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유혹 - 상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2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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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데! --- 제가 만약 「가장 오래된 교양」, 「사람의 아들 예수」, 「맨 얼굴의 예수」 그리고 「예수복음」을 읽지 않고 이 책 「최후의 유혹」을 읽었더라면 그저 "재미는 별로 없고, 내용은 얄딱꾸리하며 게다가 길기는 졸라 긴", 뭐 그런 소설로만 이해했을 겁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제가 위 네 권의 책을 읽었었다라는 게, 이 작품은 "재미는 별로 없고, 내용은 얄딱꾸리하며 게다가 길기는 졸라 긴" 소설임을 여전히 부인하지는 못하겠지만, 다 읽고나니 분명!!! 그러한 모든 장애물을 넘어설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바티칸이 한때 금서로 지정하였었다지만 오히려 카톨릭·개신교 신자라면 꼭 읽어봐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연휴를 이용해 진득이 읽어보려는 생각에 이 책을 선택했거늘, 연휴가 아니었으면 하염없이 늘어졌었을 듯한 책이기도 했습니다만,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이 책을 '연휴의 독서'에 어울린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는, 에... 또 뭐 암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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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서 예수는 인간에게 끝없이 다가선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바로 그 복음서를 갖고 예수를 인간으로부터 끝없이 갈라놓는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민중과 한 몸이다. 그런데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교리와 신학을 들이대면서 예수를 자꾸만 신격화해서 민중과는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초월적인 그리스도로 둔갑시킨다. 그래서 이 땅의 가난한 신자들이 '자기네 자신의 희로애락'과는 무관한 예수를 그들의 구세주로 모시는 서글픈 일이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벌어진다.   

- 김용민 著,「맨 얼굴의 예수」 중 정연복 한국기독교연구소 연구위원의 말​

위의 주장에 (부분적으로나마) 동의할 수 있다면, 이 주장에 주제 사라마구가 「예수복음」에서 보여주었던 "예수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 만약 사람의 아들이라면?"이란 의문을 어울어 시킬 수 있다면, 그리하여 칼릴 지브란의 "사람들은 당신이 신(神)이 되기에는 너무나 허약하고 가냘픈 인간이었다고 말하고, 예배와 찬송을 받이게는 너무 인간적인 신(神)이었다고 말합니다" 라는 고백을 한 번쯤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해낼 수 있는 정도의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 그런 (특히 카톨릭·개신교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독자에게 "인간으로서 신에 이르려는,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신에게로 돌아가서 인간 자신과 신을 동일시하려는 너무나 인간적이고도 너무나 초인간적인 그리스도의 이원적(二元的)인 본질(p7)"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이 작품 「최후의 유혹」은 상당히 흥미로운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 될 수 있다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내용이 내용이다보니, 「예수복음」에서 작가 (아직까지도 저의 No.1 외국작가인) 주제 사라마구가 보여주었던 설정과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상상1의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예수복음」에서 작가는 마리아가 처녀로서 예수를 임신한 것이 아니라, 요셉과의 섹스를 통해 갖게 된 것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가장 오래된 교양」에서 저자 크리스틴 스웬슨 교수도 언급하고 있는, "'처녀'라고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원래 그냥 '젊은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라는 지적을 받아들인다면 오로지 주제 사라마구만의 작가적 상상력의 결과라고는 볼 수 없기도 하지요. 하지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상상력은 이 점에서는 성서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혼할 후보자들을 모아놓았을 때, 그토록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직 요셉의 지팡이에서만 꽃이 피었다. 그랬기 때문에 랍비는 마리아를, 하느님께 봉헌했던 아름다운 마리아를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결혼식 날이 되자, 그가 미처 신부에게 손을 대기 전에 벼락이 때려 신랑의 몸을 마비시켰다. 그러더니 나중에, 전해지는 얘기를 들으면, 신부는 하얀 백합의 냄새를 맡았고, 아들을 잉태하게 되었다.(p40)

「예수복음」에서 예수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 계기는, 예수의 탄생을 알게된 헤롯왕이 베들레헴의 세살 아래 모든 사내아이들을 살해하도록 한 명령을 엿들은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 그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아, 오직 자신 예수만이 그 참화에서 살아남게 되었다라는, 일종의 원죄의식과도 같은 것으로부터였었었지요. 즉,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그 이후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원죄'가 지어져 있듯, 요셉의 '(불고지의) 죄'가 예수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거지요.


