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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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를 복원하고 싶다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공산주의를 그리워하지 않는다면 심장이 없는 사람이다. - 블라디미르 푸틴

 

내 안의 러시아는 극단적인 이미지들로 가득 차있다. 상상을 뛰어넘는 행동을 일삼으면서도 시를 외는 것이 자연스러운 나라. 낭만과 살벌함 이면에 순수함을 간직한 나라.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는 그런 이미지를 잘 반영한다. 어지럽고 스물스물한 변화하는 시대에, 끝없이 펼쳐지는 설원만큼이나 오랫동안 이별해야 했던 연인들. 차르를 신처럼 생각했던 순박한 농민의 나라. 그런 차르를 혁명으로 끌어내려 인민들의 나라를 만든 이들. 재기를 위해 무서울 정도로 성장하는 나라. KGB, 스페츠나츠, 마피아, 신나치의 살벌한 이미지. 보드카와 강의 얼음을 깨 냉수마찰을 즐기는 패기. 예술과 낭만의 나라. 문학과 발레, 클래식. 타이가에 부는 바람과 시베리아에 눈 내리는 소리. 이토록 극단적인 이미지의 나라. 『리모노프』를 읽으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에두아르드 베니아미노비치 사벤코.

 

레몬과 수류탄을 합친, <리모노프>라는 이름을 스스로 짓기까지 사벤코 청년은 (어쨌든지) 열심히 살았다. 군인이 되어 멋지게 살아보리라 했지만 시력이 좋지 않아 그 꿈은 포기하고 <살의>를 가진 사람으로, 모두를 압도하는 이가 되기로 마음 먹는다. KGB의 하급 관리였던 아버지를 <루저>로 칭했지만 그 역시 공장에서 일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살 기도를 하고 정신병원에 수감되기도 한다. 문학 서클에 가입하게 되고, 그 곳에서 만난 여자, 안나의 기둥서방 노릇을 한다. 모스크바에서 만난 엘레나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 제트족의 예쁜 러시아 인형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엘레나와의 결별 이후 뉴욕의 빈민으로, 노숙자 생활을 하기도 하고 그의 인생을 바꿔 줄 경험을 쓴, 남성과의 섹스를 <경험>하기도 한다. 파란만장한 그의 삶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문인들과 유명인들이 거쳐가며, 모스크바에서 그의 책이 출간된 후 20년만에 조국 땅을 밟게 된다.

 

주철 배관 위에 광택 스테인리스 세면기를 얹어 단순하면서도 깔끔하게 디자인한 수용소 세면대는 80년대 말에 그가 출판사 편집자의 초청을 받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필립 스탁이 실내 디자인을 맡았다는 뉴욕의 한 호텔에서 봤던 세면대와 똑같았다고 그는 회상했다. … 그,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처럼, 볼가 강변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 수감된 일반범의 세계와 필립 스탁의 디자인 속에서 유영하는 멋쟁이 작가의 세계, 이토록 이질적인 세계들을 두루 경험한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틀림없이 많지 않아, 라는 결론에 이르는 순간 그는 자긍심을 느꼈다. 그 심정, 나도 이해한다. 바로 그 때문에 내가 이 책을 쓰려는 것이다. 37p

 

작가는 러시아의 정치인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의 인생을 전기의 형태로 늘어놓는데 종종 자신의 체험과 생각을 곁들인다. 소설은 허구임을 알고 있지만, 기사를 읽는듯한 기분이 들어서인지 다소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리모노프의 삶은 적나라하게 해체된다. 뉴욕 시절 제트족 부부가 선물한 텔레비전에 나온 솔제니친을 조롱하며 항문 섹스를 한다던가, 군인이 되고 싶었던 열망을 세르비아 전쟁에 참전하면서 이룬다던가. 기행으로 가득 찬 전기를 쓰던 엠마누엘 카레르조차, 그의 세르비아 참전을 다룰 때는 글쓰기에 회의를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두아르드에게 있어 이러한 점은 인정해줘야 한다.>는 대목이 등장할 때면 카레르가, 리모노프를 꽤 괜찮게 생각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남들을 무시하고 신랄하게 조롱하며, 매력적인 웃음 뒤로 칼날 같은 야망을 숨긴 남자. 모스크바로 귀환하여 만난 노파에게 <우리를 위해 기도해줘요!>라고 애원할 수 있는 남자. 수용소에서 만난 이들을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는 남자. 파시스트에, 이기적이며 야망이 들끓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 인간이 무엇을 바라는거야? 의문마저 들지만 리모노프라는 사람의 속성은 극단적인 러시아의 이미지만큼이나 매력적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우크라이나의 하리코프에서 뉴욕과 파리, 모스크바에 이르기까지 그의 장대한 인생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 시기 러시아인들의 삶 또한 들여다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하리코프의 공장에서는 나사를 죄는 일을 하면서도 시 낭송, 외기가 취미인 이들을, 서점에서 일하며 문학 서클을 꾸려 사미즈다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깊은 대지애를 떨쳐내고 미국으로 이민을 희망한 러시아 이민자들의 모습을. 뉴욕의 제트족 세계에 입성한 줄로 착각하고 뒤이은 좌절로 인해 빈민의 생활을, 주인을 보필하면서도 그를 조롱하기를 멈추지 않은 집사 시절. 결국 스스로를 상품화, 자신의 일대기를 자극적으로 그려낸 소설 『나, 에디치카』는 『러시아 시인은 덩치 큰 깜둥이를 좋아해』라는 이름으로 파리 문단의 시선을 모으는데 성공한다.

