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박스
아모스 오즈 지음, 곽영미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아내에게


소설책을 거의 읽지 않는 내게 당신이 모처럼 건네준 책이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블랙박스>를 읽었소.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등장인물들 간에 주고받은 편지로만 진행되는 서간체 문장이더이다. 70년대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이혼한 부부와 그들의 아들, 새로운 남편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 간에 오고간 편지들로 빼곡하오. 당신도 얼추 짐작하다시피 사실 그들 사이에 얽혀 있는 사랑과 증오, 탐욕과 야망 같은 것들이야 이미 진부한 소재들일게요. 하지만 이 소설은 바로 그 진부한 소재들을 가지고 한 부부의 애증과 화해는 물론 이스라엘의 정치사회적 갈등, 더 나아가 신앙과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통찰까지도 엮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빼어난 작품이라 하고 싶소.


이 얘기에 접근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소. 나는 처음 전남편 알렉과 그의 변호사를 한 편으로 묶고, 일라나와 새로운 남편 미쉘을 다른 한편으로 묶어 그들 두 팀 사이의 전쟁, 즉 재산 쟁탈전쯤으로 읽기 시작했단 말이오. 게다가 그들 부부의 아들까지 가세해 친부의 재산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고 있으니 나의 오해는 당연한 것 아니겠소. 하지만 잠시 후 나는 깨달았소. 이 책을 그렇게 읽어서는 얻을 게 별로 없다는 것을. 헐리우드 영화, 그것도 저급한 ‘킬링타임’용 영화 한 편 봤다는 정도 말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기로 했소. 작가는 왜 이 책의 제목을 <블랙박스>라고 했을까...


원래 블랙박스라는 것이 정상적으로 순항하는 비행기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는 것이오. 사람들이 이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시점은 바로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가 아니겠소. 이와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가정에서는 블랙박스가 별로 의미를 갖지 못하지만 알렉과 일라나와 같은 이혼한 부부에게는 추락의 원인을 반추해 볼 블랙박스가 필요했던 것이오. 나는 바로 이 점에 주목했소. 두 남자, 주변 아랍국가를 향해 잔인하게 총을 쏘았던 알렉과 어느 누구에게도 피를 흘리게 하지 않았다고 자랑하지만 가슴속엔 정치적 야망으로 가득 찬 미쉘이 상징하는 이스라엘 사회의 갈등은 내 관심사가 아니오. 또 종교적인 신념을 ‘광기’에 비유하는 세속적인 무신론자 알렉과 오로지 성서를 인용하며 토라 안에서만 살고 있는 듯한 미쉘이 상징하는 유대인 내부의 종교적 갈등도 또한 부차적인 장치일 뿐 나는 알렉과 일라나의 순항과 추락, 그리고 7년 후의 화해에 대해서만 주목하고 싶은 게요.


알렉과 일라나는 군복무 시절에 처음 만났소. 알렉은 당시 일라나의 소대장이었고, 일라나의 선택으로 결혼했소. 그러나 아들 하나를 낳은 후 그들은 이혼했소. 표면상 일라나의 부정으로 인한 이혼이었소. 그리고 7년 동안 연락을 끊고 살다가 이번에도 일라나가 먼저 편지를 쓰기 시작했소. 그렇게 아홉 달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블랙박스를 해독한 후에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에 이르게 되는 것이오. 우선 이 과정을 잘 들여다보시오. 결혼도, 부정도, 이혼도, 그리고 화해도 항상 일라나가 먼저 시작했다는 점이 좀 의아하지 않소? 그만큼 일라나는 대단히 정열적이고 인간적인 사람인 것이오. 여자이며 아내인 당신에게는 어찌 보일지 모르겠소만 일라나는 이혼한 날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얼음같이 차가웠던 전남편 알렉과 자상하고 소박한 새 남편 미쉘을 동시에 사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들과 딸,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까지도 사랑을 나눠주고 있는 정열적인 여자라오. 내게는 참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닐 수 없소.


당신은 ‘애증’이라는 단어를 경험해 본 적이 있소? 나는 지나온 삶이 아직 짧아서인지 아직 그런 경험이 없소. 알렉과 일라나가 블랙박스를 열고 추락의 원인을 해독해가는 과정을 보면 그 단어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소. 머지않은 죽음 앞에서 허위와 가식을 벗어버린 알렉과 원래 천성이 솔직한 일라나는 서로의 상처를 향해 매서운 칼을 휘두르고 있소. 자신이 아는 남자들 중 침대에서의 솜씨는 당신이 최하위였다는 식의 원색적인 비난까지 동원되고 있을 정도로 거침없는 칼질이 오고간 후에야 비로소 화해가 이뤄지고 있소. 세월이 흘렀으니 과거는 덮어두자는 어정쩡한 화해가 아니라 블랙박스에 기록된 온갖 상처를 다 들쑤셔서 내보이고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는 진정한 화해가 성립한 것이오.


작가 ‘아모스 오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공존과 평화를 외치는 사회단체의 리더답게 참 자상하고 배려가 깊은 사람인가 보오. 그는 책의 말미에 이르러 알렉과 일라나의 화해는 물론 이들 부부와 새 남편 미쉘의 화해, 세속적 유대인과 성서적 유대인의 화해, 대 아랍국가 정책을 둘러싼 강경파와 온건파의 화해 등 자신이 파헤쳐놓은 모든 상처를 다 봉합하면서 글을 마치고 있으니 말이오. 돌이켜 생각해보니 작가는 이러한 갈등의 주체 모두에게 각각의 블랙박스를 하나씩 나눠준 것이 아닐까 싶어 다시 호기심이 동하지만 당신은 이 편지가 이미 충분히 장황하다고 여길 것 같아서 이만 마치려고 하오.


우리에겐 영원히 블랙박스가 필요치 않기를 기원하는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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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7-13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절절하게 읽고, 아끼는 책입니다. 혹 <나의 미카엘>과 <여자를 안다는 것>도 읽어 보셨는지요? 두 작품 모두 이처럼 <부인>과 <아이>를 <상대>하는 남편과 아버지의 이야기였지요. 아, 좋은 작품에 좋은 서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