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로주점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77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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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은 에밀 졸라의 역작 『루공-마카르 총서: 제2제정 시대를 살아가는 한 집안의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역사』의 13번째 이야기이다. 『루공-마카르 총서』는 말 그대로 루공 집안과 마카르 집안의 이야기인데, <아델라이드 푸크>의 자손들의 일생을 5대에 걸쳐 서술하면서 프랑스 제 2제정의 민중사를 드러내고 있다.

 

총서의 부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졸라는 철저히 유전학과 가족의 계보를 투사하여 이야기를 꾸려 나간다. 이야기인 즉슨, 인간의 기질과 같은 특성은 세대를 거듭하며 유전(자연적 역사)되는 것으로, 그 사람이 처한 환경(사회적 역사) 또한 그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루공-마카르 집안의 할머니인 아델라이드 푸크는 정신병을 앓고 있던 여성으로, 원예가였던 남편 루공과의 사이에서 피에르 루공을 낳는다. 남편의 사후, 밀수입자인 정부 마카르와의 사이에서 딸 위르쉴과 아들 앙투안을 얻는데 『목로주점』의 제르베즈는 바로 앙투안의 딸이다. 적법한 장자인 피에르 루공은 상류층, 시집간 위르쉴 무레는 중류층, 앙투안 마카르는 하류층의 생활을 대표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할머니의 정신병과 아버지의 기질은 각각의 자손에게 유전되고, 이는 극복할 수 없는 기질로서 자손들의 전반적인 삶을 지배하게 된다.

 
가족 계보 그림의 출처: 클릭해서 보기 (사이트에서 이름을 클릭하면, 프랑스어로 쓰인 인물 소개를 볼 수 있다.)

 

 

목로주점의 줄거리를 간단히 들여다 보면 다음과 같다.

 

1. 제르베즈는 폭력적인 아버지에 의해 술취한 어머니에게 수태되어, 절름발이로 태어났다.

2. 10대 시절 오입쟁이 랑티에의 아이 둘을 낳고, 함께 머물던 파리의 호텔에서 버림받는다.

3. 성실한 함석장이 쿠포와의 결혼은 제르베즈에게 안정감을 주고, 열심히 일하여 자기의 세탁소를 차리게 된다.

4. 가게를 보러 가는 날, 딸 나나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쿠포가 지붕에서 떨어진다.

5. 쿠포는 다친 다리를 핑계로 일을 하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러 다닌다.

6. 세탁소의 여사장이 된 제르베즈의 씀씀이는 점점 커지고, 그녀의 30살 생일잔치인 거위파티에서 흥청망청은 극에 달한다.

7. 파티에 나타난 옛 남자 랑티에 때문에 제르베즈는 두려워하지만, 랑티에는 남편 쿠포와 죽이 잘 맞아 친구가 된다.

8. 랑티에의 교활함은 쿠포 집안과 제르베즈의 세탁소와 세탁소가 위치한 구트도르 가를 지배하게 된다.

9. 제르베즈의 플라토닉 러버인 구제는 이를 걱정하며 함께 달아날 것을 청하지만 거절한다.

10. 결국 제르베즈는 랑티에의 유혹에 굴복하게 되고, 나나는 엄마의 부정을 빛나는 눈으로 지켜본다.

11. 사실을 알게 된 구제는 제르베즈에게 차가워지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제르베즈는 자신을 놓아버리고 비극으로 치닫는다.

 

제르베즈의 비참한 말로는 예정되어 있고, 그녀의 세 아이들*(클로드, 에티엔, 나나) 또한 유전학과 환경의 법칙을 피할 수 없다. 일단 제르베즈는 절름발이로 태어나는데, 이는 (졸라에 따르면) 폭력적인 아버지의 성향이 드러난 것이다. 수태 기간 동안 알코올에 빠져 있는 어머니 덕분에 제르베즈는 알코올 중독이라는 유전적 특성도 물려받는다. 제르베즈의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는 두 남자- 첫 남자인 랑티에 역시 교활하고 이기적인 인물이며, 이후 남편이 되는 쿠포 역시 술꾼인 아버지의 기질을 물려 받았다. 소설 내에서 쿠포 할멈 역시 부정이 여러 번 암시되며, 이는 딸 나나의 미래가 그리 순탄하지 못할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목로주점을 읽으면서 줄곧 드는 생각은,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도무지 <절제>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이들에게 '절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콜롱브 영감의 <목로주점>에서 쿠포와 친구들이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는 장면이 있다. 쿠포 무리는 지나가는 로리외와 구제를 보고 술집으로 불러 들이는데, 이들은 분위기를 살피더니 핑계를 대고 가 버린다.(로리외는 소심하고, 구제는 하층민이지만 성실한 인물이다.) 이 장면 이후로 이어지는 술집 투어는 삼일이나 지속되며 돈이 없으면 외상을 내서라도 술을 마신다. 재밌는 점은 이 술판을 벌인 무리 속에 랑티에가 있다는 것이다.(물론 돈을 내지 않는다.) 이 교활한 남자는 자기 절제가 뛰어난 편이라, 술에 취해도 티가 나지 않고 자신이 취한 것 같으면 어느샌가 술자리에서 사라지고 없다. 심지어 없어진 걸 들키지도 않는다.

