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45
펄 S.벅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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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였다라 기억되는, 암튼 무쟈게 오래 전, 무려! 세로로 쓰여져 있는 「대지」를 읽었더랬습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이 작품의 첫 장을 펼치는 순간 '왕룽'이라는 주인공의 이름만큼은 매우 선명하게 떠오르더군요. 하지만! 곧이어 나오는 왕룽의 아내 '오란'의 이름과 당시의 '무척 재미는 있는데, 너무 두껍네!1'라는 잔상까지가 제 기억에 남아 있는 그 전부였었습니다. --- 이처럼, 마흔일곱이 되어 (거의 처음인듯) 다시 읽어 본 이 작품 「대지」는 과연 어떻게 읽혀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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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의 잣대로 보자면, ('잘 읽힌다'는 말을 할 수는 있겠으나 차마) '재미있는' 작품이라 표현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무쟈게 단순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거든요. --- 약간의 농사지을 수 있는 땅만을 소유하고 있었던 가난한 왕룽이 오란과 결혼을 했고, 부부가 열심히 뼈 빠지게 일을 해 돈을 좀 모았거늘, (예의 빠지지않고 등장해주는) 그들의 삶에 뜻하지 않은 고난도 닥쳤왔으나 용케 이겨내었고, (여기에 역시나 숟가락을 아니올려놓을 수 없겠는) '우연한 행운'의 도움이 있어 큰 부자가 됩니다. 또 다시, 마치 여기저기서 보여지는 드라마의 각본마냥 돈 맛을 알게 된 주인공 왕룽의 방탕이 나오며, (돈 많은 아버지를 모시는) 자식들간의 반목 역시 짜장면 옆에 놓이는 단무지처럼 놓여져 있기도 하지요. 그러다 그의 말년에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면서는 후회의 부분과 만족의 부분을 느끼게 된다는, 그야말로 뻔하디 뻔한!이라는 수식어를 피할 수는 없을 줄거리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대체 무엇!때문에, 이 작품에 '고전classic'이라는 찬사가 붙어 있는 것이며, 작가 펄 벅으로 하여금 퓰리처상과 무려 노벨 문학상까지의 영예를 누리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 소설에 대한 감상문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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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시작

마치 농부가 되기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듯한 사람인 왕룽에게,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커다란 변환점이 되었던 오란과의 결혼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단순한 이유로 그에게 '행복'이라는 것을 맛보게 해주었습니다. ---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여자가 오는 것이다. 왕룽은 내일부터는 여름이나 겨울에도 늦도록 누워 있을 수가 있다. 그도 침대에서 아버지와 같이 따뜻한 물을 가져오게 할 수 있다.'(p11)라 생각했던 왕룽이나, '우린 집안일을 하고 아이도 낳고 밭에 나가 일도 해야 하는 여자를 구해야 하는데, 예쁘장하게 생겨 먹은 계집년이 그런 것을 할 줄 알겠느냐? …… 우리 같은 가난한 살림에는 그 따위 예쁜 계집은 안 돼.'(pp17-18)라 생각하는 그의 아버지 모두 철저하게 아내와 며느리가 아닌 '식모와 노동력 한 단위'로서만의 효용을 그 결혼으로부터 기대했던 것이었죠. 그런데!!!

오란이 두 사람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그 '식모와 노동력 한 단위'로서의 역할을 이행해 냈던 겁니다. 게다가, 대번에 아들까지 낳아주지요. 천성이 농사꾼인 왕룽과 '슈퍼 파워의 식모 겸 노동력 한 단위'였던 오란의 결합은 오래지 않아 그들에게 작으나마 '부(富)의 축적'이라는 기쁨을 안겨주게 됩니다. : '삶이 이토록 호사스러울 수도 있었다. 그의 생활에도 행복을 맛볼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p38) --- 아침에 조금 더 늦잠을 잘 수 있으며,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농사일을 하게 되었다라는 사실, 때마침 찾아온 풍년으로 인해 얻게 된, (예전관 다르게) 사라지지 않고 그들의 손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되는 돈 몇 푼, 이러한 것들은 왕룽과 오란에게 '행복함'이라는 감정을 안겨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들이었었지요. 최소한 이 시기에는 말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매일 쉬지 않고 무엇이든 했다. 그러는 동안에 세 개의 방이 놀랄 만큼 깨끗해져 제법 풍족한 살림 같아졌다(p42) ……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가정을 형성해 주고 그들을 먹여 주고 그들의 신을 이루는 이 흙, 그들의 소유인 이 흙이 거듭거듭 햇빛을 받도록 파헤치는 이 완벽한 움직임의 일치감만이 존재할 따름이었다.(p43)


