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갚는 기술 - 돈 한 푼 안 들이고 채권자 만족시키기 고전으로 오늘 읽기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선주 옮김 / 헤이북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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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으로 유명한 오노레 드 발자크는 1799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로본 대학 법대를 중퇴하고 수많은 가명으로 글을 쓴다. 본명으로 쓴 최초의 글이 1829년에 나온 <올빼미당원 (Les Chouans)>이라 올빼미당원을 발자크의 데뷔작으로 치지만, 발자크는 1829년 이전에도 수많은 글을 썼다.

발자크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인쇄소를 차리고 유명 작가의 문학서적과 가명으로 쓴 자신의 책도 출판하지만, 경영에는 소실이 없었는지 결국 빚만 잔뜩 남기고 사업을 말아먹는다. 빚을 갚기 위해 하루에 커피 40잔씩 마시며 발자크는 글을 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쓰지도 않는 글을 대가로 돈을 빌려서 다른 채권자에게 빚을 갚는 모습도 눈에 선하다. 생전에 유명한 작가 반열에 올랐음에도 왜 빚에 허덕였는지, 정말 독특한 작자가 아닐 수 없다. 정원에다 기후에 맞지 않는 사치스러운 파인애플 나무를 키우면서, 동생에게는 옷이 해질까 봐 외출도 못 나간다는 편지를 쓴다. 샤를르 보들레드는 그런 발자크를 보며 글을 쓰는 재주만큼이나 빚 청구서를 쓰는 재주가 있다고 언급한다. <빚 갚는 기술>을 읽다 보면 발자크의 생존법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소설이 아니라 실제 경험담이구나.

<빚 갚는 기술>은 발자크가 인쇄소를 운영하던 시절인 1827년, 가명으로 쓴 책이다. 화자인 조카 앙페제 남작(발자크의 가명)이 삼촌의 유지에 따라, 삼촌이 어떻게 많은 채권자들에게 많은 돈을 빌리고도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그 경험담을 풀어나가는 이야기이다. 결국 돈 한 푼 갚지 않고도 채권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한 한 채무자가 빚을 갚지 않고 버티는 이야기이다. 이 책의 부제가 <돈 한 푼 안 들이고 채권자 만족시키기>이다. 채권자 입장에서 들으면 속이 터질만한 제목이다^^.

삼촌 앙페제 남작은 채권자를 생산자로 보고 채무자를 소비자로 본다. 가난한 채무자는 돈 많은 채권자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빌려 사는 것이 문제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빌린 돈을 갚는 게 문제가 될 수 있으니 갚지 말라고 한다. 삼촌은 빚의 종류, 채권자와 채무자의 종류, 여러 나라에서 빚을 안 갚으면 발생하는 일 등을 자신의 경험과 함께 나열한다. 진지하게 읽으면 이 삼촌은 정말 몹쓸 사람 같아 화가 나지만, 별별 사람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라고 생각하면 웃으면서 읽을 수 있다.

삼촌은 부자에게 돈을 빌리라고 한다. 그들에게 자신이 빌린 몇 푼의 돈은 큰 금액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채권자들을 오전 10시부터 집 응접실에 대기시키고 순서대로 한 명씩 이야기하라고 한다. 웃음 포인트는 돈을 갚는 게 아니라 돈을 더 빌릴 궁리를 하라는 것! 채권자들이 돈을 갚을 수 있냐고 물어보면 돈이 없을 수도 있다고 짧게 얼버무리며 말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건강한 신체를 유지해 언제든지 (죽지않고) 돈을 갚을 수 있을 것 같은 모습(희망)을 보이는게 중요하다고도 한다. 삼촌이 채권자들에게 끊임없이 희망고문을 하며 돈을 당당하게 빌리는 모습, 채무자가 아파하는 모습에 어쩔 줄 몰라하는 채권자의 모습을 생각하니 아찔하다.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없나 돌아보게 된다.