하지만, 이 작품 「최후의 유혹」 속 예수는 그렇게 심오한 생각을 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앞서 <각주 1>에서도 언급한 바대로, 이 작품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시점 이전의 예수의 삶에 대해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작가적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의 이야기이겠습니다만, 예수가 과연 어릴 적부터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이다!'라는 관념을 명확히 가지고 있었겠느냐라는 단순한 의문은 그 누구나 가져볼 수 있는 것이겠지요. 단! 다음의 인용문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같은, 정신적으로 나약한 모습의 예수는 아니었을 것이라 기독교 신자인 저는 생각합니다.) 


나는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릅니다. 난 회당에 나갈 용기도 없고요. 사람들을 보면 난 당장 도망을 쳐요. 나는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죠. 나는 안식일에도 일을 하고(p41) …… 저는 이 세상이 좋아요. 전 결혼하고 싶으며, 비록 창녀이기는 해도 막달라의 여인2을 원합니다. 그녀가 창녀가 된 것은 제 탓, 제 탓이고, 저는 그녀를 구해 줘야 합니다. 그 여자를요! 이 대지도 아니고, 세상의 왕국도 아니고, 제가 구원하고 싶은 것은 막달라의 여인입니다. 그만하면 저로서는 충분합니다. …… 저는 당신이 저를 혐오하고, 당신이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사람을 찾아내기를 바라고, 전 당신을 떨쳐 버리고 싶습니다.(pp47-48)

이처럼 예수는, 그저 평범함 한 남자로서의 삶을 원했던 그런 사람이었지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보다 한 술 더 떠 "결혼도 하기 전에 생과부가 되었고, 아이를 가지지도 못하고 어머니가 되었으며 … 남편의 따뜻함을 느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흐뭇하고 자랑스러운 기분도 느껴 본 적이 없(p51)"는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며, 자신의 아들 예수가 이스라엘을 구할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랍비의 말에 다음과 같이 강하게 저항하기도 합니다.


선지자란 말씀인가요? 아니에요, 안 됩니다! 그리고 만일 하느님이 그렇게 뜻을 정하셨더라도, 그 뜻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제 아들이,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다른 모든 아이들하고 똑같아지기만을 바라요. 다른 모든 사람들하고 똑같이 말입니다. …… 그 애가 점잖은 집안에서 태어난 착하고 젊은 딸이며, 지참금도 가져올 여자하고 결혼하게 해주시고 그 애가 풍족한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자식을 여럿 낳아서, 할머니와 아이들과 손자들이 다 함께 토요일마다 춤을 추러 가서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사게 해주세요.(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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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예수와는 달리, 무력까지도 사용하는 저항으로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야 한다 주장하는 '열심당원3'의 우두머리를 사람들은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우두머리는 로마군에 잡혔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형을 선고받게 되는데, 여기서 작가 카잔차키스의 상상력은 (다른 목수들은 모두 만들기를 거부했던) 그 십자가를 만든 목수가 바로 예수였었다라는 설정을 만들어내지요. 그런 이유로 예수는 비난을 받게 되고, 열심당의 <성자 암살단>이었던 (성경 속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바로 그) 유다의 미행에 놓이게 됩니다.


