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이미지와 문화 - 영상미디어 해부 자연.공학도서 9
김철관 지음 / 배재대학교출판지원실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서평을 쓰려고 영상이미지와 문화를 검색해보니 동일한 이름으로 많은 책이 검색되었다. 이런 류의 책이 이렇게나 많이 출간되었다니 조금 의외였다. 신방과 대학생이 아니라면 이런 책에 관심이나 갖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평소엔 영상 이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진 않았다. 그저 카메라와 밀접한 방송인들이 브라운관에 나오는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었고. 저 각도로 나오려면 대체 촬영할 땐 어떤 컷으로 찍는건가, 궁금하단 생각은 해봤다. 특히나 다각도에서 여러번 이뤄지는 영화나 드라마 촬영 말이다.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 호기심을 풀어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너무 딱딱하지 않기를 바라며 책을 펼쳤다.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친구로 보이는 세 명의 소년. 페이스 페인팅을 한 채 웃고 있는 동양과 서양의 소년들을 담은 사진이었다. 그런데 살짝 쌩뚱맞게 상반신을 노출한 채 자유롭게 미소짓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이 때 떠오르는 일반적 이미지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 이 사진을 보고 분석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이유라고 말하니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마치 이 사진 안에 책의 의미가 다 담겼다는 늬앙스가 풍겼다.

   

책 내용은 생각한 것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시작을 영상이미지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베이스로 미디어 기호를 점차 알려주고, 마지막으로 화면에 나타난 인물의 커뮤니케이션 등 가장 중요한 카메라와 촬영도구 등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내가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궁금했던 카메라 관련 기법과 기호학이었다. 특히 영상기호와 사회문학성에 대해서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고, 더 파고 들고 싶은 매력이 존재했다. 하나를 예를 들자면, 월계관은 기표로서 '기쁨과 영광'이라는 기의를 내포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증오'의 상징이라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양이도 우리나라에선 영물이라며 다소 두려워하거나 멀리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일본에 가면 신성시 하고 보은하는 동물로 여기지 않나.

 

또한, 책에서 말하는 나르시시즘이 광고에 작용한다는 말 또한 동의한다. 우리는 모델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내면에 깔려있는 나르시시즘을 발동시키는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옷을 주문했다가 모델과 다른 기럭지나 사이즈로 반품하게 되는 것도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싶다.

 

책을 읽기 전부터 궁금해 하던 카메라에 관해서는 조금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이론 적으론 자세히 설명해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메라의 숏에 따라 앵글에 따라서 카메라 워크에 따라 얼마나 영상이 달라질지는 경험해 봐야 알수 있겠지만. 이론 상으론 피사체를 원하는 이미지로 영상에 담게끔 여러가지 기술로 작업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수 있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그림이 없어서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할 수 없다는 점. 쉽게 인식되기보다는 긴 장을 전부 텍스트로만 봐야 한다는 점이었다. 시각적으로 가장 빠르게 인식할 수 있는 스틸 컷이 조금씩이라도 있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아쉬움이 남는 것 같다.

 

그렇다하더라도 이 책을 본 것은 오래도록 도움이 될 것 같다. 영상미디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니까. 아무튼, 자연. 공학도서를 손에 쥐게 되어 영광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휴강 중에 예습을 하는 기분이라고 할까? 마치 교수 없이 공부할 책을 읽는 기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루 스웨터 - 부유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 다리 놓기
재클린 노보그라츠 지음, 김훈 옮김 / 이른아침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부유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 다리 놓기! 문구만 봐도 박수를 쳐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런데 제목이 블루 스웨터라니 의아했다. 왜 블루 스웨터일까? 어떤 특별한 의미라도? 일단 표지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따뜻함. 그리고 이질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자전거를 탄 가족으로 보이는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낯설음. 하지만 흑인이라고 해서 마냥 무섭기만 한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는 그 느낌이 좋았다.

