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산 스님.초롱불 노래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3
이즈미 교카 지음, 임태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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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문학을 좀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실행에 옮기기 쉽지 않은 것은 왠지 모를 거부감이 일기 때문이다. 장르문학에는 비교적 관대하나 순문학으로 분류되는 작품들에는 어쩐지 마음 속 그어진 선을 넘기 힘들다. 그래도 『읽는 인간』과 『인간 실격』을 읽고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다. 조금 딴 말이지만 다자이 오사무가 턱 밑에 손을 짚고 찍은 사진 애거서 크리스티 닮지 않았나? 나만 그런가? ... 얼마 전 중견 소설가의 표절이 화두가 되면서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과 『금각사』에 흥미가 생겼다. 그러니까 ‘관심을 가지고 보려는’ 일본문학은 현대 문학에 뿌리가 된 근대 소설들이다. 내가 읽으려던 작품들은 『설국』, 『라쇼몬』 등이었는데 몇 번이나 주문 버튼을 달칵거리다 마음이 시들해져 장바구니를 비우기만 했다. 그러다 우연히 그보다 앞선 시기의 이즈미 교카의 소설이 눈에 들어왔다.


책에 실린 두 편의 소설 중 「고야산 스님」이 괜찮았다. 이야기 속에 두 이야기가 포함된 삼중 액자 소설로, 그 자리에 누워 옛 이야기를 듣는 듯한 생동감이 있다. 액자 바깥 이야기의 화자는 기차에서 만난 노승과 동행하여 여관에 묵게 된다. 잠을 이루지 못해 노승에게 이야깃거리를 부탁하고, 꽤 명망 있는 스님이었던 그가 젊을 적에 겪은 이야기를 해 준다.. 어느 마을의 주막에서 약장수는 승려를 조롱하고, 두 사람은 갈림길에서 마주친다. 약장수는 물이 가득 찬 길과 비탈길 중에 후자를 택한다. 지나가던 마을 사람 말에 따르면, 그 길은 50년도 지난 옛 길로 아주 험하다고 한다. 옳은 길로 가려던 승려는 약장수를 좋아하지 않으나, 그에게 사고가 난다면 마음이 불편해질 것 같아 옛길로 접어든다. 나무가 우거진 길을 떡하니 지나가는 ‘몸통’ 밖에 보이지 않은 거대한 뱀에 식겁하였더니, 다음은 더하다. 진짜 책을 읽다 소리를 지를 뻔한 고어 장면인데 XXX가 가득 찬 숲을 지나는 것이다. 책에서 확인하시길... 그렇게 고생하며 외딴 오두막에 도착한 스님. 그 곳에 사는 묘령의 아리따운 여인에 이끌려 계곡에서 멱을 감는다. 스님이 순진한 건지, 도력이 높은 건지 모르겠으나 여러 유혹을 물리치고 잠자리에 든다. 그는 진짜 여러 번 식겁하는데(겁이 많단다) 밤이 깊어오자 온갖 짐승들이 집을 둘러싸는 것이다. 무서움을 누르기 위해 법경을 외고, 다음날 그를 붙잡는 여인을 뒤로 하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반전이 있었다.


만화를 봐도 그렇고(대표적으로 『백귀야행』) 일본에는 온갖 신과 요괴들이 있는데 이를 현대적인 콘텐츠로 잘 활용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도 배경과 소재로 등장하고,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신사를 간다거나 마쯔리 같은 축제를 통해 지방색과 함께 슬쩍 드러낸다. 전통 설화, 그 중에서도 민담이 잘 이어지고 있는 것이 흥미로우면서도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우리의 세시풍속은 상당부분 왜곡과 수정, 삭제를 거쳐 그 명맥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화 과정에서 미신 취급을 당하기도 하고... 예전에 찾아본 바 우리나라 도깨비는 대체로 인간의 형상으로 씨름, 이야기, 장난, 메밀묵을 좋아하고 약간 어리숙한 성격이다. 김서방이랑 어울리고 싶어 하는데 맨날 이용당하는 호구 같은, 그러나 신령스런 존재다. 오래된 물건이나 싸리빗이 둔갑을 하지만 뿔은 없다. 뿔 하나에 방망이 들고 가죽 빤스 입은 도깨비는 일본의 요괴 오니라 한다. 두억시니엔 뿔이 있다는데 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역사 왜곡 설화로는 고려장을 들 수 있다. 일본의 꼼꼼한 문화 말살 정책 중 하나로, 전통적으로 효를 강조하던 우리나라(고려 포함)에선 말도 안 되는 얘기라 한다. 고려장은 고려와 관련이 없으며, 실제 고려는 불교국가라 화장을 했다.


「초롱불 노래」 같은 경우는 전쟁 얘기가 스치듯 나오는데 큰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인지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다. 기예, 가부키라는 예술혼이 주제로, 문화재로 지정될만한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두 노인이 풍류소설의 주인공 흉내를 내면서 (마치 돈키호테처럼) 여관을 향한다. 이 이야기와 교차되는 것이 우동 가게로 들어온 떠돌이 악사의 이야기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처럼 등장인물들의 면면은 서로 이어져 있다. 갈등의 고조되면서 절정에 이를 때 어떤 혼연일치를 보여준다. 그 장면에선 감탄했다. 두 단편으로도 왜 다른 문인들이 이즈미 교카를 흠모하고 존경했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고야산 스님」의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묘사에서 낭만주의가 느껴졌고, 「초롱불 노래」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어떤 카타르시스도 느껴졌다. 그렇게 길지 않으므로 한번쯤 읽어볼만하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자존심이 강한건지, 약한건지 도통 모르겠다. 조롱당하면 목숨을 끊어버리니... 『아베 일족』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너무 극단적이야! 그 이야기는 다음에... 번역의 공이 크겠지만 백년이 지난 소설이 이토록 깔끔하다는게 놀라웠는데, 위에서 말했듯이 씁쓸한 여운이 남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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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0-2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으스스한 설화 느낌 좋아하시면 라쇼몬을 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취향에 맞으실 지도...단편들에서 특히. 설화를 쓰는 다자이 오사무라고 할 만 하니까요...좋은 건지 싫은 건지 읽는 내내 헷갈리게 만들던 작가;

에이바 2015-10-21 16:12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라쇼몬이랑 설국 읽으려고 사뒀는데 선뜻 손이 가질 않아서 일단 교카 거부터 읽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