 

하리코프와 모스크바, 뉴욕, 파리에 이르기까지 <이쯤이면 됐다> 싶을 만큼 그들을 <경험>한 리모노프는 돌아온 조국에서 <리몬카>라는 잡지를 통해 젊은 세대의 지지를 얻게 되고, 이는 하나의 문화현상이 된다. 이후 <나츠볼>이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은 정치적 집단으로 성장하게 되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러시아의 중소도시에서 온, 찌질하게 느껴질 정도로 섬세한 시골 청년들에 불과했고 여전히 그러하다.

 

러시아의 지방 도시가 어떤 곳인지부터 아셔야 합니다. 그곳에 사는 청년들의 따분한 삶, 전망 없는 미래, 조금이라도 감수성과 열망이 있는 청년이라면 당연히 느낄 절망감을 말이죠. 410p

 

소련 체제하에서 그들이 보낸 유년기는 청소년기나 청년기보다 행복했다. … 그들은 평범하지만 자긍심이 넘치던 부모들의 좌절과 수모를 곁에서 지켜보았다. 가난에 쪼들리는, 무엇보다 자긍심을 잃어버린 부모를, 나는 그들이 무엇보다 참기 힘들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으리라 짐작한다. 412p

 

정치 활동으로 노동 수용소에 수감된 에두아르드는 명상을 통한 깨달음과 한결 같은 자기 관리로 기인과도 같은 모습을 자아낸다. 이로 인해 동료 수감자들의 존경을 얻게 된다. 그가 한 단계 더 성장했구나 감탄한 것도 잠시였다. 출소 후 그를 기다려온 어린 연인을 버리고, 미모의 여배우와 결혼하는 모습에서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두아르드 사벤코, 에두아르드 리모노프라는 다층적인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 긴 여정을 달려왔다. 책의 끝에서 카레르는 푸틴과 사벤코의 차이점을 성공 여부에 두고 있다. 푸틴은 성공했고, 리모노프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 푸틴의 정책을 반대하면서도 크림반도 합병에는 찬성하는 에두아르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픈 그의 러시아적인 열망은, 책 속에 등장하는 이들이 리모노프를 평가할 때 그리 나쁜 말들이 아닌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속물적이면서도 순수한 구석이 있는 그의 극단적인 모습들도, 모두 러시아적인 것이며 그가 열망하는 성공과 강한 조국 역시 러시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마무리짓기 위한 인터뷰에서 카레르가 느꼈던 낯섬, 어색함 역시 에두아르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가 살아온 삶은 현재의 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현재의 그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말은 어정쩡하다. 이 글을 쓴 카레르도, 주인공 리모노프도, 독자인 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결말이다. 그의 인생이 자극적인 만큼, 자극적인 결말을 원했기 때문이었을까? 에두아르드의 말처럼 정말 <개떡같은 인생>이다.

 

책 속에서는 브로드스키와 함께 예로페예프가 종종 언급되는데, 그가 에두아르드와 비슷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러시아식 만취, 자포이를 다룬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고, 존경을 받았지만 에두아르드는 그를 싫어했다. 그보다 일찍 태어났기에, 성공을 가로챌 수 있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강연장에서 받은 질문- 황색 신문 장사치인 율리안 세묘노프의 후원을 받는 걸 보고 찾아와 악수를 청해도 거절하겠다는 예로페예프의 말에 에두아르드는 별 다른 심정이 없으며, 그와 자신은 동지 사이가 아니었다고 대답했다.『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를 통해 하리코프 시절의 에두아르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전체주의의 속성은 눈에 검정색이 보이는 사람들에게 흰색이라고 말하게 하고, 이것을 되풀이하다 못해 종국에는 진짜로 그렇게 믿도록 강요하는 것인데, 이런 권위주의적 측면에 있어 소련은 사민주의 독일보다 훨씬 극단적인 양상을 보였다. 소련의 경험이 지니는 환상성, 끔찍하면서도 동시에 끔찍하게 희극적인 환상성은 바로 이러한 측면에 기인하는 것이며, 자먀틴의 『우리들』부터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 지노비예프의 『입 벌린 고지』에 이르는 지하문학이 조명한 것도 바로 이런 측면이었다. 필립 K. 딕이나 마틴 에이미스, 나 같은 작가들이 지난 세기 러시아에서 인류에게 벌어졌던 일을 기록한 것을 무조건 찾아 섭렵하는 것도 이러한 측면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러시아 전공 역사학자 마틴 말리아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전체적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특정한 악습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공격이다. 이것은 현실을 폐기하려는 기도이고, 이러한 기도는 장기적으로는 실패하지만 일정 기간 동안은 비효율과 결핍, 폭력을 최고의 선으로 간주하는 모순이 지배하는 초현실적 세계를 만들어 낸다.> 2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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