 

내 궁금증은 책을 펼치며 말끔히 해소되었다. 그게 뭐냐고? 10년만에 재회(?)하게 된 블루 스웨터 라고나 할까. 정확히 말하면, 블루 스웨터를 입은 깡마른 소년을 발견한 거지만 말이다. 이야기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녀의 사춘기 시절이 되겠다. 누구나 어릴 때 유독 아끼던 옷 한 벌쯤은 있을 거라고 본다. 새 옷을 사 입기 귀한 상황도 한 몫했고. 손때가 묻을 정도로 자주 한 몸처럼 입게 되는 옷. 그녀에게는 이 스웨터가 그랬다. 

 

가슴이 자라는 사춘기 시절, 스웨터를 입은 그녀에게 짖궂은 남자아이가 가슴을 빗대서 놀리는 일이 발생했다. 그녀는 자신의 차림때문이라 생각하고 스웨터를 팔아버렸다. 그 악몽같은 순간을 함께한 스웨터를 팔아버림으로서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스웨터가 돌고 돌아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혁신적인 꿈에 불씨를 지피게 만든 시작이었다. 물론 누구나 다 그녀처럼 외진 곳에 눈길을 주진 않겠지만. 그녀이기에 가능한 생각이고 실천이었을 거라 생각이 든다. 그녀가 이루고자 했던 일종의 혁명은 더 멀고도 험했다. 저자 재클린은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아프리카'에 기부와 자선을 넘어서 그들이 당당히 소비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길'을 펴낸 인물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다. 하지만 힘이 없다. 그래서 그럴만한 힘을 길러서 나만의 방식으로 돕겠다. 어찌보면 이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누군가는 콧방귀를 키며 비웃었을 거다. 그녀는 자신의 공략을 편지로 써서 보내기도 했었다. 문득 예전에 내 허무맹랑한 행동과 오버랩되며 그녀처럼 실천하지 못한 내가 부끄럽기 그지 없었다.

 

분명 책에선 참 겸손히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강인한 인내심과 올바른 인격을 지녔다는 것을... 적대심이 가득한 낯선 나라에 가서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에 목욕을 하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분쟁지역에서 잠을 자야 한다니. 그곳에 가기 전에 그녀는 매우 인정받는 직장을 다니는 커리어우먼이었는데! 왜 사서 고생을 하냐며 보나마나 부모님은 물론이고, 가족, 친지, 지인들마저 나무라며 말렸을 것이다. 더구나 이미 아프리카 이미지 하면, 말라리아나 에이즈 등 위험한 것 투성이니까. 어린 아이들이 총, 칼을 차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전쟁과 살인을 저지르는 위험천만한 공간. 너무 잔인하지만 나만 보더라도 이렇게 각인된지 오래다. 

 

하지만 내가 본 이미지가 들어맞은 건지, 그녀의 꿈이 너무나 컸든지간에 그녀는 꿈을 이뤘다. 그녀는 더 큰 목적과 꿈을 위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지만.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고도 남은 상황임은 분명했다. 포기하지 않았던 원동력이요, 이유가 실망하는 부모님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 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험난한 여정으로 보였지만. 아무튼 대단하다는 말 밖엔 할 수 없었다. 그녀처럼 사회적 일자리를 통해 여러 명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기업은 이밖에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처럼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겨두고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란제리 클럽
유춘강 지음 / 텐에이엠(10AM)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저자 유춘강 씨는 중년 이상의 독자가 읽으면 공감할만한... 그녀 나이에 걸맞는 소설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이십대 독자인 내가 읽기엔 다소 이질감이 많이 느껴졌던 소설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란제리 클럽이란 제목과는 내용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 굳이 상관관계를 찾는다면 이야기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인이 젊은 시절 란제리 클럽 혹은 파자마 클럽으로 뭉쳤었다는 것 정도.