삼촌은 집을 빌릴 경우 어떤 수위를 만나야하고 어떤 집을 빌려야 하는지도 알려준다(길이 보이는 5층 이상 아파트로 빌려야 한다. 왜냐하면 채권자를 오는 것을 보며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고 채권자가 높은 계단을 오르는 동안 채권자가 지칠 수 있기 때문이다). 듣다 보면 발자크의 삶과 너무 겹친다. 채권자를 피해 다니느라 이사를 수없이 다니고, 늘 정문과 후문(도망치는 용도)이 함께 있는 집을 선호하는 발자크 역시 채권자를 피해 다녔기 때문이다. 심지어 후원자가 그에게 돈을 주고 싶어도 (빚쟁이를 피해 도망다느라 바쁜) 발자크를 만날 수 없어 후원해줄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책을 다 읽고 앞표지를 다시 본다. 가난한 자는 부자의 주머니를 털고 있고, 부자는 가난한 자의 주머니를 뒤지나 나오는 게 없다. 그래도 둘은 서로 손을 잡고 협력한다. 이것이 글 속 삼촌과 어쩌면 발자크가 생각하는 채권자와 채무자, 즉 생산자와 소비자의 모습일 것이다. 책의 말미에 화자는 삼촌은 이런 방법으로 살아왔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채권자와 채무자가 되기 쉽지 않다며 따라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이야기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야지 불법적인 행위를 따라하면 안된다!

알쓸인잡(tvN,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인간 잡학사전)에서 김영하 작가가 발자크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발자크의 책을 한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발자크와 너무나 닮아있는 <빚 갚는 기술>을 읽게 되어 너무 재미있었다. 빚이라는 것은 발자크 개인에게 있어서는 무거운 짐이지만, 빚이 있었기에 우리가 발자크의 수많은 글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한마디로 말하기 힘들다.

(헤이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감상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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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거시제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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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일을 마치 과거에 직접 겪은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p92 <미래과거시제> 중에서

김초엽 작가의 에세이 <책과 우연들>에 배명훈 작가의 <안녕, 인공존재>가 소개되었다. 배명훈 작가의 이력만큼이나 작가의 SF소설이 궁금했는데, 마침 작가의 SF 단편들을 묶은 <미래과거시제>가 출간되어 읽어보았다.
이 책은 저기능 로봇 마사로와 심해 도시 건설 프로젝트 인간 책임자 유희의 이야기를 담은 <수요곡선의 수호자>, 2113년 차카타파음이 사라진 미래 한국을 그린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미래과거시제로 말하는 사람을 그린 <미래과거시제>, 지구에서 화성으로 가는 우주선 안에서 학창 시잘 종이접기를 잘 하는 친구를 20년 만에 만난 <접히는 신들>, 잠실 롯데타워에 나타난 외계인과 지구접선인을 그린 <인류의 대변자>, 로봇조종사와 전쟁의 이야기를 그린 <임시 조종사>, 응원 애플리케이션에 관한 <홈, 어웨이>, 반은 사람이고 반은 기계인 <절반의 존재>, 스토리 생성 프로젝트를 담은 <알람이 울리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당 소설이 끝날 때마다 작가의 말이 나와, 앞 작품을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는지 소개해준다. 그래서 소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는 '보이지 않는 손'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로봇이야. 수요곡선의 수호자지.p19 <수요곡선의 수호자>중에서

사람보다 뛰어난 인공지능과 로봇들이 득세하는 세상, 사람들은 창작의 의욕을 잃고 실업자가 되어 간다. 그때 <오직 소비만>하는 로봇 마사로가 나타난다. 요즘 챗GPT 등 뛰어난 인공지능이 나타나 걱정이었는데, 마사로가 손을 모으고 작품을 감상하는 모습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격리 실습실이 시간을 격리하듯, 한 시대는 바로 앞 시대와 거리를 두었다.
매우 짧은 시간 간격을 두고.p74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차카타파의 열망으로은 코로나 100년 후의 세상을 그리고 있다. 차카타파음이 사라진 한국이 작품컨셉이라 맞춤법이 엉망이다. 처음에는 출판사에서 실수한 줄 알고 맞춤법 오류를 제보해야 하나 고민했다. 역사학과 격리 실습 코스 중인 대학원생과 톱스타 여배우 서한지의 모습이 연애소설 같기도 하고 SF 소설 같기도 하고 헷갈린다.
미래과거시제에서는 튀르키예(구. 터키) 알트나이 교수의 튀르키예어 강의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미래과거시제로 말하는 강은신과 김은경 그리고 김은경의 친구 미술대 교수 우매희가 나온다. 김은경과 우매희라는 이름은 다른 작품에서도 나온다. 물론 처한 상황, 직업이 모두 다르고 이름만 같다. 배명훈 작가의 이름 돌려쓰기인가^^
접히는 신들에서는 서소희와 그의 학교 동창 김은경이 나온다. 서소희라는 이름 역시 다른 작품에서도 나온다. 이름이 중복되어서 처음에는 이 책이 단편모음집이 아니라, 옴니버스 장편소설인가 잠깐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가 가도 되는 거야. 아, 정말이지 다행이지 뭐야. 인류가 충분히 어리석어서.
그래야 내가 마음 편히 대변할 수 있으니까.p203 <인류의 대변자>

