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의 원작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BBC에서 제작한 TV영화를 보았다. 아마 빅토리아 시대에 대해 찾아보다 알게된 듯 한데, 영화는 2005년에 나왔다지만 아마 2006년이나 2007년에 본 듯 하다. 그 후 2007년 ITV 제인 오스틴 주간에 방영된 《설득》을 거의 실시간으로 보았는데 여기에도 샐리 호킨스가 나와서 무척 반가웠던 기억이 있다. 섬세한 연기력에 팬이 되어 거의 첫 주연이나 마찬가지인 영화 《해피 고 럭키》도 봤었다. 지금은 없어진 명동 중앙극장이 스폰지하우스였던가, 리뉴얼했을 때 찾아갔었는데 약간 쌀쌀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 TV영화에서 눈길이 가는 것은 하녀 역할을 맡은 수Sue, 샐리 호킨스가 아니라 아가씨 모드Maud를 연기한 일레인 캐시디였다. 영화는 2부작으로 수의 시선, 모드의 시선으로 전개되는데 모드가 얼마나 앙큼하던지. 정말 연기를 잘 한다.

박찬욱 감독은 『핑거스미스』를 빌려왔지만 원작에서 비중있게 다뤄지는 반전, 출생의 비밀을 삭제한 후 그 파트를 아가씨의 후견인 이모부와 백작에게 주었다. 자연히 장물아비 식구들의 캐릭터들이 설 자리도 없어지고 극의 절정(따지자면 3부에 해당하는)에 지하실 씬을 넣으면서 영화가 지루해진다. 인물들의 악행을 단죄하는 느낌보다는 뭔가 설명충스러운(이 단어가 정말 싫지만 이 표현이 주는 혐오와 짜증과 하대하는 천박한 느낌을 가져오고 싶다) 해설과 부연이었다. 특히 이모부의 변태적 행위는 혐오를 불러 일으키는 의도적인 장치라는 점에서 더 거부감이 인다. `조국을 배신하고 여성을 핍박하고 착취하는 도구로 취급한 인간의 비밀은 이렇게나 추악했고 주인공들의 닫힌 결말을 위해 필요한 장면이었어`를 아주 불필요하게 설명한달까?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보지 않아서 성애 장면을 비교하긴 힘든데 《아가씨》의 베드씬도 길었다. 필요 이상으로 말이다. 두 주인공 히데코와 숙희가 서로에 빠지고 갈구하게 되는 감정적 묘사에 비해 베드씬은 자세하고 길게 진행된다. 은골무 씬이나 일본의 여관에서 문틈으로 키스하는 장면은 앞뒤 전개되는 장면과 연결되어 나쁘지 않았지만. 칸느 리뷰를 보면 남성적 시선이란 말이 나오던데 뭐 박찬욱의 이전 영화들과 비교해도 여성의 신체를 다루는 장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사실이다. 애틋한 감정, 케미스트리가 배제된 듯한 베드씬. 그 욕구를 표출하는 능숙한 체위 변경 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데코의 비밀과 숙희의 과거를 짐작해야 하는 관객의 적극성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찜찜함이 남는다. 일종의 포르노그라피를 스포츠를 보듯 관람한 기분이다.

아네트 베닝과 줄리안 무어가 주연한 《에브리바디 올라잇》을 보면 영화에서 두 사람의 관계에 끼어들어 갈등을 유발한 남자가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당시에 의아해서 찾아봤더니 (신뢰도가 확실치 않으나) 레즈비언 영화에서는 자주 그런다고 한다. 남성의 존재는 갑자기 증발하는 것. 《아가씨》는 퀴어 영화이지만 두 작품은 상당히 다르다. 남성이 사라져도 괜찮을 장면(3부)에서 오히려 비중이 확 늘어난다. 그래서인지 남성의 지배와 폭력에서 벗어나는 여성들의 연대는 《매드 맥스: 퓨리로드》도 떠올리게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려지는 방식은 페미니즘 영화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요소들은 페미니즘을 가리키지만 3부를 보면 감독이 그리고 싶었던 건 오히려 친일파의 몰락이 아닐까 싶은…. 남성성을 조롱하는 장면들의 연속으로 봐야겠지만 어쨌든 히데코와 숙희 이야기가 힘을 잃는달까?

출생의 비밀이라는 반전을 버리고 택한 마지막 지하실 씬은 꼭 들어가야 했을까. 디테일한 것도 좋지만 상상을 자극하는 것만으로 부족했을까. 춘화집과 문소리의 엄청난 연기로 기괴함을 증폭시켰던 것이 맥빠지는 기분이었고 덕분에 결말도 기대가 되지 않았다. 히데코와 숙희가 배를 타고 마주 선 장면에서 끝났더라면 어땠을까. 구슬 얘기도 많이 나오던데 딱히 해방의 상징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앞선 베드씬들의 연속처럼만 느껴졌다. 차라리 불태우거나 바다에 던져버리지 꼭 삽입의 용도로 써야 하는가 싶었다. 우물쭈물하던 히데코, 온갖 도색서적을 섭렵해야 했던 히데코라는 캐릭터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택을 벗어나는 두 사람의 모습과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라는 대사는 좋았다. 원작을 스크린에 옮긴 BBC 버전이 낫다.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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