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사랑학
목수정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난 맘에 드는 향수 냄새가 목 근처에서 풍기는 사람을 만나면 걷잡을 수 없이 매혹되곤 했다.(p67)

소개팅 상대(가 될 수 있는 여학생)의 첫 번째 조건으로, '내가 좋아하는 특정 향수를 뿌린 여자'를 내걸었을만큼, 지금도 여전히 엘리베이터에 남아 있는 향수의 진한 잔향으로부터 '그 주인공은 몇 층에 사는, 어떤 외모의 몇 살쯤 되는 여성일까?'하는 궁금증을 너무도 자동적으로 가지게 되는 저이기에 --- (저자로서, 공동 저자의 한 명으로서, 그리고 역자로서) 그녀, 목수정이 쓴 네 권의 책을 읽고 가지게 된 그녀에 대한 호감은, 이처럼 같은 취향/약점을 지니고 있다라는 점으로 인해 폭발적으로 증대됩니다. 마주 앉아 술 한 잔씩 주고 받아가며 나누는 어떤 주제의 이야기도, 그 어떤 강도(强度)의 반론도 모두 즐거울 것 같은 그녀가 이 책 「야성의 사랑학」을 통해 이야기 하는 '사랑'은 또 어떤 내용들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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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인류가 멸망하게 된다면, 사과나무를 심을 누군가도 있을 그 오늘, 당신을 무엇을 하시겠습니까?란 질문에 정녕 100% 솔직하게 답을 한다면, (내일 인류가 멸망하지 않을 방안을 찾아보겠다,같은 헛소리는 빼고!) 당신은 정말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지극히 단순하게 보자면 --- 당신의 대답 중 (그간 여러 가지 이유, 예를 들어 타인의 눈치, 사회적 규범·도덕 등에 의해 하지 못했던) 차마 해볼 수 없었던 것을 해보고 싶다가 포함될 가능성이 매우 크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남자의 경우) 여탕에 들어가 보기와 같은 향수 어린 행동에서부터 (내일 인류가 멸망한다는데 여탕에 손님이 있을 리가!) 사랑하는 가족과 조용히 종말을 기다리겠다 등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다양한 모습을 띨 겁니다. 그리고 게중엔 당연히!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친구인 납득이는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첫사랑이며,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마지막 사랑이라고 승민을 위로한다. 그 말이 일종의 통념으로 성립한다면, 사람들은 사랑의 진정성을 사랑이 더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셈이다.

김동조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 중.

현재 썸타고 있는 이성에게 '나 너 좋아한다/사랑해요'란 말 한 마디를 건네는 것도 분명 들어있을 것이며, 그 때를 놓쳤던 누군가에겐 '이루어지지 않았던 첫사랑'으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를, 삶의 마지막 이 순간에 하겠어,란 선택을 하게할 수도 있을겁니다. 그 때를 지내놓고 되돌아보니, 여전히 그대가 나의 첫사랑이었다라고, 하지만 그때엔 사랑이 더 있을 줄 알었었노라 말이죠. 이처럼!

내일 내가 죽어야만 한다라는 상황하에서 할 수 있는/하게 될 행동들을, 한 30년 쯤 후에나 죽게 될거야란 상황하에선 대체 왜 하지 못/할 수 없는 것일까요? 만약 내게 남은 시간이 29년 364일이라면? 하루쯤 줄어들었다한들 하지 못하는 행동들은 여전히 할 수 없는 행동으로 남을 겁니다. 남은 시간이 29년 363일이라면? 29년 362일이라면? 그렇게 하루쯤 줄어들어도 딱히 그 결과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 이 순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시간으로부터 현재를 보상받기 원하는 한1, 나의 (20대이건 30대이건 혹은 저와 같은 40대이건) 지금 이 순간을 미래의 어느 상황을 위한 볼모로 삼아 희생 시키기만 하는 한2, 풍성한 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느덧 대머리가 되어버리는 비극3을 우린 피할 수 없게 되지요. 우리가 대체 왜,

마음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마련해 준 채, 차마 지워내지도 못하고 있는, 물론 행동으로 옮기려는 시도는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채, "어느 순간부터 울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슬픈 일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감격하지 않아서였다. 감격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격할 수 없게 되어서였다"(p303)란 고백만을 우리는 하고 있는가/하게 되었나에 대해 이 책의 저자 목수정은 --- "유교사회, 군대, 권위주의적 사회는 감정의 분출을 극도로 억제한다. 투명하게 드러나는 감정은 천박한 것으로 여"(p305)기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규정한 천박함은 자연스러움이다. 우린 웃고 울고 싶다. 그러나 마음껏 어디서나 그럴 수 없다."(p305)

​이러한 감정 억제의 강요가 비단 대한민국의 역사에서만 존재하는 건 물론 아닙니다. 중세 유럽의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권위를 품어 내는 제도들4' 역시) 역시, "생식의 목적이 아닌 성행위를 부부간5에도 금지"(p27)함으로써,