인류의 대변자는 잠실 롯데타워, 타칭 사우론의 탑에 나타난 외계인의 이야기로 <접히는 신들>과 외계인의 형상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다. 검은색 반짝이 옷(우주군 정복)을 입은 우주군 조은수와 공군 우매희가 나온다. 그리고 매우 현실적인 대한민국 이야기도 나와, 헉!했다. 우리에게 수능이란 무엇인가?!

묻지 마오 구인공고, 어떤 일인지 묻지를 마오.p221 <임시 조종사>중에서

<차카타파의 열망으로>가 맞춤법이 엉망이라서 읽기 힘들었다면 <임시 조종사>는 판소리처럼 쓴 소설이라 어려웠다. 취업난을 겪은 로봇 조종사 지하임과 전쟁에 관한 미래 이야기인데, 문체는 구한말 느낌이 난다. 읽는 내내 판소리 춘향전과 흥부가의 리듬에 맞춰 노래하듯 읽었다. 눈으로 읽는데도 숨이 차다.

이 하찮은 소설가 나부랭이, 늪에 빠져서 나부랭 나부랭 울고 있는 거 건져줬더니 어디서 에헴질이야? p280 <홈, 어웨이>중에서

나부랭 나부랭, 에헴질이라는 말이 너무 재미있었다. SF소설에서 이런 말 듣기 쉽지 않는데 말이다^^

그외 슬럼프에 빠진 작가 김은경과 친구 한민지(타칭, 한먼지), 라이벌 작가 서소희의 이야기 <홈, 어웨이>와 무엇을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한 <절반의 존재>, 홀로그램과 영화 인셉션이 생각나는 <알람이 울리면>도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에 나온 배명훈 작가의 SF 소설들은 톡톡 튀면서 무겁지 않다. 그리고 책장을 덮으면 여운이 남는다. 특히, 로봇 마사루와 한벽을 뜯으면 남은 벽들은 어떻게 되냐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다혜 님의 추천사 <배명훈은 웃기다, 진지하다, 치밀하다>는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북하우스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감상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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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거시제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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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일을 마치 과거에 직접 겪은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p92 <미래과거시제> 중에서

김초엽 작가의 에세이 <책과 우연들>에 배명훈 작가의 <안녕, 인공존재>가 소개되었다. 배명훈 작가의 이력만큼이나 작가의 SF소설이 궁금했는데, 마침 작가의 SF 단편들을 묶은 <미래과거시제>가 출간되어 읽어보았다.
이 책은 저기능 로봇 마사로와 심해 도시 건설 프로젝트 인간 책임자 유희의 이야기를 담은 <수요곡선의 수호자>, 2113년 차카타파음이 사라진 미래 한국을 그린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미래과거시제로 말하는 사람을 그린 <미래과거시제>, 지구에서 화성으로 가는 우주선 안에서 학창 시잘 종이접기를 잘 하는 친구를 20년 만에 만난 <접히는 신들>, 잠실 롯데타워에 나타난 외계인과 지구접선인을 그린 <인류의 대변자>, 로봇조종사와 전쟁의 이야기를 그린 <임시 조종사>, 응원 애플리케이션에 관한 <홈, 어웨이>, 반은 사람이고 반은 기계인 <절반의 존재>, 스토리 생성 프로젝트를 담은 <알람이 울리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당 소설이 끝날 때마다 작가의 말이 나와, 앞 작품을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는지 소개해준다. 그래서 소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는 '보이지 않는 손'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로봇이야. 수요곡선의 수호자지.p19 <수요곡선의 수호자>중에서

