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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월의 아카시아
박정윤 지음 / 책과강연 / 2019년 12월
평점 :
1. 들어가며
저자의 글을 읽는 내내 서글프고 아름다운 감정을 느꼈다. 저자는 저자가 걸린 병은 유방암. 책 속에서 느낀 바로 추측하자면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항암치료의 고통과 함께 죽음의 공포 속에서 책을 섰다. 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사계가 돌아가는 멋도 있고, 가족에 대한 사랑도 책에 녹아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담하게 써져 있어 애달픔이 느껴진다.
나이가 어린 나한텐 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아직 없다. 하지만 저자가 쓴 글에서는 이러한 공포가 절제된 형태로 쓰여 있어 담담함과 애절함이 동시에 느껴져 슬펐다.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나 간 어머니 아버지,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도 담겨 있다.
밑에 좋았던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글 하나하나가 아름답다. 문장도 문장이지만, 내용 자체가 좋다. 절제된 슬픔인 한국의 전형적인 한의 감정이 느껴짐과 동시에, 그 슬픔 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꿈을 찾는 저자의 모습이 아름답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슬픔과 그 슬픔 속에서 찾는 꿈과 희망이다. 나는 유명한 사람의 전문적인 글보다, 개개인의 서정적인 수필집을 좋아한다. 전문적인 글은 대부분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있는 반면, 서정적인 수필은 인터넷 검색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한 개인의 삶을 읽음과 동시에, 흔히 볼 수 있는 개인의 글을 찾아 읽었으면 좋겠다.
2. 좋았던 구절
어떤 아픔과 어떤 기쁨은 잊히고 지나간다. 또 어떤 아픔과 어떤 기쁨은 오히려 선명하게 각인되어 오래오래 기억 속에 머물기도 한다. 매 순간이 억만년 같이 흐르던 시간도 어느덧 일 년이 지났다. 누군가에게는 '벌써?' 하는 시간이 내게는 너무나 아득하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 p.10 line 12~17
짧지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감사해하는 것 중 하나가 있다면 내 곁에 머무는 사람들이다. 피붙이도 아닌 남으로 만났지만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의지하며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해준 사람들이었다. 그들로 인해서 외롭지 않았던 날들에 진심으로 감사하다. 그들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어스름한 죽음이 드리웠을 때 동시에 한여름 태양같이 솟구치는 강렬한 행복을 희구했다. 생의 아이러니란 이런 것이리라. - p.18 line 18 ~ p.19 line 7
밤이면 난, 잠 못 드는 상념의 무게를 덜어내려고 어두워진 골목길을 걷고 또 걷는다. 이 바람이 어딘가 내갈 길을 알려줄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 날 걷게 한다. 다시 살아갈 이유와 다시 사랑할 이유가 이 바람 속 어딘가 녹아 있진 않을까 한다. - p.37 line 3~7
엄마에 대한 기억은 어느 작은 것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추억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기억이라도 하나쯤 남아 있었다면 조금 덜 슬프고, 조금 덜 아팠을까? 아니면 애초에 없던 기억에 막연한 그리움만 남아서 조금 덜 슬프고, 조금 덜 아팠던 것일까? 어떤 쪽이든 명백한 사실은 애초부터 엄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 p.40 line 3~10
월야상자 :
사람들이 잠 못 이루는 이유를 보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잠 못 이루는 것이다. 잠 못 이루는 달밤에 밤은 더 검고 달은 더 희다. - p.49 line 1~7
아버지와 그를 생각하며 복받쳐 눈물로 쓴 짧은 이 글을 끝내고 나면 아버지에게 갈 것이다. 아버지가 계신 곳은 지난 세월만큼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서 계절마다 아름답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그리워 매일 아카시아 아래에서 기다렸던 나처럼 창문 너머로 당신 딸이 오는 길을 내다보며 기다리셨을 아버지에게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 드려야겠다. - p.54 line 13~19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세상살이에 조금 더 유연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어른이 되는 것이 싫었다. 어릴 적 친구들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도 어른이 되는 것이 싫다고 했다. 세상을 알아가는 일이 순수를 잃어가는 일이 그때도 지금도 두렵다. 그때 우리가 말했던 어른이라는 것이 단순히 나이만을 더한 것이라면 나는 지금 그토록 되기 싫다던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진정으로 어른이 되었는가를 나에게 다시 묻는다. - p.109 line 1~12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던 길 위에서 더없이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한 번쯤은 뒤돌아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다시 오지 않을 날들을 하루에 하나씩 지워간다.
꽃이 피고 지는 순간을 위해 계절은 아름답게 돌아오고, 계절이 아름답게 돌아왔다 떠나갈 때마다 남겨진 슬픔을 하루에 하나씩 지워간다. - p.136 line 2~7
진정한 여행자의 자세는 여행을 떠났다 돌아왔을 때 자신의 발아래 핀 풀 한 포기조차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보다 더 성숙한 사람은 여행을 떠나지 않고도 일상의 삶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나는 계속되는 여행에 대한 동경을 가슴에 깊이 품고, 성숙한 사람은 못 된다 해도 진정한 여행자의 자세를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내 발아래 핀 풀 한 포기와 결핍과 폐허 속에서도 내 가슴에 핀 꽃 한 송이가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며 산다.
진정한 여행자가 되어 내 가슴에 꽃을 피워 낼 수 있었던 시간으로 매일 떠났다 돌아온다. 그것을 진정한 여행자의 진정한 그리움이라 말한다.
그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었던 사람에게로 향하는 진정한 여행자가 되어……. - p.162 line 1~15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던 것은 잃을 수도 없었다. 그 사실이 나를 외롭게 했고 늘 공허하게 했다. 삶이 내게 동정심을 발휘했다면 홀로 맞이하는 그 많던 외롭고 적막한 시간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았을까? - p.224 line 7~10
나를 스치고 지나간 사람들과 지금도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울고 웃었던 지난날들이 그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지난 시간과 지난 사람이 지금의 나를 가능하게 했으므로 어느 시간, 어느 사람 하나 감사하고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돌이켜보니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알게 모르게 소중했던 많은 감정이 쌓여가고 있었다. 지나간 사람도 지나간 사랑도 모두 그때 나의 것이라 소중하고 감사하다. - p.247 line 7~14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된 죽음의 시간으로 향해 나간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힘으로 거부할 수 없는 필연적으로 주어진 운명이다. 누구라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과 같은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죽음 자체를 선택할 수도 없고, 누구도 죽지 않을 수도 없다. 다만 언제 어느 때 어떻게 죽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 p.264 line 6~12
어떤 모습이든 너를 여전히 사랑하겠지만 네가 원하는 것을 하고,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기를 바란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자기 몫의 삶을 후회 없이 멋있게 누려 보고, 아름답게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엄마의 마지막 소원이란다. - p.300 line 1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