이후,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려고 수도원(p223)"엘 찾아갑니다만, 오히려 바로 죽음을 앞둔 수도원장으로부터 당신이 메시아라는 말들 듣고는, 자신의 운명(!)을 결국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생각하게 되었고, 유다는 그가 과연 진짜 메시아인지를 두고 보겠다는 이유로 그런 예수의 길을 끝까지 함께 하게 되지요.4


당신은 냉혹하고, 당신은 냉혹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런 사람들만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지금까지 저희는 흐느껴 울고, 엎드려 경배하며,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주여, 저희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나이다. 저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이까? 당신은 냉혹하고, 당신은 냉혹한 백성을 사랑하니까, 그렇다면 저희도 냉혹해지겠습니다. 이제는 저희, 저희의 뜻이 이루어져야 합니다!(p161)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수도원장의 위 절규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아가 임할 것이라는 성서의 약속이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에 점점 절망하며 조급함을 느끼게 되지요. 이에, 예수가 진짜로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유다는 어서 빨리 그가 하느님의 능력을 사용해 로마로부터 해방을 이끌어내주기를 바랍니다만, 예수는 현세의 고통을 치유해주기보다는 내세에서의 기쁨만을 설파할 뿐입니다.5


이후 예수는 세례요한으로부터 자신이 진정 메시아임을 듣게됩니다...만 여전히! 그의 마음 속에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내게 허락해 주시고, 분노하지 마세요!(p395)"라는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었지요.


나는 이런 짓들은 이제 신물이 난다. 나는 굶주리며 지내기도, 겸허한 체하기도, 다른 쪽 빰을 내밀어 한 대 얻어맞는 짓도 모두 신물이 난다. 나는 사람을 잡아먹은 하느님이 보다 온화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비위를 맞추고 아첨을 떨기도 짜증이 나고, 형제들이 나를 욕하고 어머니가 흐느껴 울고 내가 옆을 지나가면 사람들이 웃는 소리에도 짜증이 나며, 맨발로 돌아다니기에도 신물이 나고, 장터를 지나갈 때 꿀과 술과 여자를 살 용기가 없어서 잠 속에서나 하느님이 그런 것들을 가져다주어 허망한 바람만 맛보고 겨우 껴안는 시늉이나 하는 데도 짜증이 난다! 나는 그 모두가 역겹다!(p400)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갈등구조는 크게 보아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예수 자신의 위와 같은 내적 갈등이고, 또 하나는 유다과 예수 간의 갈등이죠. 유다가 기대했던 메시아는 "칼을 든 메시아를, … 유대인들의 말과 낙타들도 소생시켜서, 보병과 기마병이 다 같이 진격해 로마 놈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p598)"라 명령하는 메시아였지만, 그의 앞에 서 있는 예수는 "(우리의) 적은 내면에 존재하고, … 구원은 내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p537)"라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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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개의 갈등의 해결되어가며 예수의 마지막 순교가 이루어지게 되지요. 「가장 오래된 교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였었던 --- <유다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가 바로 유다였었기에, 그에게 자신을 로마에 넘겨주는 혐오스러운 일을 맡겼던 것이며, 유다는 이 일로 인해 자신이 영원토록 비난받고 저주받게 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예수의 명령에 순종했었다고 합니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 작품에서 바로 이 <유다복음서>의 기록을 따른 듯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지요.


유다, 내 형제여.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하고 당신이 나를 배반하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모자라는 힘은 하느님께서 주셔요. 우리 두 사람은 세상을 구원해야만 합니다. 나를 도와줘요.(pp648-649)

결국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신(神)이 되기에는 너무나 허약하고 가냘픈 인간이었다"라는 칼릴 지브란의 말처럼, 예수 스스로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게 부여된 그 임무가 거두어질 수 있다면 거두어지기를 바래었으나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죠.6 헌데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의 수호천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장면에서부터 이 소설의 반전이, 그리고 이 작품의 제목이자 하이라이트인 '최후의 유혹'이 시작됩니다.7 (이후의 내용은 적지 않는 것이 독자로서의 예의일듯 싶네요.) 