 

란제리 클럽의 세 명의 여자 나(화자), 지소, 소정은 각기 다른 결혼관으로 삶을 살았고 그 결과물로 화자는 하루아침에 미망인이 되었고, 지소는 남편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삶을 이어가고, 소정은 남편을 집 안의 가구쯤으로 여기며 살게 된다. 남편이 갑자기 자살해버렸다. 이 충격은 지난 날 자연스레 흘러온 결혼 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후회와 슬픔을 몰고 오기 마련이다.

 

이 들의 삶중 선택하라면 과연 어떤 삶을 선택할까? 아니. 선택의 자유가 없이 내가 겪게 된다면 어떤 삶이 그나마 견딜만 할까? 별 생각이 다 들게 만드는 책이었다. 그러다 세 명의 삶은 보통 여자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어떤 삶을 살든지간에 자신이 어떤 마음을 품는지. 그리고 문득 맞닿게 되는 선택의 기로에서 어느 손을 들어줄지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누구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망가졌다며 하소연하며 살고 싶진 않다.

 

엄마처럼은. 누구처럼은 살지 않을 거야. 이런 말. 아직 미혼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이 말을 지키지 못한 채 누군가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건 왜일까. 란제리 클럽의 화자 역시 결혼의 시작은 순조로웠단다. 안정감과 서로가 잘 맞는다는 어떤 신뢰감, 그리고 결혼 적령기의 흐름에 따라 그렇게 필요에 의해서 결혼이란 수단으로 행복을 잡아두려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유는 모른채 홀연히 남편이 떠나버린다면 그 허망함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아마도 인생을 낭비한 느낌 역시 지우긴 힘들 것 같다. 결혼은 실패한 것인지. 또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과 망설임. 이런 감정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도 이어진다.

 

하지만 소설에서도 역시 새로운 남자 역시 완벽히 자신만을 위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죽은 남편처럼 자신이 모르는, 그의 이면의 모습이 어떤지는 석연치 않다. 그저 즐기면서 사랑을 나눌지 아니면 그에게 끌려가는 삶을 살게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결말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채 끝이 난다. 새롭게 도약할 그녀를 위해 여지를 남겨둔 것 처럼. 

 

암만 봐도 이 책은 남자보다는 여자. 서른 이하의 연령보다는 마흔 이후의 기혼여성이 독자로서 적당하다. 처음 시작부터 내면의, 정서적인 설명이 너무 길다. 만약 드라마화되어 나래이션으로 적절히 쓰여진다면 알맞겠지만 빠른 전개를 원한다면 이 책은 알맞지 않은 듯 하다. 하지만 비슷한 사연이 있는 여성독자로서 일상의 모습과 인물의 심정을 공감하며 깊이 느끼고 싶다면 알맞을 것으로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 그리고 꽃들의 자살 - 동심으로의 초대 어른을 위한 동화
이세벽 지음, 홍원표 그림 / 굿북(GoodBook)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사랑 그리고 꽃들의 자살

 


제목: 꽃앓이를 하는 모든 등나무를 위한 책.


 

 


이세벽 씨와의 두 번째 만남. 이번에는 한 몸이 된 등나무 이야기였다. 저자는 실제로 ‘한 몸이 된 등나무'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오랜 시간,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한 몸이 된 등나무를 보고 사랑을 말하고 아픔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이 과연 존재할까? 실제론 죽음이 갈라놓은 사랑,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절절한 사랑은 본 적이 없다. 하물며 결혼한 후 시들해지는 부부사이는 멀리 내다보지 않아도 가까이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었다. 영원의 사랑이라. 의문을 숨기지 못하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초반에는 아주 작고 여린 풀잎이 등나무로 자라기까지의 여정이 전개된다. 자신의 존재가 나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까지 자아 찾기에 나서야 했고, 햇볕을 마주 보는 것이 아무리 두렵더라도 조금씩 다가가야 하는 ‘성장통’을 겪는다. 등나무로 성장하기까지는 적과 아군이 존재한다. 현실에서처럼 햇볕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는 진리의 소리. 시기와 질투로 점철되어 비난과 조롱을 일삼는 주변의 풀잎들.

