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 (합본) 베스트셀러 한국문학선 26
염상섭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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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였든 어디에서든 몇 번은 들어보았던 작품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작가 염상섭의 또 다른 대표작이라는 이 소설 「삼대」는 제목 그대로, '할아버지(조 의관)-아버지(상훈)-주인공(덕기)'의 삼대(三代)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등장 인물의 탄생/성장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전개가 아닌, 그 삼대가 동시에 등장하고 있는 특정 시점의 상황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지요. 그 시대적·공간적 배경은 1930년 언저리의 일제 치하 조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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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폰이라는 게 없었던 시절엔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란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이처럼 '나의 가까운 과거'에 대해서조차 그것을 현재(의 조건들)와 비교해 본다라는 건 그만큼 그 과거에 대한 (때로는 그리움이 있기도 하나 대부분) 안쓰러움스러운 감정을 가지게 해줍니다. 후회와 아쉬움은 물론이구요. --- 그리 멀지않은 시대인 1930년대엔 그러한 안쓰러움과 후회, 아쉬움을 뛰어 넘어 지금의 잣대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이도 있었던 듯 합니다. 그 시절이 (저도 물론 피부에 와닿게 느끼지는 못하지만, 저의 다음 세대들은 더더욱 알 수 없을) 우리의 자주권 없는,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때라는 커다란 사실을 제외하고도 말이죠.

양반 관직을 돈으로 산, 한 마디로 백만장자인 중인 출신의 덕기 할아버지.1 --- 헌데 이 양반이 나이 칠십이 다 되어, 자신의 며느리 (그러니까 주인공 덕기의 어머니)보다 네 살이나 어린 첩2을 들여 덜컥 딸3까지 낳아버렸습니다. 그의 손자 덕기 역시 아들을 낳았거늘, 이제 그 가족에는 항렬로만 보자면 '네 살짜리의 할머니와 세 살 먹은 손주'(p27)가 공존하게 된거지요. 헐~

이런 짜장스런 관계가 가족 내에서만 있었느냐 --- 덕기의 부친 상훈은 젊은 시절 미국에까지 다녀온, 그리하여/그로 인해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허나 부친의 막대한 재산 덕에 딱히 하는 일 없이4 교회 일에만 열심인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요. 그러다보니 당연히! 아버지인 조 의관과 상훈의 관계가 좋을리 없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상훈이 기독교 신자라는 것. 돈으로 조상들의 묘를 새로이 단장하고 제사를 으리으리하게 지내려는 조 의관과는 달리 상훈은 그처럼 제사에 큰 돈을 쓰는 것을 못마땅해했을 뿐 아니라,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아예 제사 참석 자체를 거부했었었으니까요. 하지만!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것 같은 상훈도 속을 까보면 그렇지도 않다라는 게 문제입니다. 낮에는 교회 일에 열심을 다하는 신사이지만, 밤만 되면 남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기생 술집에 출입을 하는 인물이었던거지요. 뭐 그렇게 몰래몰래 술만 마시고 다녔다면 '돈 많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라 넘겨버릴 수도 있겠거늘, 이 양반 역시 (그의 아버지인 조 의관처럼 대놓고 첩을 집으로 들인 것은 아니나) 한 젋은 여성에 혹해 결국 그 사이에 아이를 하나 낳았던 겁니다. 근데 문제는... 그 상대인 '젊은 여성'이 상훈의 아들 덕기의 국민학교 동창이었다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덕기에게는 자신의 국민학교 동창이 졸지에 자신의 서모(庶母)5가 되어버린 상황이 생겨난 겁니다. 헐,헐~

덕기는 할아버지의 명으로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방학을 맞아 본가에 와 있다가 이러이러한 짜장스러운 상황들을 알게 된 거죠. --- 어느덧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게 된 스물세 살의 나이가 되자 덕기에게 보이는 자신의 가족이라는 게, 특히나 자신의 아버지 상훈이 좋게 보일 리가 없는겁니다.