나는 저 사람이 십자가에 매달리기를 원하지 않아. 다 지긋지긋해! …… 저 사람은 꿈속에서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라. 그로 하여금 현실과 똑같은 두려움, 똑같은 고통을 꿈속에서 느끼게 하라.(p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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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어요!(p764)"라는 작품 속 마태의 외침이 어쩌면!!! 바티칸이 이 소설을 금서로 지정했던 이유가 아닐까... 하는, 사뭇 삐딱한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 「죽음의 중지」에서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죽음'이 없어진 상황, 즉 세상 사람 그 누구도 죽지않게 된 상황에 대해 가장 심각하게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게 될까 걱정하는 곳은 장의업계도 아니고, 사설노인복지시설도 아닌, 바로 카톨릭 교단인걸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고, 그렇다면 교회의 존립근거 또한 없어진다라는 이유때문이었지요.

주제 사라마구의 이 시선을 받아들인다면 --- "매달려야 했어요"라는 마태의 말이 가지고 있는 당위의 주장은 예수의 순교 - 결국 그로 인한 우리 영혼의 구원 - 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푼 실제의 은혜, 즉 '사실(fact)'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닌, 그것이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믿음의 내용이었었기에 그러했던 것이라는 것이 되어 버리며, 이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 의미에 심각한 도전을 하고 있는 이 작품을 카톨릭 교단이 용인할 수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만 됩니다. (불가침인 '신성(神性)을 건드렸기 때문이다라 보는 건 너무 단순한 반응이 아닐까 싶네요.) 하지만!!!

   

육체와 영혼의 투쟁, 반발과 저항, 화해와 굴종, 그리고 마지막으로, 투쟁의 가징 숭고한 목적인 신과의 결합 - 이것은 그리스도가 취한 오름길이었고, 그리스도는 그가 남긴 피로 물든 자취를 따라 우리더러 뒤따라오라고 부른다. …… 그의 뒤를 따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갈등을 깊이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고뇌를 다시 살아야 한다. …… 희생의 절정인 십자가로, 그리고 비실체성(非實體性)의 정상인 신에게로 오르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투쟁하는 인간이 거치는 모든 과정들을 거쳤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겪은 고통이 우리에게 그토록 생생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함께 나누고, 그리스도가 거둔 최후의 승리가 마치 우리 자신이 미래에 거둘 승리처럼 여겨진다. …… 유혹은 그가 길을 잃게 하려고 마지막 한순간까지 애를 썼고, 유혹은 패배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 순간에 죽음은 영원히 정복되었다. …… 이 책은 전기가 아니라, 투쟁하는 모든 인간의 고백이다.(pp 8-11)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프롤로그8>에 써놓은 위의 구절을 온전히 이해한다면, 이 작품이 결코! 예수의 신성을 건드리고 있지 않다라는, 오히려 "현대 기독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만 보고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를 못 보는 면이 많다"라는 함석헌 선생의 비판을 이겨낼 수 있는 훌륭한 전기를 마련해주고 있음을 알게 될거라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람의 아들 예수」에 나오는 <예수의 희생에 관하여 : 삭개오>중 다음의 인용문이 현대의 카톨릭·기독교가 예수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점을, 가장 근본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생각해, 그 중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연휴니까 읽어낼 수 있었었던, 하지만 또한 연휴의 독서엔 어울리지 않았던' 이 작품 「최후의 유혹」을 읽고 난 감상문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날라리 신자인 저에게도 언젠간... 성경 전체를 한 번... 은 읽는 날이 있겠... 죠? --;;


그분은 얼마든지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피해 살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생명을 구하려 하지 않았고, 한밤의 이리떼들로부터 자신의 양떼들을 지킬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 그분은 마치 농부가 자신이 수확한 곡식을 모아 두었다가 봄에 그것을 뿌려 가을에 수확하기를 바라듯, 또 건축가가 집을 지을 때 가장 큰 돌을 모퉁잇돌로 놓듯이 자신의 죽음을 그렇게 사용하셨습니다.…… 저는 이제 여러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를 죽인 자는 누구입니까? 로마인들입니까, 아니면 유대의 제사장들입니까?" 로마인들도 예루살렘의 제사장들도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죄악이 그분을 언덕 위 십자가 고통 위에 매단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온 세상이 그분의 보혈의 은혜 아래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주제 사라마구 作, 예수복음