행복의 성장과 몰락 

결혼 전의 오란은 성 내에 있는 황 부잣집의 여종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은 오란과 왕룽은 황 부잣집 마나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만, 그 집의 가세가 예전같지 않고 차츰 기울어가기 시작한다라는 걸 알게되었죠. 아들들은 물쓰듯 돈을 써대고, 황 영감은 수많은 첩들을 들였다 보냈다 하고, 마나님은 아편에 빠져 있고... 뭐 망할 집안의 전형을 전부 다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황 부잣집에서 곧있을 셋째 딸의 혼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목좋은 땅 한 곳을 팔려 내놓았다라는 소식을 들은 왕룽은 그 땅을 사기로 결심합니다. 딱 일 년 전, 그 집의 여종이었던 오란... 의 남편 왕룽이 일 년만에 그 집 소유의 땅을 사게 된 거지요.  


그들 부부의 노력에 하늘은 좋은 날씨로 화답을 해주어 또다시 풍년의 수확을 거두게 되었고, 그렇게 그들이 사는 집의 벽 속 구덩이에는 차곡차곡 은화가 쌓여갔습니다... 만! '희망은 대부분 허사가 되는 법2'이란 것을 예의 왕룽이라고 비켜갈 수는 없었더랬지요.


부모에게 속하는 자식이 아니라 다른 집안을 위해 태어나는 딸, 그런 딸이 자기 집안에 태어나기 시작했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무거웠다.(p84)

(셋째 아이가 딸이었다라는 게 사실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것이 일종의 선행적 징표라도 되었다는 듯) 곧이어, 처참한 흉년이 찾아왔고 왕룽이라 해서 그 흉년을 이겨낼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고향을 떠나 남방 지역으로 먹을 것을 찾아 떠난 왕룽 일가는 거지와 다름 없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만, 여전히 그에게는 고향에 남겨놓고 온 '땅'이라는 희망이 남아있었었지요.

뜻하지 않은 행운과 함께 마침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왕룽 일가는 다시 피땀나는 노력을 하여, 예전보다 더 큰 부(富)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왕룽은 황 부잣집의 몰락을 떠올리며,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고, 자신의 아들들은 모두 농사일을 시키겠노라 결심했지요. : '그는 어디까지나 농토에 속해 있는 인간인 것이다.'(pp149-150) --- 하지만 그의 그런 희망은 다시 또 허사가 되고 말았으니...


행복의 변화 

왕룽은 자신이 가난한 줄을 잘 안다. 그러나 자신이 가난한 원인은 다만 하늘이 때맞추어 비를 내려 주지 않거나 비가 몇 달 동안 계속 내려서 홍수가 나기 때문이니 나쁜 것은 하늘이라고 생각했다.(p154)

작품 속에 중국의 시대적 배경/상황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기독교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 당시 중국의 지배층/상황에 대해 비판적인 연설을 하는 장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몰락이나 극심한 빈부격차 등에 대해 왕룽은 사회나 다른 이의 탓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천성적으로 자신을 '농토에 속해 있는 인간'(p149)으로 인식했던 왕룽은 모든 길흉화복이 오로지 하늘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었지요. 이 생각은 그가 적지않은 부(富)를 이룬 후에도 변치 않았습니다.


그 하늘이 다시 한 번, 큰 홍수를 내렸습니다만! 이번에만큼은 왕룽이 하늘에 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에게는 한두 해 쯤은 농사를 망쳐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만큼의 곡식과 은화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대신!!! --- 농사를 지을 수 없게되자, 갑자기 시간이 많아진 왕룽에게 이전에 없던 잡생각이 끼어들고 맙니다. 이러한 부의 축적을 가능케 해주었던,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현재의 왕룽'을 있게 해준 근본인 아내 오란에 대해 이성으로서도, 가족의 일원으로서도 싫증이 나기 시작한겁니다. 그리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전의 왕룽이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곳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인 쾌락이라는 '새로운 행복'을 찾게 됩니다.


왕룽이 옛날처럼 가난한 농사꾼이었거나 이번 홍수로 그의 논밭이 물에 잠기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 그는 돈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돈이야 얼마가 들든 자신이 혈기왕성한 동안에 인생의 쾌락을 못보고 싶은 생각이 가슴에 가득했다.(pp206-207)


행복과 불행의 반복 

쾌락에 내내 빠져있던 왕룽, 그리고 그렇게 변해버린 모습의 남편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오란 --- 하지만 이내 왕룽은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되었고, 예전처럼 농사일에 최선을 다했으며, 자신의 세 아들들을 각각 학자, 상인, 그리고 농부로 키워내리라 마음 먹습니다. 다시 별 걱정없는 행복의 시간이 지속될 것 같던 순간! '이젠 내가 나서야 할 시점이구만!'이라 말하듯 새로운 불행이 닥쳤었으니, 바로 그의 아내 오란이 병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된 겁니다. 한때, 마냥 빠져있었던 애첩 롄화에 대한 욕정도 세월 앞에선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었구요. 게다가 자식 놈들은 이래저래 다투기나 하며, 왕룽이 옛날 세워놓았던 자식들에 대한 계획을 선뜻 따라주지 않습니다. 