욕망이 억압된 집단은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그 불안을 다스려 줄 강력한 지도자를 기다린다.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여 가장 오랫동안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해 온 집단이 교회인 것이다.(p27)

​대체 나/우리에게 내려져 있는 이 금지의 조항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지 서로 감히 묻지도 못한 채"(p40), 그 금지와 억압 아래에서 인류는 살아왔고, 그러했기에 지금의 사회로 진화되었다라는 거지요. --- 1992년, Coventry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만 사시는 집에서 하숙하고 있었던 때의 어느 날. 어찌하다보니 그 두 분과 저 셋이 마주앉아 담배를 물게 된 상황이 벌어졌었죠. 차마 담배불을 붙이지 못하는 저에게, 걍 밖에 나가 피우고 오겠다던 저에게, 왜 그러냐며 손수 불을 붙여주셨던 할아버지께, 사실 한국에선 어른 앞에서 술은 마실 수 있어도 담배는 절대 피우면 안 된다,라 대답하는 저에게, '왜 술은 되고 담배는 안되?'냐는 할머니의 당연히 나와야할 질문에 (또한 당연히! --;) 대답할 수 없었던 게 생각납니다. 그 금지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배우지 못한 채, 그냥 피우면 안된다라는 것만 배웠었기 때문이었죠. (사실은 지금도 왜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 그렇다면!


매우 극단적 예이기는 합니다만, '자신의 성기를 타인, 특히 이성에게 내보여서는 안 된다'라는 도덕은 과연 어떠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도 궁금해 할 수 있게 됩니다. ​free sex같은 걸 주장할 만한 용기를 지니고 있지는 못한 저입니다만 ---  얼마 전 '공연음란죄'인가로 야구 인생을 끝내야했던 모 선수의 경우, 단지 한 여성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라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육체적) 피해도 끼치지 않은 그에게 그런 가혹한 사회적·법적 처벌이 내려진 건 대체 어떤 명확한 이성(理性)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향해 다음의 의문을 똑같이 적용하려 한다면, 지나친 객기가 될까요?

프랑스를 비롯하여 서구유럽사회에서 통용되던 일상의 정치 질서에 실질적인 해방을 가져온 시발점이었던 68혁명은 여학생 기숙사에 남학생이 드나들 수 없게 한 대학기숙사의 반자연적6인 규율로 인해 발발하였다. 무엇을, 누구를 위한 도덕이고 검열인가? 누구를 위해 이 모순된 장벽은 존재하는가? 왜 아무도 원하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필요치 않은 규율들이 도처에서 작동하며 우리의 삶을 검열하고, 우리의 싱싱한 젊음이, 이 건강한 삶이 하늘 아래서 작열하는 것을 방해하는가? "금지를 금지하라!"(pp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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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사이비 냄새를 풍길수록 더 많은 금기를 만들고, 그 금기를 넘어서는 자에게 가혹한 벌을 내리며, 규율의 잣대를 드높이는 것으로 자신의 허술함을 감추듯"(p15), 저자 목수정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향해 "구성원들이 억압에 잘 길들여져 있을 때에만 제대로 굴러갈 수 있는 사회"(p15)이며, 심지어는 "사랑을 조롱하는 사회"(p316)라고까지 비판합니다. 그 결과7!


우리가 아는 성은 … 타락의 상징을 뒤집어 쓴 채 우리의 일생을 따라다닌다. …… 성은 들키지 말아야 할 추잡한 욕망일 뿐이다.(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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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회적 삶은 억압과 함께 시작된다.(p305) … 헤어날 수 없이 겹겹이 둘러쳐진 통제의 틀 속에 자신을 방치하며 살다 보면, 우리는 어느 날 통제할 삶 자체를 잃게 된다.(p33) … 당신이 받은 억압을 배설하라. 그렇지 않으면 억압이 당신을 배설해 낼 터이니."(p306)

'사랑과 성(性)'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은 물론 아닙니다. 그저 헨리 치나스키와 같은, '본능대로 움직이는/움직일 수 있는 사랑'에 대한 관심 때문에 펼쳐든 책이었었기에, 저의 관심이 그것에만 집중되었을 뿐, '한국 사회의 속살'이라는 구절의 부제처럼, 저자 목수정 특유의 매력적인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책이지요. 암튼! 저자 목수정은 분명한 어조로, 억압의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어느덧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본능을 억압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또한 --- '당신이 받은 억압을 배설하라' 요구하고 있습니다.

<메갈리아>로 시끌시끌한 요즈음, 혹여라도 (2010년에 출간된) 이 책 「야성의 사랑학」을 읽고, 저자 목수정을 향해 '얘도 메갈이었네!'란 판단을 하는 이가 있다면, 잘못 읽어도 한참을 잘못 읽은, 그저 자신 생각의 짧음만 내보인 거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으로 읽힐 소지가 있는 구절도 있긴 하나, 그녀가 그러한 구절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 이 책의 제목에 쓰인 '야성'이란 단어가 철저하게 gender-neutral 하게 사용된 것과 같은 맥락이기 때문이지요. 


