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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 소나무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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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제위께 머리를 조아리며 몇 자 아뢰고자 합니다.

퇴계 이황 선생은 천원권 지폐에서도 영정을 뵐 수 있을 만큼 이름이 높은 분이니 그 분의 학문세계까지는 모르되 존성대명만큼은 익히들 알고 계시리라 사료됩니다. 하지만 고봉 기대승 선생은 어떠합니까? 아마 보통은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잠깐 이름만 들어본 정도에 그칠 것입니다. 저 또한 어리석고 과문하여 그 분의 생애와 학문을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최근에 읽은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등 책에서 잠시 거명되기는 했습니다만 진정으로 선생의 면목과 학문을 밝히고 있는 책을 접하지 못하여 답답하던 차에 이제라도 고봉선생께서 퇴계선생과 더불어 주고받은 서신을 모두 담아 읽기 쉬운 우리말로 고쳐 쓴 책을 만났으니 반가운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처음엔 그냥 여느때처럼 책장을 넘기며 훑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이 책은 눈으로 읽을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저 훑어 읽으며 지나가서는 두 어르신들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렵겠기에 제가 마치 그 편지의 수취인인 양, TV 사극의 주인공인 양 소리내어 읽기 시작하고서야 비로소 그 뜻이 제 가슴속에 와 닿고, 더 나아가 행간에서 묻어나는 두 어르신들의 절절한 우정과 신뢰가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독자 제위께도 권하오니, 이 두꺼운 책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습니다만 잠시라도 한번 소리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책 속에서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무릇 학문의 세계에서 자신의 논리에 대한 자부심은 생명과도 같은 것, 그토록 첨예한 논변의 편지 속에서도 두 분 어르신께서는 단 한번도 서로간의 존경과 예의를 잃지 않으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당장 거친 말들이 쏟아지는 오늘날의 인터넷 게시판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벼슬의 높고 낮음도, 스물 여섯 살의 나이 차이도, 사단칠정론에 관한 견해의 차이도 두 분 서로간의 존경과 우정에는 전혀 걸림돌이 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의 토론문화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특히 당대의 명성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한참 손위이신 퇴계선생께서 후학에게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고봉선생께 ‘시대를 위하여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라고 충고하는 장면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그리 녹록한 책은 아닐 듯 싶습니다. 한자로 쓰여진 편지를 요즘 사람들이 쓰는 말투로 번역한 글인데다 그 속에 담겨진 내용마저도 ‘사단과 칠정’이니 ‘氣는 理의 발현’이니 하는 학문적 용어들이다 보니 세심하게 천착해 가지 아니하면 문맥을 놓치기 일쑤입니다. 몇 백년 전의 편지가 이토록 후학들에게 생소하고 난해하게 느껴진다는 점에서는 무척이나 비감한 일이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대단히 많이 팔리기를 기대할 수도 없는 이러한 류의 책들이 근래들어 다수 출간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만큼 우리 사회의 학문적 토양도 날로 성숙해 가고 있는 것 같아 적잖이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저자는 본문을 크게 제1부 ‘일상의 편지’와 제2부 ‘학문적 논변의 편지’로 따로 나누어 담아 혹여 사단칠정의 학문적 논변에 흥미가 없으신 분이라도 제1부 일상의 편지는 어렵지 않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하였습니다. 특히 일상의 편지들은 자신을 낮춰 공손하게 안부를 물으며 시작하고, 약재나 부채 등의 선물로 정성을 표시하거나 혹은 시 한 수를 매달아 풍류로써 끝을 맺고 있어 요즘의 편지의 틀과 크게 다르지 않고, 시종 잔잔한 미소로 읽을 수 있을 터인즉 지레 부담을 가지실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독자제위께 책을 골라 권한다는 것이 마치 ‘내 밭은 버리고 남의 밭 김매는 꼴’과 같은 참견이 될까 두렵습니다만 이땅의 젊은이라면 마땅히 한번쯤 읽어 보셔야 할 책이 아닐까 싶어 잠깐 아뢰었으니 널리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 서둘러 적느라 말투가 고르지 못합니다. 황공합니다. 上善若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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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들려주는 태교동화 - 개정판 태아를 위한 행복한 글읽기
김양현 / 프리미엄북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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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첫주가 출산 예정일이니 이제 약 두 달만 지나면 저도 아빠가 되겠군요. 아직 두달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우리 아기가 어떻게 생겼을까? 아빠가 된다는 것이 대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조금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남들 다 한다는 태교가 뭔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유난떨지 말고 그냥 평소 하던대로 조심조심 살면 그게 바로 태교지 뭐가 더 필요하겠어?” 하면서 그 흔한 클래식 음악 CD 한 장도 사다주지 못했으니 이러다 아내에게 평생 구박받고 사는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번 주 어느날 아내가 「아빠가 읽어주는 태교동화」라는 책을 사달라고 했을 때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이고! 알아듣지도 못할 뱃속의 태아에게 무슨 동화책? 오늘은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리 유난을 떠시나? 그리고 엄마가 읽어주면 될 것이지 왜 또 아빠를 찾는냐 말이야?’ 하지만 이런 말들을 입밖에 냈다가는 또 무슨 구박을 당할지 모르니 잠자코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요.

