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약하는 중국 - 천안문 2층에 올라 중국을 보다
정인화 지음 / 북코리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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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4개의 인접 국가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 오래 전부터 세계 최다 인구를 자랑하고 있는 나라. 그뿐 아니라, 현 시점에서의 국제관계 속에서 미국에 대하여 "아니다"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 --- 바로 중국입니다. 

 

1994년 7월 8일, 북한의 김일성이 사망한 날 처음으로 밟았던 중국 땅은, 제겐 그야말로 이해되지 않는 모습들의 전시장과도 같았었지요. 이후 출장, 여행 등으로 중국을 여러 번 가보았었습니다만, 겉으로 보이는 하드웨어적 모습을 뺀 소프트웨어적 모습들은 여전히... 저에게 이해되지 않는 면들이 많았었습니다. 헌데 중국 작가들의 소설을 몇 편 읽고나니, 제가 '이해되지 않는'이라 생각했었던 것들이 사실은 그들을 몰랐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중국 작가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나, 영국 언론인 마틴 자크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등을 통해 그 이해의 부족을 많은 부분 메울 수 있었습니다만, 그 두 권 모두 단편적/한정적인 시대/상황의 중국을 이야기하고 있는 성격의 책들이었던 것에 비해, 이 책 「도약하는 중국」은 그런 점에서 보자면 매우! 다양한 면면들의 중국을 보여주고 있는, 일종의 간략한 백과사전식의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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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그리고 중국인들을 나타내는 여러가지 단어들이 나옵니다만, 그 중... '현실주의/실용주의'라는 단어가 가장 와닿더군요. 중국 하얼빈의 송화강변에 있는 공중화장실을 보고 기겁을 했었던 1994년 저의 기억을, 저자 또한 말해주고 있습니다. 공중화장실에 문이 없다라는 거 말이죠. 이에 대해 한 중국인의 답변이 어쩌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현실주의/실용주의'의 (물론! 매우 극단적이기는 하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문이 달려있으면 사람들이 꾸물대고 잘 나오지 않는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이 화장실 문을 발로 차는 바람에 문이 파손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화장실에 문을 없앴다. --;;)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국의 여러 고사성어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도 있습니다만, 그 중 '동가식 서가숙'이란 말 또한 중국인들의 실용주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중국인의 현실주의를 잘 나타내는 말이 "동가식 서가숙 東家食西家宿"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말이, 오갈데 없이 떠돈다는 말이지만 그 원뜻은 전혀 그렇지 않다. 조나라의 처녀 얘기다. 이 처녀에게 혼처가 나왔는데, 동쪽의 총각은 부자이나 못생긴 신랑이고, 서쪽의 총각은 가난한데, 잘생겼다. 어디로 시집가야할 것인가? 이때 조나라 처녀는, "밥은 동쪽 집에서 먹고, 잠은 서쪽 집에서 자겠다"라고 하여, 실용주의적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 덩샤오핑의 유명한 말인, "흑묘백묘론"이야말로, 실용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말이다.

덩샤오핑에 의해 본격적으로 추진된 중국의 개혁·개방은 이러한 중국인들의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어,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헌데 경제지상주의와 무책임한 개인주의의 이 조합이 지나칠 정도로 현실의 이익만을 강조하는 사회풍조를 낳았다는 것이지요. 이는 결국 개혁·개방 이래 중국 내에 매우 심각한 양극화 문제를 초래하게 됩니다. 1978년 0.18이었던 지니계수가 2005년엔 무려 0.5까지 높아졌지요.

 

 

 

 

 

 (「도약하는 중국」, p 80-81) 

 

 

이에 따라 중국정부는 그동안 추진해 왔던 '선부론(先富論)을 폐기하고 '균부론(均富論)을 채택하게 되는데, 서구에서는 이러한 중국의 급격한 양적 성장을 얕잡아보는 시각이 우세하지만, 마틴 자크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에서와 같이 '양적 성장이 본 궤도에 오르면 질적 성장 또한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된다'라며 극도의 경계를 보이는 시각도 존재하지요. (이러한 중국의 '양적 성장'도 과연 그것이 실질적으로 중국의 경제성장으로부터 나타난 수치인가에 대한 의문도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중국의 8-9%에 달하는 중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중국 내 유치된 외자기업들의 성장률을 빼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주장이 이 책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 나타난 양극화, 민주주의, 민족분열 등의 문제점을 과연 중국정부가 어떻게 해결해낼 것이며, 이 중에서도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중국의 사회주의적 체제와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이냐에 중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저자는 적고있습니다...만! 이와 관련하여,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의 감상문에 써놓았던, 마틴 자크의 주장이 제게는 다시 한번 더! 설득력있게 다가왔습니다.

