위협과 살인사건이지만 범인찾기와 사건 해결에만 집중하기 보다는 마에시마와 마에시마 주변학생들간의 관계와 오고가는 대화들을 따라가는 재미가 더 컸던 것 같다. 물론 살인사건의 트릭을 밝혀내는 학생들의 활약상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추리소설 본연의 재미도 빠지지 않는다.

사실 범인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갔지만 그 범행 동기가 약간은 어이가 없어 충격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했다.

스포일러라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고등학교 시절, 어리고 순수했던 때에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 앞뒤 재고 따질 것 없이 자신이 느낀 감정에 솔직하게 행동하고 실천한다. 그래서 어른들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이해할 수 없는 짓들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래서 오죽하면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겠는가. 뭐 요즘이야 그 질풍노도의 시기가 고등학생이 아니라 중학생 정도로 하향된 것 같지만 어쨌거나 빠르게 몰아치는 바람과 미친 듯이 닥쳐오는 파도처럼 사춘기, 어린 시절의 순수함은 아주 위험하고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다. 

  

"여고생이 누군가를 증오한다면 그건 어떤 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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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것, 순수한 것, 거짓 없는 것일 겁니다. 그건 때로는 우정이나 사랑이기도 하죠.

자신의 몸이나 얼굴일 경우도 있어요. 아니, 좀 더 추상적으로 추억이나 꿈을 소중하게 여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런 소중한 것을 파괴하려고 하는 것, 그 아이들에게서 빼앗으려고 하는 것을 가장 증오한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p324~325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그 범행 동기가 어처구니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소중한 것을 침범당했다고 느꼈을 때 아이들이 어떤 짓까지 저지를 수 있는지, 어른들이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는게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큰일인지 생각해보고, 그 시절 나는 어땠는지 떠올려 보기도 했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된 현재,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아이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더 대단하고 중요한게 맞는지, 또 지금의 나는 학창시절 내가 상상하던 어른으로 자랐는지 돌이켜보는 계기도 된 것 같다. 이렇게 보니 이 여고생들의 이야기는 아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학창시절을 잊은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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