부친은 봉건시대에서 지금 시대로 건너오는 외나무다리의 중턱에 선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마침 집안에서도 조부와 덕기 자신의 중간에 끼여서 조부 편이 될 수도 없고 아들인 덕기 자신의 편도 못 되는 것과 같은 어중간에 선 처지라고 새삼스러이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만큼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또는 자기의 사상 내용으로나 가장 불안정한 번민기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덕기는 부친에 대하여 가다가다 반감이 불끈 치밀다가도 한 편으로는 가엾은 생각, 동정하는 마음이 나는 것이었다.(p41)

물론! 덕기는 여전히 아들로서 자신의 아버지를 존경할 수 없다라는 사실을 매우 괴로워하기는 합니다만, 끝내 할아버지와 아버지같은 '19세기의 인물'이 될 수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았던 19세기, 그리고 그 '19세기의 인물'들에게 다음과 같은 잘못이 있다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무엇보다도 앞서 산 사람이 자기의 뒤틀린 경험과 사상과 습관 속에 뒤에 오는 사람을 가두어 넣으려 하는 데서 그 비극의 씨를 뿌려 가지고 청춘의 꿈이 깰 때 어떻게 집심6(執心)하고 조신7(操身)하겠는가 하는 마음의 준비를 시켜 주지 못하고 방임하였던 실책에서 그 열매를 거둔 것이나 아닐까? 이것이 너무나 실제에서 먼 관념론이라 할까?(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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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변모해 가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서의 삼대를 통한 각 세대의 가치와 의식 변화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덕기로 대변되는 당시 청년들의 정신적 갈등이 사실적 수법으로 탁월하게 묘사되고 있다. 식민지 현실과 근대 사회로의 변천 과정을 밀도있게 재구성하면서 한 가족의 가족사를 통해 당시 사회의 구조와 모순, 세대간의 가치관 변화를 잘 드러내고 있다.  - <작품 해설> 중

위의 인용 ①,②에서 보여지는 덕기의 생각을 본다라면, (어느 정도의 비약이 있긴 하나) 이러한 <작품 해설>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을겁니다. 소설 속에서 보여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代) 사이의 갈등요소가 '기독교'로 대변되는 외래 문물만으로 표현되고 있다라는 게 (물론 극적인 대비를 위한 것이겠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일견 지나치도록 단순화 시킨 설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게도 해줍니다만, 그들(조 의관과 상훈)을 바라보는 덕기의 시선에는 분명! ('19세기의 인물'들의 가치관과는 다른) '가치와 의식의 변화'가 녹아 있었기 때문이죠.


조 의관은 눈을 감으며 남긴 유언장에서​ 자신의 재산 분배를 세심하게 적어놓으며, '금고지기'로서의 역할을 아들 상훈이 아닌 손자 덕기에게로 넘깁니다8. 졸지에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게 된 덕기이지만, 친부(親父)인 아버지가 엄연히 살아 있다보니 덕기가 자신의 할아버지와 같은 실질적 재산 관리권을 가지고 있다고는 할 수 없었었지요.9 --- 이전에는 그래도 기독교 신자로서 타인의 시선을 피해가며 주색잡기를 즐겼던 상훈은, 아버지였던 조 의관이 자신을 무시하고 손자인 덕기에게 집안의 금고지기 역할을 넘겼다라는 데 낙담해, 이젠 아주 대놓고 향락에 빠져선 그 모든 금전적 해결을 아들인 덕기에게 미룹니다10. 결국 조 의관이 세상을 떠난 지 단 두 달여만에 조 씨집안은 '짜장'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그야말로 '개판'이 되어버렸으며, 이렇게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버린 자신의 집안을 보며 덕기는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지요.


