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42
알렉스 헤일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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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6주 밖에 안 된 그 사내아이는 나 알렉스 헤일리였다. (p790) 

장장 800여 페이지의 이야기를 읽어온 시점에서 맞이했던, 이 길지도 않은 문장을 읽는 순간, '아! 이거 뭐지?" 정말 무언가 둔탁한 것으로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러나 --- 스스로를 "쿤타 킨테1로부터 일곱 번째 세대"(p822)라 부르고 있는, 작가2 알렉스 헤일리가 써놓은, 이후 30여 페이지에 걸친, 이 한 편의 역사 이야기를3 쓰게 된 계기와 과정을 통해, 


앞서의 800여 페이지에 대한 요약 뿐 아니라, 이 두 권으로 되어 있는 작품의 딱 중간쯤 읽었을 때 써놓았던, '이 소설은, 단순히 흑인의 조상 찾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미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만도 아니며, 이건 여전히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도 보여지는, 어쩌면 인간의 근원적 성질에 관한 이야기일지도...'란 저의 미심쩍었던 예감에 대한 확신 또한 얻을 수 있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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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의 조상들에 관한 책이라면, 자동적으로 모든 아프리카 후손들의 상징적인 일대기가 될 터였으니 - 그들은 모두가 예외 없이, 아프리카의 어느 흑인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어떤 사람, 납치를 당해서 쇠사슬에 묶인 채 어느 노예선에 실려 같은 바다를 건너 항해했으며, 몇몇 농장을 전전하고, 그때부터 자유를 위한 투쟁을 계속했을 쿤타와 같은 어떤 사람들의 씨앗들이기 때문이었다. (pp 813~814)

폴 비티의 소설 제목, 우리말로 '배반'이라 번역되어진 sellout이란 단어의 뜻은 'someone who forgets their roots'이라 사전은4 말해줍니다. 그 단어와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듯한, 제목 「Roots」를 통해 짐작되어지듯 이 작품 속, '쿤타 킨테' 후손들은, 대를 이어가면서도, 자신의 근원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왔지요.5 그리고/그러나 --- '잊지 않으려는' 그와 같은 노력에도 예의,  


열 일곱살 때, 노예 상인들에게 붙잡혀 미국으로 건너온 지 십칠 년이 지난 어느 날, 즉 그의 삶이 고향 주푸레에서 살았던 기간과 "흰둥이의 땅"(p326)에서 보낸 기간으로 정확히 양분되는 시점에서 그는 자신이 "아직도 아프리카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듯 '검둥개'가 되었나?"(p326)란 의문을 가졌었던 초기 혼란의 시기는 존재했었더랬습니다. 이후, 


그가 세상물정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 다른 검둥이들과 가까이 지내는 요령도 터득하게 되었음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이제 그는 그들이 그가 결코 될 수 없듯이, 자기도 정말로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p353)

비록 킨타 쿤테가 상당 기간 동안, "자유의 몸이 되어 아프리카로 가느니 차라리 노예로서 버지니아에 살고 싶어 한다"(p355)와 같은, 말하자면 '이민 2세대' 노예들의 정서에까지는 동화되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6 


"관습은 매사에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특히 복종의 의무를 알게 하는 데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한다. … 관습은 우리가 굴종을 거부감 없이 삼키게 함으로써 더 이상 굴종의 독으로부터 쓴맛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p70) …… "우리는 여기서 자발적 복종의 일차적 근거가 습관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말이 길드는 과정과 같다. 말에 재갈을 채우면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 재갈을 갖고 장난질한다. 말에 안장을 얹으면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장비와 장신구를 뽐낸다." (p81)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중, 생각정원, 2015.  


그 역시, 


인정하기는 부끄러운 노릇이었지만, 그는 … 이 농장에서의 삶을 훨씬 더 좋아하게 되었다. 가슴속 깊이 그는 고향을 다시는 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으며, 그의 내부에서 소중하고 돌이킬 수 없는 무엇이 죽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p3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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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다"8란 구절로 특징지어질 수 있겠는,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가, "과거의 모든 것은 고통 혹은 상실이었다"9라는 메시지에 집중하고 있었다라면, 이 작품 「뿌리」는 


스스로 좋은 세상 만들지 않으면, 세상 절대 좋아지는 법 없어요! (p775) 

로 대변될 수 있겠는, 그러한 '고통 혹은 상실'을 극복해내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에 천착하고 있다라,10 그리고 그러한 극복이 (최소한 일부일 수일지도 모를 흑인들에겐 어쨌든) 실현된 것으로 그려내고 있다라 저는 생각합니다.11 다시 말해, --- "무엇이든 선택해서 사랑할 수 있는 - 욕망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는 - 곳에 도달하는 것"12, 혹 "아무도 더 이상 너 소유하지 않는다 그런 뜻"(p735)으로, 흑인 작가들에 의해 정의된 '자유'라는 개념, 이 '자유'의 쟁취란 것에 대해선 적어도,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다,란 메시지를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읽혀질 소지가, 다분히 있다란 것이죠. 왜 그러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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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역사를 책이라고 생각한다. 페이지를 넘겨 버리면 과거를 잊을 수 있다고. 하지만 역사는 그것이 적힌 종이가 아니다. 역사는 기억이며, 기억은 시간과 감정이자 노래다. 역사는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 폴 비티, 「배반」중 p159, 문학동네, 2017.