 

어쨌든 거대한 중국이 이처럼 강력히 경제 성장을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만해도 서구 국가들은 중국의 부상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을 것이다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가정이 깔려 있었었지요. 첫째, 중국의 부상은 주로 경제적인 측면에 한정될 것이다. 둘째, 중국은 적당한 때가 되면 전형적인 서구 국가가 될 것이다. 셋째, 국제 사회는 지금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며, 중국은 주어진 현상을 그대로 따르는 유순한 국가가 될 것이다. --- 허나... 저자 마틴 자크는 이 세 가지 가정이 모두 틀렸다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들이 틀렸다는 근거로 저자는 '중국의 역사'를 들고 있지요.)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는 국가는 반드시 자신의 경제력을 정치적, 문화적, 군사적 목적에 이용하게 되며 이는 중국에게도 예외는 아닐 것이지만, 서구의 시각에서 보아 이러한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상상은 결코 쉽지 않지요. 오랫동안 헤게모니를 장악해 왔던 서구는 자신들만의 가정 속에 갇혀 있기에 다른 기준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보는 항상 서구화의 기준에서만 정의되어 왔으며, 따라서 서구는 개념상 가장 서구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인류 발전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다른 사회는 서구화의 정도를 기준으로 진보의 정도를 평가받아야 한다라 생각하고 있다는 거지요. 저자는 여기서 '맥도널드 버거를 찾는 중국인이 많아졌다고 해서 중국의 음식 문화가 서구화되었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을만치 섣부른 판단이라는 단적인 표현으로 이러한 서구의 시각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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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형상 중국은 한족漢族을 포함한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이지만, 그 중 93%정도가 한족으로 이루어져있는, 실질적인 단일민족국가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역사상 한족이 아닌 이민족에 의해 다스려졌던 건 몽고족인 원나라와 만주족인 청나라 뿐이었지만, (한족의)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분열, 외세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은 외국인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지요. 현재에도 위구르나 티벳의 독립 운동에 대해 중국 정부가 그토록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 그들의 독립을 허용하게 되면 여타 소수민족들의 요구 또한 들어줄 수 밖엔 없으며, 그로 인해 결국 중국은 분열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 저자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일반 사실, 고전, 문화예술 등에 관한 간략한 소개를 담고 있는 1-3부에 이어지는 <중국이 걸어온 길>이라는 제목의 4부야말로, 제가 원했던,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좀 기~일게 정리해봅니다.)

 

중국의 차와 도자기 등을 수입했던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일구어낸 자신들의 상품인 직물이 생각만큼 중국에 판매되지 않아 막대한 무역적자를 입게 됩니다. (중국에는 이미 면이나 비단같은 더 좋은 직물들이 있었으니까요.) 이러한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영국은 이른바 '삼각무역'이라는 것을 통해, 인도에서 재배된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게 됩니다. 1729년에서 1800년 사이 중국의 아편 수입량은 20배나 늘어났고, 1839년 중국의 아편 수입량은 이미 천만 명의 중독자가 사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지요. 이처럼 중국내 빈민층에게까지 확산되어진 아편 중독은 마침내 농촌경제의 파탄과, 이로인한 구매력의 상실을 가져왔고, 관료와 병사들의 아편 중독은 국가의 기능마저 마비시킬 정도가 됩니다. 아편 수입대금으로 지급하는 은의 국외 유출이 커짐에 따라 중국 내 은값이 올랐고, 이에 따라 은으로 조세를 납부해야 하는 농민들의 부담이 증가되어 결국 조세미납사태와 이로 인한 재정궁핍이 초래되기에 이르렀지요. 이 와중에, 중국은 18세기 중엽 이후, 외국과의 무역은 오로지 광저우 한 곳만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제한해왔는데, 영국은 더 많은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기 위해 이에 대한 트집을 잡게 되고, 이 트집의 결과가 바로 아편전쟁(1840)이었으며 이 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은 결국 남경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영국과 맺게 됩니다.


아편전쟁은 --- ①산업혁명으로 원료조달과 해외판매시장을 개척해야 했던 서구 열강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지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일례였고, ②중국에서는 이로 인해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해왔던 중화사상이 무너졌으며, ③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는 굴욕적인 현실을 가져왔습니다만, 역설적으로 ④중국이 근대화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전쟁 패배 직후 중국의 몰락이 시작되었습니다만, 떨어지는 순간 다시 튕겨 올라올 수 있는 바닥이 가까와지는 것처럼, 아편전쟁이 결과적으로 중국에게는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라는 점에서는 이러한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밖엔 없지 않을까요?)