​'할아버니께서 돌아가신 지가 이제 겨우 두 달밖에 안 되는데!' 덕기는 이 두 달동안에 집안 형편이 이렇게도 변하였을까 하고 한숨을 지었다. …… 덕기 생각으로는 때는 흘러나가는 것이요, 조부가 돌아가고 새 사람, 새 살림, 새 시대가 바뀌어 들겠지마는 그것이 일조 일석에 되는 것이 아닌 것을 안 것 같다. …… '할아버니께서 일흔이 넘어 돌아가셨으면 일찍 돌아가신 것은 아닐 거요, 결국 우리의 뒷받침이 늦은 것이다. 우리가 아무 준비도 없기 때문에 불과 두 달에 이 모양이다!'(pp517-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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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우리에게 '나/우리의 과거'에 있었었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 일제의 지배를 받아야 했었고, 외래의 문물들이 그 시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었었으며, 어느 부분에 대해선 저항마저도 허락되지 않은 채, 강제로 그 외래의 문물들을 받아들였었어야 했다라는 건 분명!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가르침들이겠죠. 그렇다면 이 작품처럼 우리의 실제 역사의 한 단면을 가공의 이야기로 담아내고 있는 (문학에서의 분류가 아닌, 그저 '역사 자체는 아니되 역사를 담고 있는'이라는 의미로의) '역사 소설'로부터는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는 걸까요?

이 작품 「삼대」가 (이광수의 「무정」과 같은) 계몽 소설은 아닌 것 같지만, 작가 염상섭이 당시의 사회상을 작품 속에 그려내며 대중들에게 (이광수의 「무정」이 보여주었던 '우리가/는 변해야 한다'라는 식의 적극적 계몽이 아닌, 소극적 의미로서의 '계몽'일 수는 있겠는) 일종의 '반성', 혹은 미래에의 '대비'같은 걸 요구했었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해보게는 됩니다11. (다시 한 번 더!) 그와 같은 의미가 이 작품에 주어져 있다면, 이미 시대가 완전히 바뀌어 있는 2015년의 우리는 대체 이 작품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문학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에게 읽을만한 가치가 있기는 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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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퀄'이라 불리우는,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감각/경로를 통해서든 바라보게 되는 '과거'에 대해, 일반적으로 우리는 일종의 우월감과도 같은 감정을 갖게되곤 합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그저 사용하는 자의 입장에서 가져보게되는, '이렇게 편한 게 없었을 땐 대체 어떻게들 살았었을까?'하는 의문이 그 단적인 예이지요. 사실! 우리는 '이게 없었을 땐'의 다음에 '대체 어떻게들 살았었을까?'라는 의문이 아닌, '이런 걸 만들어낼 생각을 대체 어떻게 했었을까?'라는 감탄을 가지는 것이, 우리보다 먼저 살다 가셨던 그 모든 분들을 향해 가져야할 합당한/당연한 예의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주인 시즈카 作, 「아버지와 외삼촌」이라는 소설을 읽고 제가 썼던 감상문의 첫 문단입니다. --- 제가 '짜장스럽다'라든가 '개판'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실어왔었던 이 작품 「삼대」 속의 상황들은 물론 2015년의 제 가치관에 비추어 그렇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설 속엔 '덕기의 아내'처럼 자신의 남편이 첩을 두는 것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라 말하는 인물도 있듯이, 당시엔! 지금의 저처럼 이 모든 상황들에 대해 '짜장스럽다'라든가 '개판'이라는 표현 자체를 아예 떠올리지 않았던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거라, 어쩌면 (최소한 특정 계층에 한해서는) 대다수가 그러했었을 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그들, '19세기의 인물'들에게는 아직 '가치와 의식의 변화'라는 것이 발생되지 않았었으니까요. 이처럼!

핸드폰이나 스마트 폰이 없었을 땐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어!라, 마치 남 이야기하듯 말할 것이 아니라 '대체 어떻게 이런 걸 만들어낼 생각을 했었을까!'란 감탄과 그에 따르는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우리의 '과거'에 대해 가져야할 후인(後人)으로서의 옳바른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 우리가 역사 소설을 읽는 이유는 바로 ('이러 이러했던 과거가 있었다'라 역사가 알려주는) 사실(史實)로부터의 깨달음/배움(그리고 그에 대한 감사함)이 되어야 한다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말입니다!!!