 

여기서 햇볕은 사회이며, '햇볕 쬐기'는 세상을 사는 방법이 아닐까? 후반부에 등장하는 서쪽과 남쪽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자살한 꽃의 이야기는 정말 참담했다. 꽃들은 모두 다 햇볕을 향해 고개를 뻗는다. 각자 동서남북으로. 그런데 대부분의 꽃들은 아침에만 잠깐 햇볕을 향하고 만다는 것이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자신도 그렇게 한다는 꽃의 말이 이어졌다. 남들이 하니까 따라 한다. 힘들게 햇볕을 쬐고 벌과 나비에게 시달리기 싫다. 이 말들은 마치 궂은일을 하지 않고 편하게 먹고 살겠다는 인간을 비유한 것 같았다. 남쪽을 향한 꽃은 튼튼한 열매(자식)를 맺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북쪽을 향한 꽃은 햇볕을 쬐지 못해 죽음을 맞이하는 것. 음지에서 핀 꽃의 최후처럼, 반사회적인 인간이 끝내 선택하는 죽음 말이다.

 

사회성. 그리고 일터에 바치는 값진 노동이 ‘햇볕 쬐기’라면, 등나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 또 다른 등나무는 사랑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사랑과 자살 이야기는 시작된다. 자신의 힘으로 하늘높이 자라는 등나무가 되고자 도시로 떠나던 중 만난 소중한 연인. 그들은 서로를 갈망하지만 손이 닿지 않자,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마침내 서로의 손이 닿았을 때 그들은 기쁨에 젖어 서로를 끌어안았고, 몸이 짓물러도 인내하며 견뎌낸다. 아무리 몸부림 쳐도 옆으로만 자라던 몸. 혼자서는 그토록 멀게만 느껴졌던 하늘이 둘이 함께 하니 손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연인 등나무와의 결합. 그것은 결혼한 부부와 같았으며, 둘의 사랑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한 나머지 결국 만났고, 하늘로 자라는 꿈도 이루고, 꽃도 피우게 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그들은 서로를 헐뜯고 미워하게 되는 말다툼만을 반복하며 남은여생을 보내게 된다. 

 

그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은 그들 자신은 물론이고, 꽃들이었다. 자식이라고 해도 좋을 꽃들의 자살이 이어졌다. 부모의 근심과 불화로 자식들이 겪는 고통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사랑은 봉사정신으로 하는 게 아니다. 이런 말로 반론할 수는 있겠지만, 왜 자식인 꽃들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져야만 할까. 마침내 자식으로 인해 깨달은 것은 서로 헤어질 수 없이 완전한 하나가 되었다는 것. A와 B가 만나 A도 B도 아닌 AB가 된 것과 같았다. 등나무의 눈물은 현실에 못 이겨 이혼하지 못하는 부부를 보는 것 같았다. 꽃들의 자살. 제목에서 느꼈던 의아함이 싹 가시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등나무는 속으로 말한다. 영원히 당신을 사랑한다고. 배우자가 자신과 헤어지길 원하고, 상처 주는 말을 쏟아내도 그를 내치지 못하는 것이 사랑인 걸까? 연애할 때는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 날마다 몸부림치고 그리워하고 눈물을 흘리는 등 서로를 애틋하게 원하다가 부부가 된 그들은 왜 변한 걸까. 배척하고, 무시하고, 아픔만 주는 부부의 모습. 서로를 떼어낼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등나무 부부의 모습은 보통 가정과 매우 흡사했다.