 

아편전쟁의 패배 이후, 중국 내에는 (청나라의 지배계층인) 만주족에 대한 (한족의) 반감이 높아졌고, 이후 '태평천국의 난' 그리고 '중체서용론', '변법자강운동' 등의 개혁운동이 농민·관료·지식인들 사이에서 순차적으로 있었습니다만, 이 모두 부패한 지배층에 의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중체서용론과 변법자강운동은, 청일전쟁 와중에도 '이화원'이라는 별장을 만들었던 서태후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더군요. 현재는 이러한 과거를 훌륭한 관광명소로 탈바꿈시켰다라는 이 아이러니는 세계 역사에서 일관되게 보여지고 있는 듯. --;;)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청조가 무너지고, 손문 등에 의해 중국최초의 공화정부가 들어섰지만, 오래지않아 이 역시 원세개를 중심으로 하는 북방 군벌 세력들에 의해 무너졌고, 1915년 원세개는 다시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왕정복고를 시도합니다. 이후 1차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이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청도를 물려받으며, 중국정부에 새로운 '21개 조항'을 요구하자, 북경의 대학생들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반일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5·4 운동'으로 불리우는, 중국이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지요.

  

(열강에 항거한 애국적 저항운동이라는, 우리의 '3·1 운동'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이 '5·4 운동'이 왜 중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느냐는, 이 운동으로 인해 현재 중국의 국가체제가 정립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 당시 '5·4 운동'을 이끌었던 인물들로 하여금, 열강들의 계속되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경험을 통해, 그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 대신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게 만들었고, 이 때 채택된 체제가 지금까지도 중국을 이끌어오고 있다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입니다. (이것이 저자만의 해석인지, 학계에 널리 퍼져있는 해석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이 책을 통해 제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습니다.)


5·4 운동 이후 1919년 결성된 장개석 중심의 국민당과 1921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은 그 이념의 대립으로 많은 갈등을 겪는다. 손문이 죽은 후, 그 뒤를 이은 장개석은 북쪽의 북벌세력을 견제하는 동시에 공산당까지 토벌한다. 그 결과 공산당의 홍군은 국민당 군대에 쫒겨, 12,000km 에 이르는 이른바 '대장정'을 감행하며 1935년 옌안을 새로운 활동의 거점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중일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일본이 1930년 세계 경제 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부가 재벌과 손잡고 대륙침략에 나선 것이 원인이었다. 일본 육군은 만주지역을 침략하여 괴뢰 만주국을 세운 후 다시 1937년 중국침략을 감행한다. 그 후 난징으로 쳐들어간 일본군이 민간인을 대략 학살하고(난징대학살), 왕자오밍을 주석으로 하는 친일정권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1937년 결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다시 손을 잡고 (2차 국공합작) 항일전쟁에서 일본의 항복으로 승리하게 된다. …… 항일전쟁에서의 승리 후, 각각 중경과 남경에서 국민당과 공산당대표가 협상을 벌인 끝에 장개석은 대만으로 후퇴하고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만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국민당이 중국을 집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국민당 군대는 공산당 홍군의 근거지인 연안을 포위하여 마지막 타격을 가하기 직전, 중일전쟁이 발발하였고 따라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합작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마오쩌둥은 '공산주의'를 중국의 공식 이념을 채택합니다. 마오쩌둥의 자력 갱생적 경제발전전략은 (당연한 이치겠지만) 평등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한솥밥을 먹으며 공동노동, 공동분배를 통해 자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공동체의 형성이 마오쩌둥이 추구했던 이상적이 사회였었었지요. 이를 위해 그는 철저한 당의 지도로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게 함으로써, 사회주의적 평등을 이룩하려 했었습니다. 이처럼 '공산주의'의 기본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는 있었습니다만, 마오쩌둥의 공산주의가 가졌던 소련 공산주의자들의 그것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바로 노동자가 아닌 '농민'들의 역량을 조직화해내는 데에서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을 찾으려 했다라는 것이었지요. 이를 '마오이즘'이라고 부르는데, 한 마디로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쯤이라고나 할까요?