​언젠간 현재의 우리들도 예의 과거의 사람들이 되어있을 겁니다. : '삼대(三代)'라는 구조에서 가장 괴로운 인물은 아무래도 바로 가운데 끼인 사람, 즉 이 작품에서의 상훈이 될 수 밖엔 없겠지요. 이런 시선으로 상훈을 바라보면 일견 그에게 동정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처럼 '가운에 끼인 자'의 처지/비애를 작가 염상섭이 의도적으로 낮과 밤에 완전히 다른 생활을 했었던 상훈의 모습으로 그려낸 것일 수도 있다라 생각되기도 하구요.  --- '가운데 끼인 세대'는 항상 존재합니다. 지금의 '저/우리'를 그렇게 본다면, 우리의 부모 세대와 우리 세대가 고작(?)해야 정치적 관점에서나 충돌했던/할 뿐이었던 것에 비해, 우리 아이들의 세대와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상당한 범위와 간극의 격차가 존재하는 '가치관의 대립/충돌'이 있을 수도 있다라는 염려 어린 가정은 충분히 그 설득력이 있다라고 생각하며, 이 때!!!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바라는 것이 바로/어쩌면! 이 소설 속 다음의 구절에 담겨져 있지 않을까도 싶다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 작품 속 덕기의 한탄처럼 '우리의 뒷받침'이 얼마든지 늦어질 수도 있는거니까요.       

 

 

그이12는 자네 조부에게는 기독교도로서 이단이었지마는, 자네에게도 시대 의식으로서 이단일 것일세. 그에게는 얼마 동안 술잔과 19세기의 인형을 무릎에 맡겨 두는 것도 좋은 일이나 …… (p307)

​왠지 자꾸만 상훈이라는 인물에 비난보다는 동정의 마음을 더 크게 가졌었던 저에게, (덕기의 친구인) 병화라는 인물이 덕기에게 써보냈던 위의 편지 속 구절이 (이것이 이 작품의 교훈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내내... 제 머릿 속에서 맴돌더군요. 지금 이 자리에서... 이 구절과 (어느 분인가의 블로그에서 보았다가 메모해두었던) 다음에 쓰게 될 구절의 연관성을 명쾌하게 보일 수는 없습니다만, 자꾸! --- 무언가 이 둘 간의 사이에 (작가 염상섭의 의도하였던 것은 물론 아니겠으나), 우리의 부모 세대에게 내가 하지 못하였던 것들에 대한 후회로부터, 우리 세대에 해내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책임 의식, 그리고 나의 자식 세대에게 기대하는 바람(願)까지가 모두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털어낼 수가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뒤 당신은 했던 일보다 하지 않았던 일 때문에 더 실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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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로부터 시작되었던 우리나라 근대 문학에 대한 흥미가, 이광수의 「무정」을 읽게 해주었었다라면 --- 염상섭의 이 작품 「삼대」를 향해서는 앞서의 두 작품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해주며, '나/우리'의 현재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어 있는 것인가를 찌릿!하게 알려주었다라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 오래전에 쓰여진 소설도 아니건만, 지금 우리의 일상에선 사용치 아니하는 단어/구절들이 너무도 많이 나와 '네이버 국어사전'을 함께 띄워놓고 매 페이지마다 두 세개씩 사전을 검색하고 적어놓으며 읽었어야 했다는 노동이 필요하긴 하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당시의 어휘들로 쓰여져 있는 버젼을 읽어야만이 원작의 풍미를 한껏 맛 볼 수 있다라는 건 누구에게나 틀림없이 해당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 오래 전(?) '귀여니'란 작가(?)의 소설이 그 해괴(?)한 단어들로 논란(?)이 된 적 있었습니다만, 내 아이들이 지금의 제 나이가 되어 있을 때 과연... 김훈 작가나 이문열 작가의 소설들을 사전의 도움 없이 읽어내고 이해하고 느낄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이 다시 한 번 더! 제가 상훈과 같이 '끼인 세대'임의 일례가 아닐까도 싶네요. 끝마무리까지... 이 작품에 대한 저의 독해는 아무래도 상궤(常軌)로부터 매우 엇나간 것 같다라는 생각만 듭니다. --;;


