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틀비 / 베니토 세레노 / 수병, 빌리 버드 - 허먼 멜빌 법률 3부작 세계문학 마음바다 6
허먼 멜빌 지음, 안경환 옮김 / 홍익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법학자인 역자가, '법률 삼부작'이라 칭하고 있기도 한, --- <바틀비>, <베니토 세레노> 그리고 <수병, 빌리버드>로 이루어진 세 편의 중·단편 소설들이 한 권으로 묶여있는 책입니다. 이 소설들에 주어져 있는/이 소설들이 지니고 있는 의의가 어찌되었건, 일단! 


1. 뭔가 읽는 맛이라는 걸, 거의 완벽하게 상실하고 있는 소설들입니다. 이게 원작의 탓으로부터 기인되는 것인지, 혹은 (전문 번역가가 아닌 이에 의한) 번역의 탓인건지 판단할 수 없으나, 암튼! (제 기준에서 보아) 읽는 재미 따위는 정녕 지지리도 없다라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2. 유난히도 어수선한 연말과 연초라는 시기적 특성 때문이었을까요? 꾸준히 몇 페이지라도 계속해서 읽어나갈 수 있는 시간을 전혀 가져볼 수 없는 독서였었었고, 그러한 단속(斷續)이, 이 작품들에 대한 저의 몰이해를 초래했을 수도 있음을 빼놓지 않고 고백하겠습니다. 여튼! 


3. 예의, 사놓은 지 오래된 이 책을 펼쳐 들었던 건 온전히 --- <베니토 세레노>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었습니다. 그간 이어져 온, 흑인 노예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해서 말이죠. 이러한,  


세 가지의 이유로, 저의 감상문은 오로지 <베니토 세레노>에만 한정되어 있습니다. 세 편의 소설을 읽고서도, 단 한 편에 대한 감상문만 쓴다는 게 뭐랄까, 이 책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그래도 읽은 작품에 대한 감상문은 반드시 남겨놓아야지란 의무감스런 의지와의 타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 책을 읽고 있었던 내내, 어딘가에 묶여/매여 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었기에, 그렇게 해보게도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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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무엇'을 진실이라 믿게 하느냐/믿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1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에, 특히 '사상'과 관련하여 이러했던 시절이 있었었으며, 혹자는 지금도 여전히 (과거와는 정반대 방향으로부터의 '사상'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러한 시절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라 주장할 수도 있을 겁니다. 또한 누군가는, 


"종교는 믿음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지 실체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덤불 속」중 <작품 해설>의 p267, 문예출판사, 2008.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남경의 그리스도>2에 대한, 역자 김영식의 위와 같은 견해처럼, '종교'란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란 의견을 내놓을 수도 있을 겁니다.3 그리고 또한 --- 전에 읽었던 네 편의 소설들4로부터, 흑인을 바라보는 백인의 시선, 흑인 스스로도 (적어도 한 때엔)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인식이란 것이, 기실은 그것이 사실(fact)이었기 때문에 성립된 것이 아닌, 그러하길 바랐고, 그리하여 그러하다라 믿고싶어 끝내는 (self-fulfilling prophecy의 실현으로서) 믿어지게 된, 또한 그러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종국에는, 바람()을 기어이 현실로 만들어 낸, 심히도 기형적인 역사에 대하여도, 정확히 똑같은 말을 할 수 밖엔 없음을 배웠었지요. 


"모든 백인은 흑인이 백인보다 '열등한' 인종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문화생활의 혜택을 누릴 어떠한 기회도 가져 보지 못한 흑인노예들은 모든 면에서 '확실히' 백인보다 열등했다. 따라서 흑인 자신들도 스스로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게끔 세뇌되었다." 


- 유시민,「거꾸로 읽는 세계사」중 p310, 푸른나무,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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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도 적고 있듯,「세상을 바꾼 판결」5에서 배웠었던, "1841년의 '아미스타드 사건'"(p22)을 떠올리게만 되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리마로 향해 가던) '산 도미니크 호'의 흑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백인 선장(베니토 세레노)은 포로나 다름 없는 신세가 되었으나, 다른 배의 선장(아마사 델라노) 앞에서는, 그것이 정상(正常)이라 짐작되는 '원래의 상황', 즉 '백인이 흑인을 지배하는 상황'을 연기하다가, 블라블라 …. 뭐 스토리 자체는 이것 말고는 딱히 별 언급될만한 것 없다고 말해도 될 것 같지요. 단지 그 스토리로부터...


