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 음악, 나치 음악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82
이경분 지음 / 책세상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망명 음악. 망명이라는 타의적이고 강제적인 단어에는 정치적 의미가 들어있다. 자신의 자유의지에 반하는 행위, 이 책에서 망명은 히틀러의 집권 무렵부터 종전 시기 전후 나치를 피해 다른 나라로 떠난 경우를 통틀어 이른다. 보수적인 사회 풍토와 정치적 핍박, 독일은 자국 엘리트들을 자주 나라 밖으로 쫓은 역사가 있다. 그러나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 이루어진 망명은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의 도피였다. 특히 1933년에서 1945년까지 독일 망명자의 대다수가 유대인이라는 점도 그 전과 뚜렷이 구분된다. 

기록에 남은 자료만을 근거로 할 때, 1933년에만 3만 7,000여 명의 유대인들이 독일을 떠났다. 그 중 음악가들은 4,000여 명이었다. 여행을 떠나듯 온 가족이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먼저 아무도 모르게 떠나고, 뒤이어 아이들과 부인이 스파이 접선하듯 다른 기차를 타고 외국에서 만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1933년이 중요한 이유는 히틀러가 수상이 되면서 나치 당원들의 폭력이 공공연해지고 합법성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2월 27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 책임은 나치당의 주적이던 공산주의자들에 전가된다. 이때 운이 좋았거나 바로 체포되지 않았던 좌파 예술인들은 황급히 독일을 떠났다. 

같은 해 5월 10일,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 작가와 좌파 문화예술인들의 서적이 ‘반독일적’이라며 분서된다. 4개월 후, 제국문화원법에 의해 예술인 중 문화 활동을 해도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명단이 발표된다. 이는 정치·예술적으로 나치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예술인의 직업 활동을 금지하는 것과 같았다. 히틀러가 가장 먼저 겨냥한 것이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좌파 지식인들이었기에 일부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나치에 협조하기도 했다. 1938년 11월 9일, 수정의 밤 이후에야 유대인들은 나치의 목적을 깨닫는다. 1938∼1939년에 독일을 떠난 유대인은 11만 8,000명으로 1933년의 2배에 이른다.

1933년,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베를린의 프로이센 아카데미에서 작곡과 교수로 있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다음날, 유대인의 영향을 근절시켜야 한다는 아카데미 관장의 연설이 있었다. 쇤베르크는 스스로 사임하고 프랑스를 거쳐 가족과 미국 보스턴으로 떠난다. 나치에 대한 위협을 감지했더라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쇤베르크는 매우 특이하다 할 수 있다. 아도르노는 1934년까지 나치와 타협하며 독일에서 자신의 글을 발표하려 했고, 토마스 만도 1938년에야 미국 망명을 실행한다.

아르놀트와 달리 유대인이 아니었던 헝가리 음악가 벨라 바르톡의 망명은 나치의 문화적 야만성 때문이었다. 나치가 있는 곳에서 예술가로 사는 것에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에 고국을 등진 것이다. 그는 1938년 나치가 ‘퇴폐 음악 전시회’에서 발표한 금지 작곡가 목록에 자신의 이름이 빠지자 항의한 유일한 사람이다. 반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금지 작곡가 목록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에 항의한다. 그 역시 1939년에 미국으로 떠나지만 쇤베르크와 바르톡의 망명과는 상대적으로 성질을 달리한다. 유럽보다 안전한 미 대륙에서 더 나은 음악 활동과 삶을 누리려 했다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울 힌데미트는 순수 아리아인이었으나 음악이 ‘독일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나치의 비난을 면치 못했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의 적극적 보호도 소용이 없었다. 나치 정부와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한 브레히트의 편지를 받았지만 힌데미트는 1937년까지도 나치와의 타협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1940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 정착한다. 쇤베르크, 바르톡, 스트라빈스키, 힌데미트의 경우는 생명의 위협보다 예술가로서 활동하는데 심리적이고 경제적 장애가 되는 히틀러를 피해 유럽을 떠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에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한스 아이슬러는 이와는 다른 직접적인 위협 때문에 망명을 떠난다. 히틀러는 일차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제거하려 했는데, 마침 아이슬러는 오스트리아 빈에 머물고 있던 터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와 관련없는 사회 비판적인 음악을 하던 이들도 ‘문화적 볼셰비즘’이라 비난받았다. 나치는 이 모호한 용어로 유대인 출신의 아방가르드 예술인과 공산주의를 한꺼번에 잡으려 했다. 재즈 음악 역시 나치에게 금지되었던 장르인데 이 역시 나치 정책의 이중성과 모호성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독일에 남은 이들은 대부분 나치 정책과 어떤 식으로든 얽히게 되었다. 드러내놓고 나치 히틀러를 찬양한 어용 음악가들보다 소수이지만 국제적인 영향력으로 나치에게 큰 이점을 주었던 이들로는 대표적으로 슈트라우스, 푸르트뱅글러, 카라얀이 있다. 쇤베르크의 제자 안톤 베베른은 스승의 무조 음악을 발전시켰으나, 정치적으로는 나치에 대해 호감을 가졌다. 카를 아마데우스 하르트만은 나치 시기 모든 공적 활동을 끊고 구멍가게 운영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는 실제적 저항운동에 가담했으며, 나치 정책에 대한 생각을 음악적으로도 표현했다. 이는 나치 정책에 동조한 음악가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다.

(페이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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