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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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조국도, 주인도 없다"(p57)란 구호는 여전히 제겐 과격한 이미지이기만 하며, '아나키즘'이란 것이 대체 자신의 모습을 선보이기 위해 제대로 링에 올라본 적이나 있었던가 싶은 대한민국이기에 "이미 패배당했고 또 여전히 탄압받는 사상"(p155)이란 (자조 섞인) 표현조차 어울리지 않거늘, 특별한 이유도 없이 꽤나 오래간 지속되고 있는 '아나키즘'이란 사상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찾아 읽어본 이 책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 제게 남겨준 걸 한 개의 단어로 표현해 보자면 의외로 --- '허무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진짜 게임을 하는 건 몇 테이블 안돼. 하는 척만 하는 거야. 혼자 멍하게 앉아있지 않으려고..."(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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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는 이데올로기가 만발한 시대였다. 민주주의, 파시즘, 공산주의라는 세 가지 주의(主義)의 투쟁이 이 시대 정치사의 기본을 이루고 있었다. 1930년대는 실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신봉하는 이데올로기에 몸을 바쳤다. 이 시대는 사상에 대한 정열이 역사를 움직인 시대였고, 이런 시대적인 특징이 집약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스페인 내전'이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중.

이 책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 '스페인 내전1' 에 대한 약간의 사전 공부를 했습니다. '엘 클라시코'로 불리우는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FC의 시합에서 보여지는 그 열기는 그저 호날두와 메시의 대결로부터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라는 것, 더 나아가 이러한 '스페인 내전'을 통해 우리의 4·19 혁명이나 5월 광주를 거론하는 글도 보여지더군요. 그러나,

이 책으로부터 '스페인 내전'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제거해 내어도, 심지어 '아나키즘'이란 사상까지도 제거해낸다 하더라도 이 작품은 "가슴에 두더지가 있다(p189) …… 두더지는 좌절된 내 꿈과 슬픔을 먹고 있었다(p190)"란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어쩌면 훨씬 더 큰/일반적인 범위로 확장되어, 심지어! --- '스페인 내전'과 '아나키즘'을 모두 지워버리고 이 책을 읽어내는 것이 우리의 삶을 이해함에 오히려 더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까지를 해보게도 됩니다. 2017년의 대한민국을 살아 내고 있는 우리에겐, 다른 모습의 '스페인 내전'이 벌어지고 있으며, 다른 종류의 '이즘(主義)'들이 서로의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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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실현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측정하는 데 쓰여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실과 이상의 거리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고..."

- 자오팅양 · 레지 드브레 共著, 「상실의 시대」 p24, 메디치 刊, 2016.

주인공 안토니오는 농사가 주업인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만, 그는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p20)과 같은 동의를 구하지 않는 일방적 강요2엔 끝내 적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의 눈에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불합리한 원리들이 하나둘 씩 보이기 시작했지요.

"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점차 알게 됐다. 그들에게는 그걸 마음대로 들었다 놨다할 수 있는 힘이 있으므로. …… (반면) 우리의 가난함은 나눠봤자 더 가난해질 뿐이었고."(pp23-24)

삶의 터전이었던 고향을 떠나온 그에게, '꿈꾸어 왔던 이상이 현실이 되는 짜릿한 순간'이 실현되는 작은 사건3이 생겨납니다. 바로 이 순간이--- 그의 이후 삶을, 그렇게 흘러갈 수 밖게 없도록 만들었다라 전 생각합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있음'을 자각하는 도구로 쓰여야 할 '이상'을, '반드시 실현시켜내야 할' 현실로 변환시키는 순간, 모든 주의(主義)는 혁명을 요구하게 되지요. 주인공 안토니오의 향후 삶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가 '스페인 내전'의 역사적 배경 속에 살았었기 때문도 아닌, 그의 정신 속에 '아나키즘'이 자라하게 되었기 때문 또한 아닌, 오로지 (상상이 현실이 되었던 그 순간처럼)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 내고싶다'란 그 욕망을 가졌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물론!

"애초부터 이길 가능성이 없는 탄원을 한 까닭은 오로지 그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p179)​

'이상의 현실화'란 욕망인 굳이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 하여도, 그러한 '정신을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안토니오의 삶은 스스로 느끼기에 행복했었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싸워야만 하는 시대 … 더 이상 화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p46) 시대를 살아야 했던 안토니오에겐, 이상이란 반드시 실현되어야만 하는 무엇이었던 것이죠.

"나는 분열된 스페인에서는 평화와 화합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이제는 나도 싸우겠다는 증오를 품게 됐다."(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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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고사를 앞둔 마지막 수업 시간, 종로학원의 담임 선생님이였던 조한은 선생님께서, 1년 중 처음으로 저희에게 따뜻한 어조로 종례를 시작하셨습니다. 좋은 결과 있을 꺼라고, 여러분의 지난 1년이 더 충실한 대학생활의 밑거름이 되어주리라 확신하신다라고, 그리고!