 

중국은 반식민지 반제국주의 투쟁, 장개석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간의 내전과 항일투쟁을 거쳐,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이래, 사회주의적 개조와 경제개발정책을 통해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 말과 1060년대 초에 걸친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중국은 경제위기에 봉착하게 되고, 중국지도부 내에서는 노선갈등을 겪게 된다. …… 300만 명의 아사자를 내면서 비참하게 끝난 대약진운동은 사실 미오쩌둥이라는 독재자의 무모한 경제계획이 빚은 결과였다. …… 마오쩌둥의 권위는 실추되고 주석 자리도 류사오치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러한 노선투쟁과정에서 마오쩌둥은 '홍위병'을 동원하여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문화대혁명을 전개한다. …… 문화대혁명은 1966년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딛고 권력을 정비하려고 일으킨 정치투쟁이었으나 '문화'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었다.  …… 1966년부터 마오쩌둥이 사망하는 1976년까지 10년 동안 계속된 이 문화대혁명을 통해 지식인, 자본가 등은 큰 고초를 당하게 된다. …… 지식인은 비판과 자아비판을 하고 농촌과 공장으로 내려가야했으며, 돈을 버는 것은 죄악으로 취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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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개인적으로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점을 논하는 것이, 2014년 현재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차이는 지금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시대에 따라 혹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관점의 변화에 따라 적지않은 중요성을 가진, 의미있는 논쟁을 낳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의 중국의 경우가 바로! 그렇지요.

 

중국이 개혁·개방을 통해 자본주의 국가보다도 더한 자본 중심의 국가로 변해있는데도, 왜 여전히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는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해 '바로 소유제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근본적으로 개인은 부동산 등의 사용권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 소유권은 여전히 국가에게 귀속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규정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국을 자본주의적 성격이 짙은 국가로 변모시킨 출발점이 되었던 '개혁·개방'은 경쟁과 물질적 보상을 통해 생산성과 능률을 높이려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는데, 이 개혁·개방의 아이콘이 바로 마오쩌둥 사후에 중국 권력의 핵심으로 재등장했던 덩샤오핑이었었지요.

 

마오쩌둥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에 반대하는 현실주의 정책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말미암아 초래된 최악의 경제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였습니다. '혁명적 정열에의 의존과 심리적 보상에 의한 생산력 발전운동'이라는 마오쩌둥의 사상이 현실적 한계를 드러내자, 덩샤오핑은 '경제적 유인과 과학지식'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주장합니다. 마오쩌둥 사후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사회주의적 제도에 시장 법칙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개혁을 펼치기 시작하는데, 그는 마오쩌둥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에서 ('흑묘백묘론'으로 대표되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급선회 하며, 사상해방, 실사구시를 통해 공산주의를 중국의 실제 상황과 결합시키겠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개혁·개방 정책을 이른바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로 규정하였지요.  

 

경제체제개혁, 대외개방 및 기업활성화 등을 수단으로 했던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은, 하지만 정책오류로 인하여 인플레이션, 실업, 부패, 범죄 등 사회주의체제에서는 사뭇 용인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낳게 되었고, 이에 맞서 덩샤오핑은 '정치에서는 통제, 경제에서는 자율'이라는 이른바 신권위주의 체제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는 또한 인권, 언론자유, 다당제, 선거 등 정치적 자유화를 요구했던 국민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사회주의는 '신념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지요.

 

하지만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의 추진의 가장 큰 오점은, 그가 주장했던 선부론(先富論) 오히려 지역/계층간의 격차만 더욱 벌려놓고 말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러한 격차와 여전히 요원한 정치의 현대화에 대한 중국 국민들의 불만이 점차 쌓여가게 되지요. 중국의 지도자들 중 이러한 국민들의 불만을 인식하고, 민주화의 필요성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이가 바로 후야오방이었는데, 그는 그러한 이유로 1987년 실각되었다가 1989년 4월에 사망합니다. 천안문 광장에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대학생들을 위시한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었는데, 여기서 보통선거, 다당제 등에 관한 요구가 분출되자 중국 지도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천안문 광장에 모여있던 군중들에 대해 발포를 명령합니다. 이로인해 자오즈양 총서기가 해임되었으나, 그 후임에 민주화 운동 확대를 저지했다고 평가되는 장쩌민이 총서기로 취임하게 되지요. (이후의 중국 정치체제에 대한 설명은 복잡하기도 하거니와, 별로 흥미롭지도 않아 대충대충 읽었기에 따로 정리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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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재난'이라고까지 평가된 문화대혁명을 이끌었던 마오쩌둥. 그의 사상이 덩샤오핑 시대를 지나 현재에도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이유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마오쩌둥의 사상은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정책이 시행된지 10여년 만에 재평가되어져야 할 만큼 그 생명력을 지속한다. 개혁.개방 정책에 따른 중국국민의 정신문제오멸문제, 관료의 부패 문제, 그리고 새로운 계급 구조의 형성 등은 바로 마오쩌둥 사상이 가장 경계하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 p376