물론! 자신들의 처지를 '뼈다귀'로13 표현해야 했던 흑인의 지위가, 이 책에서 보여지듯 그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상상도 못했던 변화를 맞이한 것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으며, 그 드라마틱했던 변화의 실제 과정을 보여주었다라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엔 더할 나위 없는 찬사를 받을 자격이 주어져야 마땅하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 변화의 성공에 대해 가해지고 있는,  


"백인처럼 옷을 입고, 백인처럼 말하며, 백인처럼 생각하고 백인 중산층 문화의 가치를 표현"14해가며 이루어낸 약간의 성공이며, 하지만 그 약간의 성공이란 것마저 기실 "자신이 흑인에게 '양보할' 뭔가가 있는 듯한, 또는 흑인이 그들의 흑인 특성을 '극복하도록' 도와줘야할 것 같은"15 백인들의 지니고 있는 일종의 의무감스런 동정으로부터 결과된 것이란 비판을 이겨낼 만한 맷집이, 과연 이 작품 「뿌리」에 있느냐란 질문에, 전 긍정의 답변을 내놓을 수 없다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하여, 


"정말 듣기 거북하니까, 그 케케묵은 노예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해요!"(p792)라 항변하는 세대도 있겠으나, 아직은 "어떤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리지만, 또 어떤 일들은 절대 잊지 못하잖니. … 자리가 여전히 거기 남아 있어. … 단지 내 재기억 속에서만이 아니라, 세상 어딘가에 말이야"16라 생각하는 세대가 더 많지 않을까, 즉 '극복해내었다'란 성취감보다는, '과거에의 상처'가 아직은 더 크다라는 생각이 있기도, 그리고, 어쩌면 그 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겠는...   


"자유를 찾는 일과 자유를 찾은 자신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은 별개"


-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중 p161, 문학동네, 2014.

미국에서 흑인으로 존재한다/살아간다라는 것이, 위와 같은 관념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느냐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지워낼 수 없다란 것이, 자유에 대한 '쟁취의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에, 맘 편히 열광하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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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 이 작품에 5/5의 만족도를 표시하는 것엔, 하등의 주저함도 없었다라는... 




※ 함께 읽어보길, 주저함 없이 추천해보는 책들

- 토니 모리슨 : 「빌러비드

- 폴 비티 : 「배반

- 존 하워드 그리핀 : 「블랙 라이크 미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 자발적 복종 



...금연 242일째



  1. "'아프리카 인'이라 부르는 한 남자"(p793)
  2. "알렉스 헤일리는 '미국 전기 작가 biographer'나 '저자authro'로만 지칭되며, … '소설가 novelist'로 분류하지를 않는다." (p823)
  3. "마침내 나는 우리 가족 7대의 얘기를 여러분이 지금 읽는 이 책으로 엮어 냈다." (pp818~819)
  4. Urban dictionary.
  5. “나 이 얘기 하는 까닭은, 너 배 속 아기하고 또 낳을 다른 아기들 모두 증조부 어떤 사람이다 알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p597)
  6. 정서적 차이는 비단 세대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세대 안에서도, 개인적 경험의 차이 또한, 매우 커다란 간극을 만들어 내었었죠. --- “한 번 팔렸던 경험 하면 영원히 그런 일 잊지 못해요! 그리고 다시는 옛날 같지 않아져요! 당신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죠. 그래서 당신 어떤 쥔님도, 여기 당신 쥔님 포함해서, 아무도 믿을 수 없다 하는 사실 이해 못해요!” (p606)​
  7. "멍에를 지고 태어나 노예 상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전 세대가 어떤 삶을 누렸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태어난 대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재산,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도 하지 않고 출생 당시부터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기게 된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앞의 책 p69.
  8. 토니 모리슨,「빌러비드」중 p448, 문학동네, 2014.
  9. 토니 모리슨, 앞의 책 p102.
  10. 치킨 조지가 닭싸움꾼으로 성공하는 과정이 유난히 길게 묘사되어 있는 것도 아마, 그러한 이유에 기인된다라 생각하지만, 이 작품을 좀 삐딱하게 보자면 결국엔 또 한 편의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기라 폄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11. 반면, 작가 폴 비티의 견해는 이와는 사뭇 반대되는 듯 보입니다. --- "나의 상대적 행복이 여러 세대가 고통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노예선을 타고 온 어느 조상님이 강간을 당하고 구타당하는 사이, 자기 똥물에 다리를 무릎까지 담그고 잠시 쉬는 사이, 언젠가 손자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가 와이파이를 쓸 수 있을테니 숱한 세대를 걸쳐 살인과 견딜 수 없는 정신적 괴로움과 극심한 질병을 겪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다. 더군다가 그 와이파이가 속도도 늦고, 신호도 불안정하다면."- 폴 비티, 「배반」중 pp297~298, 열린책들, 2017.
  12. 토니 모리슨, 앞의 책 p269.
  13. 만약 북군과 남군간에 전쟁이 터지면 어느 편을 들겠느냐는 남부 백인 주인의 질문에 한 흑인 노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 "뼈다귀 하나 놓고 싸우는 개 두 마리 보셨죠, 쥔님? 글쎄요, 우리 검둥이들 바로 그 뼈다귀입니다." (p744)
  14. 존 하워드 그리핀, 「블랙 라이크 미」중, 살림, 2009.
  15. 존 하워드 그리핀, 위의 책 중.
  16. 토니 모리슨, 위의 책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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