'비겁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이제 가정이 있고 삶에서 책임져야할 것들이 너무도 많아진 지금의 우리 세대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바꿀 용기를 낼 수 없노라고, 그러하니 자네들이라도 이 대한민국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중단하지 말아달라고, 그러다 언젠가 자네들이 나의 세대가 될 때즈음, 잊지 말고 다음 세대들에게도 또한 이러한 부탁을 전해달라' ……​ 는 말로 종례사의 마지막을 끝맺음 해주셨었었지요.

그 분에게 지어져 있던 책임들의 가장 큰 부분은, 어느덧 지금의 저에게도 지어져 있기도 한,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국가 우선'은 '가족 우선'이 되었다"(p144)였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결혼'이란 것이 모든 이에게 "그동안 지켜왔던 자존심과 사상을 매장시키는 일"(p141)이 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아주 많은 우리들에게 적어도 "이 애만은 내가 걸어온 길을 피하게 하고 싶"(p144)다란 소망을 가지도록 한다면, 그리하여!

​"살아남으려면 체제에 맹목적으로 순응해야만 했다. 단순히 지난날의 이상을 버리면 되는 게 아니라 열렬한 신봉자가 되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변절은 고백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깊은 곳에 숨겨 둔 개개인의 비극을 배신하는 짓이다. 아니, 배신이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자살을 의미한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선 과거를 묻어야 했고, 육체의 생존을 위해선 마음을 죽여야 했다."(p135)

마음을 죽여야하는 삶까지를 감수하면서까지 육체의 생존을 도모해야하느냐,란 질문은 2017년 제게 얹어져 있(다라 스스로 생각하)는 책임감들 앞에선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뭐 대단한, 시대를 어찌해보겠노란 이상을 가진 적도 없었었으며, 평균을 넘어서는 호사라면 호사일 수 있을 이제까지의 삶을 살아온 제게, 혹자는 '마음을 죽여야하는 삶'이란 게 어울리기는 하냐라 물을지도 모르겠네요.

"최선의 선택은 패배를 받아들이고 승자에게 무릎을 꿇는 것 최선의 선택은 이제 투쟁을 포기하는 것 … 최선의 선택은 내가 따랐던 용감하고 위대한 사람을 가슴 속 깊은 곳에 묻는 것 … 최선의 선택은 그 시절을 지우는 것."(pp123-124)

​시대 정신, 정의 … 와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닌, '저 개인의 꿈' --- 저는 그것을 이루어내지 못했거늘, 이루어낸 누군가는 항상 제 주위의 존재하고 있으며, 그런 지금의 제가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제 '투쟁을 포기하고, 그 시절을 지우는 것' 뿐이라는 게 이 작품이 저를 울컥하게 만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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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포기하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그래도 먹고살기는 해야 했다."(p39)

내가 누워있게 될 묘지의 비명으로 쓰고싶다란 생각마저를 해보게 된 문장입니다. ---"살아오는 동안 계속된 실패와 패배, 그리고 모욕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쌓였기 때문"(p206)이라 이제까지,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의 남은 제 삶을 표현하지는 않아도 될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복수이건 증오이건 포기이건 그 무엇이건! '채워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제/우리의 삶을 끝내,

"속세를 살아야 한다는 90년형"(p199)

로 만들어 버릴 꺼란 걸, 차마 부인하지는 못하겠는 겁니다.

뭐 그렇다 하여도, 이 이야기의 마지막 결말이 누구에게든 권장될만한 건 아닙니다. 'Graphic novel'이란 장르의, 뭐 우리말로 옮기면 (좀 이상한 게 되어버리는 --;;) '성인만화'쯤 될, 이 작품의 내용 전체가 어쩌면 '육체의 생존'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게임을 하는 건 몇 테이블 안돼. 하는 척만 하는 거야. 혼자 멍하게 앉아있지 않으려고..."(p178)

게임을 하는 척만 하며 앉아있는 삶을 원하지는 않을, 이루어질 가능성이 0에 거의 완벽하게 수렴되어 있다 할지라도 최소한 내게 여전히 그런 꿈이 있었노라란 사실까지를 망각하고 싶지는 않을, 망각하지 않음이 심지어 당신에게 괴로움이 될지라도 그것마저 뿌듯해할 수 있을 당신에게, 이 책을 진지하게 권해봅니다. 비록 그 결말을, '승리가 아닌' 패배라 말할 수 밖에 없다 하더라도 말이죠...

※ 하승우 著, 아나키즘」, 책세상刊, 2008.

※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마저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


 

  1. 'The Battle for Spain' 또는 'Spanish Civil War'라는 영어 표현은 '내전' 혹은 '내란'등의 한자어로는 표현되지 못하는 의미를 담고있다라 생각합니다.​
  2. "아나키스트는 모든 권위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을 거부한다. 아나키스트는 스스로 동의한 권위라면 전체의 결정이라도 자신이 결정한 것처럼 따르려 한다." - 하승우 著, 「아나키즘」 p12, 책세상 刊, 2008.
  3. "그때까지 실제로 운전을 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상상해 왔기에, 실제로 기회가 오면 쉽게 해낼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그 날이 온 것이다. 나는 운전석에 몸을 맡기고, 내 몸이 그토록 꿈꿔왔던 것을 하도록 놔주었다."(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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