당신의 마음이 설렐 때, 그 설렘에 화답하라. 그 설렘을 죽이고 죽이면 다시는 당신을 찾아오지 않는다. 삶을 모독하지 말라. 그러면 삶이 당신을 버릴 것 삶에 바람처럼 찾아오는 사랑의 소용돌이가 내 심장을 두드릴 때, 눈앞에 평소 내가 그려왔던 바로 그런 연인의 모습을 한 이가 지나갈 때, 준비된 훗날을 위해 직관이 말해주는 신호를 무시하 던 사람​은 영영 사랑을 느낄 수 없거나, 그런 건 소설에나 나오는 거짓이라고 치부해 버리게 된다. 돋아 오르는 열정의 뿔을 칼로 계속 베어 내기만 하면, 어느 순간 열정은 자라기를 멈추는 것이다. 그 자라나는 열정의 뿔의 이름이 바로 '야성'이다.(pp44-45) 

다만!!! --- "가까이 가족으로 공동 생활을 해온 관계에서는 성적인 욕구가 애착으로 전환된다"(pp167-168)라는 저자의 주장과, "사랑 없이 사는 것은 삶에 대한 모독"(p241)이라는 저자의 또 다른 주장으로부터, 물론 성적 욕구과 사랑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렇다면 과연 "사랑을 하면 비로소 내 안에 불처럼 타오르는 열정이 이끄는 삶을 만난다"(p242)라는 구절로부터는 또 어찌 성적 욕구와 사랑을 구분해내어야 하나,같은 약간의 혼란이 남는다는 아쉬움이 있기는 합니다. 이와 더불어,  

누군가에게는 가족이란 울타리가 실제로 "뛰쳐나가고 싶기도 한 감옥일 수도 있"(p189)겠으나, 사회적으로조차 "서로의 몸과 마음이 이미 서로를 원하지 않는 상황임에도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여 있어야만 하는 결혼제도의 부자연스러움"(p27)이 엄연히 도덕적·법적 규범으로 자리잡고 있는 현실에서 --- "불만은 터뜨리고 욕망은 충족시키면서 사는 것이 건강한 삶이다"8란 그녀의 또 다른 책 속 구절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낼 수 있을것인지라는, 풀어낼 수 없을 거란 예감이 확신에 가까운 숙제를 받게 되었다라는 건, 아무리 양보하려 해도 뭔가 좀 공평하지 않다9란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뭐 어쩌라고!!! 쩝~ --;;) 

 

 

 

※ 읽어 본, 목수정의 다른 책들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저자) · 「파리의 생활 좌파들」(저자) · 「자발적 복종」(역자) · 「리얼 진보」(공저)​

 

※ 이 책을 읽으라고 저를 꼬셨던 헨리 치나스키 :  팩토텀」 · 「우체국」  · 「여자들

 

 




 

  1. "우리의 삶은 왜 어느 한순간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살지 못하고, 왜 늘 다른 곳에서 보상받기를 원하는지 가슴치며 물었다." - 목수정 著,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p112, 레디앙 刊, 2008.
  2. "그 어떤 세월도 또 다른 세월을 위한 볼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의 20대, 30대, 40대는 모두 똑같이 소중하고, 나의 모든 시간들에 적당한 노동과 적당한 즐거움을 배분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다." - 목수정 著,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p110, 레디앙 刊, 2008
  3. 철학에서의 '대머리 논쟁'
  4. 본문 p26.
  5. "성(性)은 우리가 그것을 원하는 모든 순간에 금지되었다. 결혼이라는 의식의 틀 안에서만,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것을 가장 흥미 없어 하는 조건 안에서만 허락된다."(p27)
  6. "인간은 즐겁기 위해 태어났다는 그 태초의 존재 이유"(p113)
  7. 이러한, 금지의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주어지는 억압이 비단 성(性)에만 국한되는 건 물론 아닙니다. - "종종 부모를 구타하거나 죽이는 패륜아, 선생을 패는 학생들이 보도된다. 이러한 사건은 군사부일체가 무너져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지배계급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군사부일체의 잔상에 대한 반발이 야기한 사건이다. 그 아이들은 부모들이 키웠고 선생들이 가르쳤다. 선생도 부모도 허점이 있고 언제나 옳지만은 않은 평범한 인간이다. 토론을 통해 의견들이 조정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그들에게 명령과 지시만을 하는 그 어른들의 모순을 보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그걸 보고 가슴에 뭔가가 쌓이지 않을 수가 있을까? …사회 전체가 괴물을 양산시키는 방향으로 질주하면서, 그렇게 해서 생산된 괴물들이 종종 눈앞에 있는 부모들을 공격하는 사태가 나타나는 게 뭐 그리 놀라운가."(pp197-198)
  8. 목수정 著,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p100, 레디앙 刊, 2008.
  9. 저자 목수정은, 한국에서는 법적으로 비혼이나, 프랑스에서 '시민연대계약(PACS)'을 한 동거인 희완 트호뫼흐와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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