사람보다 뛰어난 인공지능과 로봇들이 득세하는 세상, 사람들은 창작의 의욕을 잃고 실업자가 되어 간다. 그때 <오직 소비만>하는 로봇 마사로가 나타난다. 요즘 챗GPT 등 뛰어난 인공지능이 나타나 걱정이었는데, 마사로가 손을 모으고 작품을 감상하는 모습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격리 실습실이 시간을 격리하듯, 한 시대는 바로 앞 시대와 거리를 두었다.
매우 짧은 시간 간격을 두고.p74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차카타파의 열망으로은 코로나 100년 후의 세상을 그리고 있다. 차카타파음이 사라진 한국이 작품컨셉이라 맞춤법이 엉망이다. 처음에는 출판사에서 실수한 줄 알고 맞춤법 오류를 제보해야 하나 고민했다. 역사학과 격리 실습 코스 중인 대학원생과 톱스타 여배우 서한지의 모습이 연애소설 같기도 하고 SF 소설 같기도 하고 헷갈린다.
미래과거시제에서는 튀르키예(구. 터키) 알트나이 교수의 튀르키예어 강의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미래과거시제로 말하는 강은신과 김은경 그리고 김은경의 친구 미술대 교수 우매희가 나온다. 김은경과 우매희라는 이름은 다른 작품에서도 나온다. 물론 처한 상황, 직업이 모두 다르고 이름만 같다. 배명훈 작가의 이름 돌려쓰기인가^^
접히는 신들에서는 서소희와 그의 학교 동창 김은경이 나온다. 서소희라는 이름 역시 다른 작품에서도 나온다. 이름이 중복되어서 처음에는 이 책이 단편모음집이 아니라, 옴니버스 장편소설인가 잠깐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가 가도 되는 거야. 아, 정말이지 다행이지 뭐야. 인류가 충분히 어리석어서.
그래야 내가 마음 편히 대변할 수 있으니까.p203 <인류의 대변자>

인류의 대변자는 잠실 롯데타워, 타칭 사우론의 탑에 나타난 외계인의 이야기로 <접히는 신들>과 외계인의 형상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다. 검은색 반짝이 옷(우주군 정복)을 입은 우주군 조은수와 공군 우매희가 나온다. 그리고 매우 현실적인 대한민국 이야기도 나와, 헉!했다. 우리에게 수능이란 무엇인가?!

묻지 마오 구인공고, 어떤 일인지 묻지를 마오.p221 <임시 조종사>중에서

<차카타파의 열망으로>가 맞춤법이 엉망이라서 읽기 힘들었다면 <임시 조종사>는 판소리처럼 쓴 소설이라 어려웠다. 취업난을 겪은 로봇 조종사 지하임과 전쟁에 관한 미래 이야기인데, 문체는 구한말 느낌이 난다. 읽는 내내 판소리 춘향전과 흥부가의 리듬에 맞춰 노래하듯 읽었다. 눈으로 읽는데도 숨이 차다.

이 하찮은 소설가 나부랭이, 늪에 빠져서 나부랭 나부랭 울고 있는 거 건져줬더니 어디서 에헴질이야? p280 <홈, 어웨이>중에서

나부랭 나부랭, 에헴질이라는 말이 너무 재미있었다. SF소설에서 이런 말 듣기 쉽지 않는데 말이다^^

그외 슬럼프에 빠진 작가 김은경과 친구 한민지(타칭, 한먼지), 라이벌 작가 서소희의 이야기 <홈, 어웨이>와 무엇을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한 <절반의 존재>, 홀로그램과 영화 인셉션이 생각나는 <알람이 울리면>도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에 나온 배명훈 작가의 SF 소설들은 톡톡 튀면서 무겁지 않다. 그리고 책장을 덮으면 여운이 남는다. 특히, 로봇 마사루와 한벽을 뜯으면 남은 벽들은 어떻게 되냐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다혜 님의 추천사 <배명훈은 웃기다, 진지하다, 치밀하다>는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북하우스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감상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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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속으로 - 영국 UCL 정신 건강 연구소 소장 앤서니 데이비드의 임상 사례 연구 노트
앤서니 데이비드 지음, 서지희 옮김 / 타인의사유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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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건강 의학은 신비로울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초자연적인 것은 아니다. 단, 한 공간에서 단둘이 대화를 나누다 보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p15 <들어가며> 중에서