- 칼릴 지브란 作, 「사람의 아들 예수

- 크리스틴 스웬슨 著, 「가장 오래된 교양

- 김용민 著, 「맨 얼굴의 예수」 

 

 

※이외 성경에 관한 읽어본 책들

- 나카노 교코 著, 명화의 거짓말 : 성서편

- 나가오 다케시 著, 「유쾌한 성경책

- 공병호 著, 「공병호의 성경 공부 

 

 

 


 

  1. '상상'이란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성경에는 예수의 '공생'이라 불리우는 삶만 기록되어 있기에 그 이전, 즉 예수의 성장기에 관한 부분들은 온전히 작가의 상상에 의해 창조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의 저자인 백승종 교수는 이러한 역사가의 상상에 대해 <'역사의 경첩'이라 부르기엔 역사를 읽고 쓰는 행위는 일종의 '게임'이다. …… 역사적 상상력이 동원된 게임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상상 게임'이라 불릴 만하다. '상상 게임'을 하는 데는 팩션이 빠질 수 없다. 내가 말하는 팩션은 사실과 허구를 적당히 버무리는 것이 아니다. 허구라 해도 역사적 상상이 빚어낸 허구라 하겠다. …… 역사적 지식을 통해 얻어진 상상이 개입된 허구는 말 그대로의 허구가 절대 아니다. …… 이 경우의 허구란 깨진 청자 조각과 조각 사이를 이어주는 접착제 같은 것, 달아난 부분을 메워 항아리의 원형을 보여주는 보철 같은 것이다.>라 표현했습니다만, 예수의 경우 상상력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너무도! 많기에 역사가가 아닌 소설가들에게도 자신들만의 상상력을 발휘해볼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주제 사라마구나 니코스 카잔차키스 모두, 그들의 신앙이나 가치관과는 관계없이 성경적 지식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펼쳐놓은 상상에 대해 '성경적 무지'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평가는 그리 옳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2. 막달라 마리아.
  3. 얼마 전 출간되었던 「젤롯」이란 책의 '젤롯'이 바로 이 '열심당'을 지칭하는 것이더군요.
  4. 여기서 소설은 다른 제자들 - 열두 명 모두가 등장하지는 않으며, 유다는 위의 이유로 제자로 분류되지도 않는 - 에 관한 이야기도 꽤나 많이 싣고 있습니다만, 한 마디로 그들 모두 진정 신앙같은 성스러운 이유로 예수의 제자가 된 건 아니다라 그려지고 있습니다.
  5.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고통을 위로해 주시고, 모든 상처를 치료해 주십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리 고통과 굶주림에 심하게 히달리더라도,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는 천국에서 만족하고, 우리는 기뻐할 것입니다.(p286)" - 예수의 이 말에 대해 「예수복음」을 읽고 쓴 감상문은 다음과 같지요. :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교를 하게된다면, 자신이 죽고나서도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은 더 행복해질꺼냐 묻는 예수에게 하나님은 또 다음과 같은 대답을 주십니다. "(그들은) 천국에서는 행복을 얻을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될 거야, 나는 천국을 영원히 다스릴 것이고 그들은 천국에서 나와 함께 영원히 살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되지." 하나님의 이 대답을 예수는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이것이 주제 사라마구 자신의 해석이기도 할 듯한) "당신은 사람들이 천국이 아니라 지상에서 당신을 위해 살려고 태어난 것임에도 그들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거로군요, 천국에서는 그들에게 삶의 기쁨을 전혀 주지도 못할 거면서."
  6.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O My Father, if it is possible, let this cup pass from Me : nevertheless, not as I will, but as You will."(마태복음 26:39)
  7. 이와는 달리, 「예수복음」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 순간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희생 제단에 가는 양처럼 꾐에 빠진 것이다. 그의 생명이 처음부터 죽음을 위해 계획된 것임을 알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끝맺음을 그려냈었지요.
  8. 이 책의 <프롤로그>는 작품 전체를 다 읽고난 후에 되돌아가 읽어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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