저자는 경제효율을 높이는 개혁·개방을 확대하되, 민주주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하는 고민, 즉 개인의 자유, 인권, 정책결정의 투명성, 다당제, NGO, 권력분산, 자유언론, 법의 지배 등으로 표현되는 서구적 민주주의의 도입 요구에 대해 중국 지도부가 과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하는 딜레마야말로 현재 중국이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당면 과제라고 설명하며 이 책을 마무리 짓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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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도약하는 중국」에 대한 감상문이라기보다는, 중국에 대한 공부를 위해 남겨놓는 저의 정리라 생각하며 이 포스트를 썼습니다. 그래서 많이 길어졌죠. --- 무척!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리 어렵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지나치게 수박 겉핥기식도 아닌, 나름 일반인에게 이 정도면 중국에 대한 개관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정도라 말해도 될만큼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었습니다...만!!!

 

제가 쓰는 블로그에 올리는 글도, 다 쓰고 나면 두 번정도는 다시 꼼꼼하게 읽어봅니다. 어색한 표현은 없는지, 틀린 글자는 없는지, 중복된 내용은 없는지 등등을 확인하고자 함이지요. 개인 블로그에 올리는 글도 이 정도의 확인이 되건만! 돈 받고 팔 목적으로 내놓은 책이 이렇게 형편없는!!! 편집과 교정·감수를 해놓았다라는 걸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수도 없이 발견되는 오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는 주요 연도마저도 1800년대와 1900년대를 틀리게 적어놓는 등, 이외의 통계수치들이나 연도들에 대해서도 심각한 의문을 가지고 받아들이게될 수 밖엔 없었던, 이해를 돕기 위해 실려있는 사진들이 어디 인터넷에서 대충 복사해와 붙인 것 같은 조악함은 오히려 애교로 보여지기까지 했던... 그런 심각한 문제점을 아니지적할 수 없네요.

 

이런 출판사의 무능·나태 뿐 아니라, 책의 내용도 군데군데 자신/타인의 저작에서 짜집기해 붙여넣어놓다보니 표현/내용의 반복이 어느 부분에서는 짜증마저 자아낼 정도로 나타나고 있는데, 솔직히 이는 저자의 무관심/조급함에서 비롯되었다라고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좋은 내용들이... 이런 부실한 외피에 가려지는 것이 참 많이 안타깝게... 만 여겨졌네요.

 

다시 한번 쓰자면, 이러한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책의 내용 자체는 중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이 책을 읽고 마틴 자크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을 읽었었다면, 그 책을 훨씬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지 않을까 싶을 만큼 말이죠. 중국의 과거와 현재... 는 이래저래 - 소설을 이해하기 위함이건, 혹은 현재의 국제 정세를 이해하기 위함이건 -  저에게 상당한 흥미를 던져 준다는...

 

 

 

★본문과 각주에 소개된 책들의 감상문   

- 위화 著,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마틴 자크 著,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 Ji Li Jiang 著, Red Scarf Girl

- 장안거 著, 붉은 땅의 기억

- 류전윈 作, 1942년을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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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9-0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글을 정독했습니다.남께서 책을 인용한 부분을 보니 저자 정인화 씨가 대장정과 2차 국공합작, 그리고 마지막 국공내전에 대해서 순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서 알려드리고자 합니다.이런 뒤죽박죽이 된 원인은 장학량이 장개석을 사로잡은 서안사변의 시기를 넣지 않고 있어서입니다.대장정 끝나고 공산당이 연안에 정권 수립-장개석의 국민당이 소탕작전 실시-장학량이 장개석에 반기 들며 서안사변(1936년 12월 12일)발발-국공 교섭-항일을 위한 국공합작 성사 그리고 난 다음에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의 노구교 습격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납니다.즉 중일전쟁 이전에 2차 국공합작이 성사된 겁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도 국공 간 교섭이 결렬되고 대규모 내전이 몇 년 간 일어난 다음 장개석이 대만으로 쫓겨갑니다.저자는 이 대규모 내전을 빼고 서술했군요.역사에 대해 서술할 땐 사건의 선후관계가 파악되지 않으면 독자가 헷갈리게 됩니다.저자가 아무래도 중국 근현대사 자체에 대한 기본 지식을 파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살가죽 2014-09-06 17:25   좋아요 0 | URL
정성스런 덧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단... 저자가 잘못 기술했다 단정짓기보다는 제가 인용을 잘못,. 혹은 지나치게 압축해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라는 걸 먼저 말씀드리고 싶네요.

지금은 다시 확인할 수 없기에, 며칠내로 다시 확인해보고 답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4-09-06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랬군요. 답글을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