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의 회전 세계문학의 숲 6
헨리 제임스 지음, 정상준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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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의 소설은 『워싱턴 스퀘어』를 읽은 적이 있다. 등장인물의 심리를 담담하면서도 비정하게 그려낸 수작이라 생각한다.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었는데 몇 년이 지나고서야 그중 하나인 『나사의 회전』을 읽게 되었다. 액자식 구성, 의식의 흐름 기법에 의해 서술된 이 작품의 바깥 화자 ‘나’는 더글러스라는 사내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여러 사람이 모인, 아마도 여행지인 듯한 곳에서 유령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더글러스는 어릴 적 누이의 가정교사였던 여성이 남긴 원고를 읽어준다.

시골 목사의 딸인 그녀는 런던에 올라와 가정교사 자리를 얻기 위한 면접을 통과한다. 이제껏 본 중 가장 멋진 신사인 고용주에 반해버린 것도 잠시, 설렘은 사그러든다. 고용주가 그은 선-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 것, 어떤 일도 보고하지 말라는 얘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대 가정교사에 대한 인식을 생각해보면 그가 내건 조건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갓 스무 살이 된 가정교사는 고용주의 조카인 플로라를 가르치게 되고 곧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얼마 후, 소녀의 오빠인 마일스가 학교에서 쫓겨나 집으로 오는데 그 이유는 끝까지 모호하게 설명된다.

플로라와 마찬가지로 마일스 역시 아름다운 외모와 분위기를 가진, 흠결 없는 심성의 소년으로 보인다. 가정교사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신 역시 성장한다고 생각하며 또 삶의 보람을 느낀다. 그녀 자신의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부분을 투영하듯 아이들을 아낀다. 가정부 그로스 부인이 이전의 가정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린 며칠 후, 탑 꼭대기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 남자를 목격한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남자가 저택 유리창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가정교사가 남자의 인상착의를 알리자 그로스 부인은 퀸트라며 겁에 질린다.

퀸트라는 하인은 방종하기 그지없어, 여러 스캔들을 일으키고 객사하였는데 그이의 행적은 소설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드러난다. 한편 가정교사는 플로라와 호수 근처에 갔다가 전 가정교사, 제슬로 보이는 여성을 본다. 이때 그녀는 제슬이 유령임을 알고 플로라의 반응을 통해 소녀와 유령이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음을 의심하게 된다. 그로스 부인에게 들은 사실은 무척이나 놀랍다. 비천한 신분의 퀸트가 상류층 여성이던 제슬의 배를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제슬이 이 집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그녀가 주목한 부분은 퀸트가 이 집 도련님 마일스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로스 부인은 그것을 영향력이라 표현한다. 여기서 퀸트와 마일스, 제슬과 플로라가 성적인 관계였음이 암시된다. 가정교사는 엄격한 도덕성이 요구되었던 빅토리아 시대 어느 시골 목사의 딸이다. 스무 살이 되었고 고용주에게 반해 있으며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아름다운 풍경과 꼭 맞는 천사 같은 아이들. 그러나 부도덕한 유령의 출현으로 아이들의 도덕성과 순수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보수적으로 자라왔을 가정교사가 자기 분신처럼 사랑하고 숭배하던 아이들을 그대로 둘 수 있었을까?

이 집에서 유령을 목격한 사람은 가정교사 밖에 없고, 아름답고 소중한 아이들을 유령의 영향력에서 떼어놓을 이도 그녀뿐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서 진실을 듣는 일은 쉽지 않다. 순진한 미소는 그녀와 힘겨루기를 하는 꿍꿍이로 느껴진다…. 이 소설에서 유령이 진짜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가정교사의 서술을 어디까지 믿느냐에 달려 있다. 소설의 모든 것은 모호하다. 가정교사는 가정부보다 계급이 높기 때문에 대화의 대부분을 이끌어간다. 교사는 아이들보다 위엄 있을지 모르나 신분은 아래이다. 아이들은 그녀를 존중하고 따르지만, 유령을 본 후 아이들에 대한 가정교사의 의심이 깊어지면서 이 역시 미궁에 빠진다. 아이들은 진실만 말하고 있는가? 그로스 부인은 가정교사의 의도대로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유령은 가정교사라는 신분의 한계, 보답 받지 못할 사랑, 억눌린 성적 욕망의 좌절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낮은 신분과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기존 권위에 대해 도전하는 것일수도, 혹은 저택 내 권력을 제어하려는 욕망일 수도 있다. 서술자의 자기기만이 환상과 현실을 혼동한다고 본다면, 『속죄』에 등장하는 브리오니와 『봄에 나는 없었다』에 등장하는 조앤과 비교할 만하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더글러스부터가 거짓일지도 모른다. 먼저 원고 자체가 거짓일 수 있고, 원고를 쓴 이가 가정교사가 아닐 수 있다. 또 더글러스는 트리니티 칼리지를 다니던 대학생일 때 열살 연상인- 누이의 가정교사를 만났다고 했는데 만약 마일스가 그라면 이 또한 거짓일 것이다.

사실 원고의 진위 여부에 대해 논하는 것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가정교사가 유령을 본 건지, 만든 건지에 따른 해석을 주고받는 편이 더 다채로워 보인다. 중요한 것은 진짜 유령이 존재했다면- 이 소설의 고딕 분위기가 한껏 살아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 작품은 모호함으로 무장한 심리 소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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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10-04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문단 읽고 그만 읽을까 말까, 잠시 고민했어요.
무서워서요~~~ㅎㅎㅎㅎ (웃지마세요, 진심입니다.(
앞부분은 <제인 에어>랑 비슷하네요. 젊은 가정교사, 매력적인 집주인, 귀여운 아이들. ㅎㅎㅎ

에이바 2016-10-05 11:11   좋아요 0 | URL
저번에 『리틀 스트레인저』때도 단발머리님 무섭다고 그러셨잖아요ㅎㅎ 근데 그 책은 좀 무서웠는데 『나사의 회전』은 그렇지 않아요. 제인도 그렇고 고딕 소설풍 이야기라 서로 연상되는 구석이 있어요. 하지만 제인은 모든 작품 중에서도 넘나 1순위! 좀 전에 알게 되었는데 오늘이 『제인 에어』 초판 출간일이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