너무 힘들어서 누구의 격려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때, 깊은 슬픔에 빠졌거나 큰 시련을 겪고 절망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우리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한다. 지은이 앤서니 데이비드는 영국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그가 직접 상담하고 지켜본 환자들의 임상사례를 이 책에 기록해놓았다. <심연 속으로 Into the abyss>는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와 같은 임상 노트이나 일반인들이 읽기 쉽게 전문적인 용어를 많이 줄여 쉽게 써놓았다.
이 책에는 자동차 사고로 이인증과 비현실감 장애를 갖게 된 패트릭, 우울증 환자 토마스, 조울증(양극성 기분 장애) 환자 주니어, 섭식장애 환자 케이틀린, 조현병 환자 말릭, 전반적 거부 증후군(우울증적 혼수) 환자 에마, 전환 장애 환자 크리스토퍼, 뇌종양 환자 에이미 등이 나오고 해당 병이 가진 특징을 보여준다. 그리고 왜 이러한 병이 생겼는지 상담을 통해 추적해 본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경전달물질에는 자극을 주는 도파민, 기분을 좌지우지하는 세로토닌, 흥분을 유도하는 아드레날린, 쾌감을 주는 엔트로핀 등이 있다. 이 책에서는 이중 도파민에 대해 구체적으로 써놓았다. 도파민이 너무 많으면 조현병에 걸리고, 너무 적으면 파킨슨 병에 걸린다고 한다. 조현병 환자 제니퍼의 병을 치료하려고 도파민 수용체를 차단했더니 환자가 파킨슨병 증세를 일으켰다. 파킨슨병 증세가 심해져 약을 끊었다. 그랬더니 환자의 조현병과 파킨슨 증상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일반적인 치료 과정이 아니다. 저자는 아직까지 병에 대한 완벽한 치료법이 없기 때문에 의사를 세심하게 환자를 관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즉, 일반적인 치료법이 특정인에게는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심리과에 찾아온 환자들은 각기 다른 원인과 각기 다른 성격, 심리상태를 안고 병원에 찾아온다. 의사는 상담을 통해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와 치료방법을 실타래 풀듯 조심스레 풀어야 한다.

이 책에서는 환각과 망상에 대해서도 서술해 놓았다. 환각은 대상이 없는 지각으로 환자가 통제할 수 없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 환청, 환시, 환각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망상은 일반인들도 할 수 있다. A라는 사람이 의심스러운데, 증거를 통해 A가 범인인 걸 알았다면 망상이 아닌 사실이 되고, 증거도 없고 A도 범인이 아니라고 할 경우 근거 없는 믿음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럴 경우 망상을 진실 또는 근거 없는 믿음이라고 판단하면 된다. 이런 경험은 일상에서 흔히 일어난다. 그러나 망상의 정도가 심해 코타르증후군(부정/허무망상)처럼 발전될 경우 정신심리치료를 받아야 할 수도 있다.

과학은 과거를 바로잡거나, 두 사람에게 가족 외의 대안적 생활을 제공해 주지도 못했다. 어떤 과학적 도전은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럼에도 의학은 모든 영역에 걸쳐 신뢰를 회복하고 가끔은 삶을 완전히 바꿔 놓을 수 있는 지식을 찾아 언제나 심연 너머로 손을 뻗는다.
p255 <우리는 가족> 중에서

임상 노트인 만큼 위에 언급한 사람들의 실제 사례가 소설처럼 소개된다. 이들은 유전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 병을 안고 병원에 찾아온다. 신체검사를 통해 신체는 멀쩡한데, 정신적 충격으로 거동이 불편해지고 기분전환이 원활하지 못한 이들을 보며, 말 못 할 갑갑함을 느낀다. 우울증이 심해 혼수상태에 빠진 에마가 가장 마음 쓰인다. 그녀를 돌봐줄 부모가 곁에 없어서이다. 나 역시 일상생활에서 크고 작은 정신적 충격을 받고 감정이 제멋대로 날뛸 때가 있다. 몇 분, 몇 시간, 며칠의 짧은 시간도 감정이 흘러넘쳐 스스로 감당이 안 되는데, 여기 소개된 이들은 오랜 기간 제어가 안 되는 것이니 얼마나 힘들까 싶다.

