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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오늘의 일본문학 12
아사이 료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8월
평점 :
품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얼마전에 황국의 제국이라는 드라마가 종영됐다. 박경수 작가의 작품이기에 TV를 전혀 보지 않는 나도 내용의 복잡함 때문에 한번에 몰아봐야지, 라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밥 시간에 맞춰 틈틈히 챙겨보았다. 추격자 때도 그랬지만, 그의 캐릭터가 내뱉는 대사들은 확실히 매력이 있다. 예컨대 극 중 인물들은 어떤 사실(밝혀질, 밝혀진, 밝혀지면 안될)에 대해 모두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직접적으로 겨냥해서 말하지 않는다. 변죽을 울린다, 라는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을 정도로.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 이것이 <누구>에서 아사이 료가 말하는 SNS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의 세계에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실재의 세계와 가상의 세계. 인터넷의 익명성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새롭게 등장한 SNS는 익명성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수많은 의견을 쏟아낸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와 단절된 가상으로서 누구도 실재에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소설의 무대인 리카의 방에 4명의 취업준비생이 모인다. 선의의 경쟁을 위해 모인 그들의 입에서는 찬사, 배려, 우려, 동정의 언어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지만 절대 진심은 나오지 않는다. 그들의 본심은 노출증의 신체와 관음증의 시선으로 구성된 SNS라는 세계에서 140자라는 틀에 맞춰져 이 곳, 저 곳을 부유한다. 내가 내린 평가가 나에 대한 평가가 되고 나의 사적인 생각이 공적인 자리에서 모두에게 읽혀지는, 그럼에도 그것을 모르는 척 해야되는 이상한 세계가 만들어진다. 침묵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 이 텅 빈 제스처는 그 자체로 소통이 된다. 그 언어들은 수행적 차원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 작용으로서만 사용된다. 무엇을 쓰든, 페이스북, 트위터를 이용하는 것 자체로 하나의 소통의 장으로 소환된다. 다만, 그곳에서는 조금 더 솔직하게 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밖으로 들어나지 않기 때문에 솔직해진다는 규칙은 그렇기에 점점 더 괴기스럽게 느껴진다. 고타로, 리카, 미즈키, 다쿠토, 타카요시의 대화는 가장의 언어들이 실재에서 들어나는 2번의 순간까지 모두 텅 빈 제스처가 된다. 하나의 예로서 작용하던 텅 빈 제스처는 SNS의 등장으로 실재의 세계 자체가 텅 빈 제스처가 되어버린다. 

  2번의 폭로는 그렇기에 충격적이다. 들어나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안전할 것 같았던 의견들이 실재의 세계로 나오자마자 반박할 수많은 말에 의해 자기 기만이 되어버린다. 수없이 쌓였던 나의 생각들에 의해 공격당해지는 것. 이것을 반박할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는, 그래서 더 아픈 촉이 되어 나를 무너지게 만드는 것. 마지막 20페이지를 읽으면서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을 독자가 몇명이나 될까. 그것을 고발하는 대상이 리카이지만, 그것은 굳이 리카가 아니어도 된다. 굳이 얘기하자면 '누구'라도 비난 할 수 있고 '누구'라도 비난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나의 자화상이 되고 나의 아픔이 되는 것이다. 역자가 말했듯, 이것은 호러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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