 

랑티에의 캐릭터를 현대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소시오패스라고 할 수 있겠다. 주위 사람들을 주물러 원하는 것을 얻는데 도가 트인 자로서, 쿠포를 살살 녹여 제르베즈의 세탁소에 들어와 이 가족을 수중에 넣는다.(제르베즈의 첫 남자였기 때문에 쿠포는 랑티에를 경계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제르베즈의 대외적인 남편 역할을 하면서 그녀의 몸까지 취하며, 나나의 교육에 간섭하고 세탁소의 주인 행세를 한다. 온갖 루머가 돌아다니는 구트 도르 가(세탁소가 위치한 거리)지만, 이상하리만큼 랑티에의 평판이 좋다. 반면 제르베즈의 평판은 바닥을 뚫고 맨틀까지 닿을 기세다. 쿠포 가가 몰락하면서 푸아송 부부에게 제르베즈의 세탁소를 넘기게 되는 흑막에는 랑티에가 있고, 더 무서운 것은 푸아송네를 어떻게 구워 삶았는지 랑티에는 여전히 그 집에 살기로 한 것이다!

 

제르베즈의 몰락에는 이러한 랑티에의 음흉함과 교활함이 큰 역할을 했는데, 제르베즈의 '자기만족적인 기묘한 헌신'이 여기에 합쳐져 몰락에 빠르기를 더한다. 랑티에와 쿠포는 일하지는 않고 제르베즈의 등골을 빼 먹기만 하며 제르베즈는 빚을 내서 이 두 남성을 거둬 먹인다. 빚더미에 앉은 집이 흥청망청 외식을 하고, 빚을 내어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동네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다. 제르베즈는 식도락에서 큰 만족을 얻는데, 이는 세탁소의 여주인이 되면서 생긴 '과시욕'과 합쳐져서 이를 보는 독자를 심란하게 한다.

 

쿠포, 랑티에, 제르베즈 세 사람의 기묘한 관계 또한 이 몰락에 한 도움을 했다. 랑티에가 하숙생으로 들어오면서 제르베즈의 세탁물은 오갈 곳을 잃는데(세탁방이 랑티에의 방이 됨), 더러운 빨랫감은 집과 세탁소의 경계를 없애 버렸다. 이 장면은 나중에 쿠포의 토사물 때문에 제르베즈가 랑티에의 침대로 건너가는 장면에서도 중첩된다. 쿠포는 제르베즈의 부정을 짐작하면서도 모른 체 하며 랑티에를 통해 지적 허영심을 채웠고(아니면 그저 술 핑계를 댈 수 있는 좋은 친구?), 랑티에는 여자들을 농락하며 편히 살 수 있어 좋고, 제르베즈는 이 상황을 거부하려 했지만 운명을 거스르지 못했고.

 

아무튼 이들에게는 <절제>가 없었다. 빚더미에 올랐으면 씀씀이를 줄여야 하는데, 그러기는 커녕 더 흥청망청 돈을 썼다. 제르베즈는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해보려 했지만, 거듭되는 실패 때문인지 두 남편의 방종함에 물들고 만다. 그 와중에도 옆집의 랄리나 브뤼 영감에게 보여준 제르베즈의 관심이 여주인공의 비참한 죽음을 더 비극적으로 만든다.

 

졸라는 이러한 하층민의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유전학과 환경결정론을 통해 설명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이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과학적인 이론이었고 각광받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를 터무니 없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 현재 우리 생활에서도 종종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쟤는 아빠를 닮아서 술을 잘 마실거야>, <쟤는 제 엄마랑 식성이 꼭 닮았어>와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하지만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처럼, 인생에 어떤 정해진 법칙이 있다고 생각이 들진 않는다. 타고난 기질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인생의 황금기 때에는 잠복하고 있다가 인생의 불행기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래서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야말로 더 주목받아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

 

반면 환경결정론은 어떻게 부인을 못 하겠다... 오히려 140여년 전 보다 지금 우리 사회를 설명하기에 더 걸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의지가 아무리 대단해도 극복할 수 없는 부분은 존재한다. 반면, 환경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도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책장을 덮고 나니, 나를 끌어들였던 흡입력만큼이나 커다란 허탈감이 남았다. 등장인물에 대한 애정 한 자락 남기지 않고 담담하게 소설의 끝을 선언하는 졸라의 태도는 매정할 정도다. 하지만 다시 책을 집어 들어 19세기 파리의 한 거리를 들여다보게끔 하는 이야기의 힘이야 말로, 『목로주점』의 매력이 아닐까.

 


*『목로주점』에는 세 아이들만이 등장하지만, 계보 사진을 보면 둘째인 자크 랑티에가 있다. 『인간 짐승』의 주인공으로서 아마도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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