이야기책처럼 쉽게 쓰인 책이라, 정신심리학 임상 연구노트임에도 불구하고 단편소설 읽듯 쉽게 읽을 수 있었다.

(타인의사유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감상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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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하루 일본문학 컬렉션 4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외 지음, 안영신 외 옮김 / 작가와비평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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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역사는 500년 정도, 서예의 역사는 800년이면 끝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말의 힘이 다하는 데는 얼마나 걸리는 것일까? p33 <피아노_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중에서


작가와 비평 출판사의 일본 문학 컬렉션 4번째 이야기이다. <눈부신 하루>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키, 에도가와 란포 등 1900년 일본 근대를 대표하는 유명 작가들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100여 년 전 일본 작가들의 에세이를 통해, 그들에게 문학이란, 소소한 일상에서의 행복이란, 추억이란, 인생이란, 세상이란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다.


원고 청탁을 받았지만 글 쓰는 게 힘들다는 다자이 오사무의 글을 보자니 <인간실격>의 요조가 떠오른다. 도요시마 요시오는 <다자이 오사무와 함께 보낸 하루>라는 에세이를 통해, 다자이 오사무의 성격을 보여준다. 도요시마 요시오와 다자이 오사무가 만난 날이 1948년 4월 25일(다자이 오사무 사망 1948년 6월 13일)로, 이후 도요시마 요시오는 다자이 오사무를 만나지 못한다. 다자이 오사무의 여러 면모를 본인과 타인의 글을 통해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가장 좋아하는데, 이 소설이 그의 첫 소설이라고 한다. 하나의 단편이었는데 편집자가 재밌다고 권유해서 잡지에 시리즈로 연재하다 보니 오늘날의 장편 소설이 되었다고 한다.


에도가와 란포는 일본 추리소설계의 거장이다(일본 만화 <명탐정 코난>의 일본 이름이 에도가와 코난인데, 에도가와 란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에도가와 란포는 이 필명을, 에드거 앨런 포에서 따왔다. 에도가와 란포는 죽은 동생과 한 여자의 편지 내용이 궁금해서 추적한다. 죽은 사람, 죽은 사람이 남긴 단서, 암호해독... 에세이가 아니라 범인을 찾는 탐정소설 같다.


원래 알던 작가들의 에세이를 읽으면 그들의 작품이 떠오른다. 같은 주제의 수필인데도 작가의 성향에 따라 유머러스한 글, 으스스 한 글, 따스한 글, 힘이 넘치는 글, 힘이 빠져 축 처지는 글로 나뉜다. 그리고 타국의 대문호를 비교하고 취향에 대해 언급하는 글, 특히 톨스토이와 도예프스키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인상적이다. 이렇게 대놓고 비판할 수 있구나! 또한 이 책에 실린 일본 작가들끼리 어떤 작가의 글이 지루했다느니, 이런 글을 10년 동안 썼다느니 비판하기도 한다. 예민하고 자신의 주장이 확고한 작가들이다.


낯선 작가들의 멋진 필력을 보면 모르던 보석을 발견한 느낌이다. 왜 이 작가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을까(아마, 일본시, 하이쿠 같은 것을 써서 한국 정서랑 안 맞거나... 떠오르는 생각이 몇 개 있다). 물리학자 출신의 수필가 데라다 도라히코의 글은 이과생의 정서가 물씬 풍긴다. 이과생이 문과생의 감성을 더해 수필을 쓰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생각이 든다.


많은 에세이들은 기억에 남지만, 마사오카 시키의 <죽음에 대한 객관적인 느낌>이 가장 와닿는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을 너무 잘 정리해놔서, 일부분만 읽으면 내가 쓴 글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매장에 대한 무서움, 어릴 적부터 늘 무서워했던 이야기를 잘 표현했다. 화장은 뜨거워서 무섭고, 관은 너무 갑갑하고, 방치도 동물한테 공격당할까봐 무섭다니, 다들 이런 생각하지 않나 싶다.


책 목차에 작가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에세이 안에 쓰여있음), 연필로 작가의 이름을 하나씩 쓰며 읽어보았다. 짤막한 에세이이지만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필력이 담긴 에세이이므로,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읽어볼 만하다.


(작가와 비평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감상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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