 

영원한 사랑을 믿느냐고? 등나무를 통해 무정한 세상을 비추던 현실감에 쉽사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작가는, 응원하고 있었다. 이제는 빛바랜 외사랑을 견뎌내는 이에게는 힘내라고, 차가워진 상대방에게는 혹시 간과한 것은 없었는지. 상대가 소중했던 추억을 회상해보라고 일깨워 주는 것만 같았다. 만약 등나무를 통해 사랑을 그리는 감성이 존재한다면 이 책을 읽고 꽃앓이를 할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명의 관객 - 미디어 속의 기술문명과 우리의 시선
이충웅 지음 / 바다출판사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미디어 속의 기술문명과 우리의 시선, 문명의 관객!

반짝이는 표지가 처음 날 반겼고, '관객'이라는 글자가 여러 번 눈에 띄게 내게 물음을 던졌다. 정말 '관객'이 될 수 있겠어? 라고 묻는 듯 했다.

 

네 개의 장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 장에선 몸을 향한 욕망의 시선. 두 번째 장에선 편견과 열등감과 열광의 추억. 세 번째 장에선 위기와 공포의 재생산. 네 번째 장에선 불완전한 연희에서 희망을 찾다.

 

몸을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에선, 미용성형. 비만과 다이어트로 함축할 수 있다. 이거야 뭐 이미 다 아는 얘기니까 길게 말할 필요도 없겠다. 미모가 곧 능력이 되는 사회이니까, 자신을 가꾸는 쇼핑의 일부분이 된 것을 비판하긴 이미 힘들어진 상황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도 성형을 하면서 남이 하는 것은 못 봐주는 놀부 심보를 들어내곤 한다. 생면부지의 스타를 향해 아무 이유 없이 욕을 늘어놓는다. 어디를 했고, 어디가 이상하다. 쟤는 고치지 말지. 쟤는 좀 고쳤으면 좋겠다. 등등. 이래도 밉상 저래도 밉상 아닌가? 결국은 자기 마음에 안 들거나 질투의 이유 때문이겠지만. 경쟁력으로 자리하는 미모를 가꾸기 위해선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가끔은 요요현상이나 부작용 등의 리스크를 겪기도 한다. 아파하는 만큼 성숙해진다고 했던가? 이 상황에 어울릴 진 모르지만 적어도 아픔이 없인 아무것도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불완전한 연희에서 희망을 찾다 편. 그 중에서 블로그에 대해 말하려 한다. 블로그는 이미 싸이월드 다음으로 많이 쓰는 매체다. 싸이월드는 사진 중심이라면 블로그는 글 중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싸이월드는 친한 친구들의 동창회처럼 사용된다면, 블로그는 내 생각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고 말하고 싶다. 적어도 나는 그런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온전히 그 사람을 모른 채 게재된 글 만으로 그를 만나고 교감할 수 있는 공간. 그것이 블로그라고!

그런데 불경스러운 사람도 간혹 만날 수 있다. 남이 쓴 글에 어찌 반말로, 그것도 무시하는 투로 흔적을 남길 수가 있을까?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러니까 황당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정정하길 원하는 것이 있다면 존댓말로 비꼬지 말고 예의를 지켜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온라인상에서는 댓글이 곧 말이다. 초면에 야자 하는 거랑 같은 이치 아닌가.

 

지은이도 첫 블로그를 없애 버린 이유를 말하길, 함부로 글을 '퍼가는' 사람들의 태도에 적잖이 놀랐고 거기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탓도 있다고 했다. 귀찮은 이유와 스크랩 후 마구잡이라 편집해서 자기가 쓴 글인 양 올리는 것 중 어떤 이유가 더 컸을까? 굳이 말 안해도 알 테지만, 끼워 넣기의 불쾌함은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건 작게 보면, 이기심이지만, 크게 보면 범죄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 거기다 악플러들의 기승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줄지 않고 뉴스에 언급되곤 하는 시대니까. 

 

제발 선플러가 못될지언정 악플러는 되지 않았으면 한다. 진심으로. 화가 나서 감정을 풀어놓는 거라면, 상대방이 자신이라고 이입해보면 그럴 수 있을까? 순간의 실수로 인생 망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