책이 도착하던 바로 그날 밤부터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에게는 익히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는 그저그런 동화들이더군요. 하지만 저는 기왕 읽을 거 아내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정말로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진지하게 읽어 나갔습니다. 임산부와 태아 모두의 감성이 풍부해질 수 있도록 의성어와 의태어를 많이 사용한데다 읽는 사람의 호흡을 고려하여 운율을 탈 수 있도록 쓰여 있어서 읽는 저도 슬슬 재미가 붙었습니다. 며칠 그렇게 읽다보니 호랑이 울음소리 어흥~!, 말 울음소리 히히힝~! 흉내는 물론 손짓 발짓까지 해가며 읽게 되더군요. 유치원 학예회 같은 자리에서 아빠들이 동화 구연을 어떻게 저리도 잘들 하시나 궁금했었는데 누구나 이렇게 미리 연습을 하고 온 것이었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깜짝 놀라며 제 손을 잡아 끌어다 배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뱃속의 아기가 움직이는게 손끝 감각으로 느껴질 뿐만 아니라 눈으로도 배가 출렁거리는 것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가끔 제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를 때면 아내는 뱃속의 아기가 마치 춤추듯이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설마하니 아기가 윤도현 최신가요를 알아 듣겠냐면서 웃고 말았지만 이렇게 동화책 읽어주는 소리에도 발길질의 강도가 달라지니 아기가 뭔가 느끼긴 느끼나 봅니다. 작년에 아빠가 된 사무실 동료의 얘기로는 아기가 막 태어났을 때에도 소리에 반응이 없더라는데 아마 뱃속의 아기도 역시 소리를 구별할 수는 없지만 어떤 파동같은 것을 감지하는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아무튼 그렇게 며칠 읽다주다 보니 아기를 위한 태교는 물론이려니와 엄마 아빠들에게도 아주 유익한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잔혹한 헐리우드 영화만 보고 자라 황폐해 있는 이 예비아빠의 정서 순화에도 크게 도움이 되고 있거든요.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과 서로간의 대화가 늘었습니다. 바쁘고 힘든 일상 속에서 두 사람이 아내와 남편으로 나란히 앉아 책을 읽어 준다는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뱃속의 아기가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제 아내는 남편이 읽어주는 짤막한 동화 한편에도 마냥 행복해하는 것 같고, 저는 모처럼만에 남편노릇 한번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上善若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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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오랑캐의 옷을 입었소 - 이릉과 소무
도미야 이따루 지음, 이재성 옮김 / 시공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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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릉과 소무’라는 이름은 내게 그동안 늘 접해왔던 역사소설, 예컨대 삼국지나 초한지 류의 전쟁소설에 약간의 고증이 가미된 책 정도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곧 이 책의 저자는 소설가가 아니라 역사학자(그것도 집요하고 치밀한 일본 학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한무제 시절의 군제와 병제, 병사들의 일상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종이마저 없었던 그 시대의 사료를 이토록 섬세하게 분석해 놓은 저자의 노력에 감탄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곧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이릉이 썼다는 ‘한통의 편지’를 시작으로, 수시로 격노하는 한무제, 그리고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을 당하는 사마천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잠시 후 흉노의 포로가 되어 조국을 배신해 버린 이릉과는 달리 끝까지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전향을 거부한 소무를 등장시켜 두 사람의 인생을 극적으로 대비하고 있다.

이릉과 소무의 대비되는 인생역정과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우정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이 정말 이토록 비장미 넘치는 인생을 살다 갔더란 말인가? 사마천은 정말로 친구 이릉에 대한 우정과 신뢰를 저버리지 못해 수시로 격노하는 한무제에게 궁형을 당했단 말인가?

잠시 후 저자는 이릉의 배신이 자신의 가족을 모두 처형해 버린 한무제에 대한 원망과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자괴감 때문이었으며, 사마천의 궁형은 이릉에 대한 변호와 무제의 격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변호의 과정에서 발생한 무망죄, 즉 오늘날로 치자면 무고죄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그동안 우리가 굳게 믿어왔던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이 꼭 그렇게 절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움은 책의 말미에 밝혀질 대반전의 서막일 뿐이다.

저자의 치밀한 고증과 분석적 접근은 모두 책의 말미에 밝혀질 대반전을 좀더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이릉의 비극적 인생, 소무와의 교류 등을 어렵지 않게 추리할 수 있었던 실마리인 ‘한통의 편지’ 가 후대의 위작이 아닌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부정되면 그 이하 소전제와 결론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과 같은 논리로 편지가 위작이라면 이 책에서 어느 부분을 진실로 받아들여야 될지 혼동스럽게 마련이다.

어느 나라의 역사든 위작의 사례는 대단히 많다. 장작을 쌓으면 나중에 온 것이 위로 올라간다는 얘기가 있듯이 고대로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갈수록 역사는 후대인들의 필요에 의해 더욱 상세하고 합리적이며 그럴듯하게 포장된다고 한다. 슬프고 우아하고 비장하고 낭만적인 고담준론으로만 여겼던 이릉의 편지가 후대의 위작일 수 있다니 그저 허탈할 뿐이다. 어쨌든 나는 이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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