정말 이상한 배야. 사연도 이상하고 배 위 사람들의 행태도 죄다 이상하기 짝이 없어. 그러나 그 뿐이지. 더 무슨 일이 있을라고?(p164)

'산 도미니크호'의 (연기되고 있는) 분위기를 가리켜 '이상한' 이라 표현하고 있는 선장 아마사 델라노의 화법이란 게 결국 알고보면, 그 상황이 '연기(演技)'되고 있었던 것이기에 생겨난 것이었지, 결코! --- 별도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도 않게 그야말로 '당연한' 것인, 백인이 흑인을 다스리고 있다라는 상황 자체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니라는, 이 점이 흥미로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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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안경환 교수는 이 작품의 결말에 대해 "델라노 선장, 베니토 세레노, 흑인 바보 세 사람 중 누구의 관점에 서느냐에 따라 선상 노예 반란의 의미와 성격이 달라질 것"(p19)이란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만,


"짐승의 발톱과 뿔은 누군가를 사냥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 구병모,「파과」중 p51, 자음과모음, 2013.

(저는 동의할 수 밖에 없는) 구병모의 시선을 (당신 또한) 좇는다면, 이 작품에 대한 우리의 의문은, '누구의 관점에 서느냐'가 아닌 '그같은 관점이 대체 어떻게 존재할/생겨날 수 있었었을까'가 될 것이라/되어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겐 --- 태어나 보니 노예라는 존재가 내 곁에서 나에게 복종하고 있는 상황이 주어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 태어나 보니 나에겐 할 수 있는 것보다, 해야 하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만큼 훨씬 더 많이 주어져 있는 그런 삶이 주어져 있다라는 상황 자체를, 당연히 당신이 이해할 수 없고, 타인에게 이해시킬 수 없다라면, 그렇다면...


제 생각에, 이 작품 속에서 정녕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가에 대한 답은, '누구의 관점에 서느냐'와 상관 없이 딱 하나로 정해지게 된다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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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 과장이 없다 하더라도, 정물 하나도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보는 이의 시력과 관념 때문에 달리 보인다. 그러니 정물이 아닌, 스토리가 사람들과 얽힌 사건에 대한 통일된 증언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사건은 '덤불'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위의 책 pp 286~269.

물론, 역사라는 것이 우연으로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닐테고, 집단의 어리석음에 의해 진행되어 온 것 또한 아닐 것이기에, 특정 제도의 기원에는 반드시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물론, 이 때의 '합당'이라는 것이 현재의 기준으로 판단될 수 있지는 않겠죠만.) 그리고 또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말한 '덤불 속'과 같은 상황이, 우리의 매일매일에서, 우리의 일주일간에서, 우리의 한달간에서 그렇게 항상/어디서나 일어나고 있음 역시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짐승의 발톱과 뿔은 누군가를 사냥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 구병모,「파과」중 p51, 자음과모음, 2013.

노예제도에 대한 우리의 답은, 그 어떠한 방향, 그 어떠한 렌즈로 바라보는 시선에 구속됨 없이, 딱 하나일 수 밖에 없다라 우리 모두가 동의하기에,  

 

"도박판이나 닭싸움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검둥이 아기를 상품으로 내건다는 그런 소문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 그는 또한 검둥이 아이들이 대출을 받는 담보물 노릇을 하고, 채권자들은 아직 어머니 배 속에 든 태아에 대해서 벌써 청구권을 신청하는가 하면, 채무자들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기들을 미리 팔기도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 알렉스 헤일리,「뿌리(상)」중 p388, 열린책들, 2009. 

이 작품 <베니토 세레노> 속 흑인들의 '발톱과 뿔'이, 그렇게 사용된 것에 대해, (여하한 이유로도) 허용되는 비난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016년~2017년 대한민국 민중들이 한데 모여 각자의 '발톱과 뿔'을 사용했던 것이, '부패한 권력'을 공격하고자 했던 의도의 행동이 아닌, 우리와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한 보호기제의 작동이었었음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듯 말이죠.  

 

...금연 273일째



  1. 2014년, 영화 <제보자>를 본 후의 느낌을, 저는 이렇게 적어 놓았었더군요.
  2.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덤불 속」중 pp 168~185, 문예출판사, 2008.
  3. 제가 참으로 많이 인용했었던, 이문열의 작품 속 다음 글 역시 그러합니다. - "세상은 무자비하고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의 폭력에 맡겨져 있다고 믿는 것보다는 제사로 그 노여움을 달랠 수 있고 찬미와 기도로 축복을 빌 수도 있는 신의 질서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믿는 쪽이 저들에게 얼마나 더 큰 위로와 희망을 줄 것인가. 우리가 한 일은 다만 그 같은 저들의 믿음을 가로막거나 깨뜨리지 않은 것 뿐이었다." (이문열 作, 「사람의 아들」중 어느 제사장의 말, 민음사, 2004.​)
  4. 「빌러비드」,「배반」,「뿌리」,「톰 아저씨의 오두막」
  5. 마이클 리프 · 미첼 콜드웰 共著, 궁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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