왕룽의 아들들은 한 사람도 마음 편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맏아들은 쓸 돈이 넉넉하지 않아 사람들 눈에 하찮은 존재로 보일까 봐, 그리고 성내에서 찾아온 사람이 방문하고 있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커다른 대문으로 걸어 들어와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식구들이 창피나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둘째는 이와 반대로 돈을 헤프게 쓰지 않나 근심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농가의 자식으로 허송한 세월을 되찾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p372) ……"도대체 자식놈들은 왜 나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단 말이냐!"(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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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행복과 불행이 연신 엇갈려 등장하게 되는 이야기는, 그 전개만으로는 스릴/재미를 줄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반복이 너무 길어지게 되면 사실 이내 짜증을 가져오기도 하지요. (그러하기에 중삐리 시절의 제가 이 작품을 읽고 '재미있다'란 느낌을 남겨두었다라는 게 일견 신기하기도 합니다.) 마흔일곱의 나이가 되어 읽어 본 이 작품은 다행히도 그 반복이 조금만 더 지속되었더라면 슬슬 짜증이 좀 올라왔을 수도 있었을 시점에서 결국 왕룽의 삶이 마감되는 것으로 읽혀지더군요. 그런데/그렇다면!!! 이 작품은 대체 어떤 메세지를 가지고 있는 걸까요?


이 작품이 비록 특별한 설정이나 장대한 스케일의 서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 도드라지지 않는 평범함 속에 인간의 거의 모든 욕망 (가족 관계 내외를 망라한) 인간관계에서의 사적 정치, 한 인물의 반평생을 통해 보여지는 (집단으로서의) 인간 내면/심리 - 이 완벽하게 다 들어있다라 생각합니다. --- 이 작품의 작가 펄 벅은 미국인이지만, 생후 4개월 때부터 중국에서 생활했었던, 말 그대로 서양과 동양의 정서를 모두 다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이처럼 서양과 동양의 정서 모두를 거의 완벽하게 가지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서양과 동양이라는 공간적 배경으로부터도 자유로운/서양과 동양이라는 공간적 배경 모두에 다 적용될 수 있는 정서를, 특정한 시대적 배경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말 그대로 '시·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정서'를 ​보여줄 있었었으며, 이것이 바로 2015년을 대한민국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저'라는 일 독자에게도 이 작품을 '고전classic'으로 읽어낼 수 있게 만들어준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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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이 흙에서 나서 다시 흙으로 변해 버린다. 그들도 지금 나란히 서서 부지런히 일해 이 대지의 열매를 얻으려고 하지만 마침내는 다시 대지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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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룽의 삶(토지에 대한 애착)이 모든 인간의 삶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그렇게 살 수도 있다는 삶의 한 유형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전 세계인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했다.(p428)

'땅'에 대한 왕룽의 평생에 걸친 집착을, 한때 대한민국을 미쳐있도록 했었던 부동산 투기와 연관짓는다는 건 코미디스런 발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 '누구나 그렇게 살 수도 있다는 삶의 한 유형'이었다라는 관점/수준에서 그 광풍을 바라본다면 예의... 세상에 등장한지 어느덧 80여 년이 넘은, 대한민국과는 다른 공간적·정서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 이 작품은 결국엔 '인간의 삶이란 여전히 다들 그렇고 그렇게 비슷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그러하기에 '코미디스런 발상'을 향해서도 마냥 코웃음을 지을 수는 없게 만들어주기도 하는) 부인할 수 없는 '고전classic'이 라 저는 생각하게 됩니다. 이건 흡사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을 '직원'이라 표기하던 '스태프'라 표기하던, 이탈리언 식당에서 음식 만드는 이를 '주방장'이라 하던 '쉐프'라 하던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이 바뀔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나 할까요?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헤밍 웨이(1954) : 노인과 바다

- 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페스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 도플갱어」 · 예수복음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1. 이 작품 「대지」에 이어 작가는 「아들들」과 「분열한 집」의 후속작들을 발표했다하는데, 제가 당시 읽었던 책은 그 3부를 모두 담고 있는 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2. 라오서 作, 「낙타샹즈」 황소자리 刊,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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