※ 감상문을 써놓은 우리나라 근대 문학 : 이광수 作,무정

 

 

 

 

 

 






 

  1. 소설에 그의 본명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관직을 성(姓)뒤에 붙여 '조 의관'이라 불릴 뿐.
  2. ⁠즉, 항렬로는 덕기의 새 할머니, 서조모(​庶祖母)가 됨.
  3. 뭐라 표현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항렬상으로는 덕기의 부모뻘이 되는 것이죠.
  4. 상훈이 단지 학교에 관련되어 있다라는 것만 나옵니다.
  5. 아버지의 첩.
  6. 흔들리지 아니하게 한쪽으로 마음을 잡고 열중함. 또는 그 마음.
  7. 몸가짐을 조심함.
  8. 영감으로서 생각하면 죽은 뒤에 아들의 손으로 제사받기는 틀렸으니가 장손에도 외손자인 덕기 하나를 믿는 것이었다. 내가 죽은 뒤에 기도를 하면 내가 황천으로 가다 말고 돌아와서 그놈의 혓바닥을 빼놓겠다고 노영감은 미리미리 유언을 해 둔 터이다. 아들이 예수교식으로 장사를 지내 줄까 보아 그것이 큰 걱정인 것이다.(p95)
  9. 덕기는 자리에 드러누우며 세상이 신산하다고 생각하였다. 나이 스물 셋이 되도록 인생 고초라고는 감기나 앓아 보았을까 그외에는 소설책이나 병화의 생활을 통하여밖에는 모르고 자라던 이 청년은 사생활이나 가정일로 세상이 귀찮다거나 신산하다는 생각이 들어 보기는 아마 오늘이 처음일 것이다. …… 지금까지 살림이라는 것, 식구들의 불평이라는 것을 책임없는 처지에서 원광으로 바라만 보던 것이 별안간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에게 책임을 지우려 들고, 자기도 그 속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니까 신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책임은 걸머졌어도 자기 힘으로는 하나도 해결할 수 없는 데에 기운이 더 찌부러들고 신산한 생각만 들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pp469-470)
  10. 금시로 정이 떨어지는 것 같고 그 속에 앉은 부친은 딴세상 사람같이 생각이 들었다. 신앙을 잃어버리고 사회적으로 활약할 야심이나 희망까지 길이 막히고 보면야, 생활이 거칠어 가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동정은 하는 한편에, 이미 신앙을 잃어버린 다음에야 가면을 벗어 버리고 파탈하고 나서는 것도 오히려 나은 일이라고도 하겠으나, 노래(老來)에 이렇게도 생활이 타락하여 갈까 하고, 덕기는 부친에게 반항하기보다 다만 혼자 탄식을 하는 것이었다.(p433)
  11. 사실 소설 속에는 상훈의 타락한 '현재'와 덕기의 순수한 '현재'가 마치 도돌이표에 의해 움직이는 악보와도 같다라는 메시지가 보이기는 합니다만, 작가가 강조하는 바는 결국 덕기에게는 '가치와 의식의 변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기에 상훈의 '현재'와 같은 덕기의 '미래'는 되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바로 그 점이 작가가 내비치고 있는 '일종의 반성 혹은 미래에의 대비'가 아닐까라는 것이지요. (물론! 이 '반성과 대비'란 것이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는 당시의 현실에 대한 비판 내지 충고일 수도 있겠으나, 제 수준에서는 감히 그러한 것을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네요.)
  12. 덕기의 아버지 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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