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외삼촌 - 한국전쟁 속 재일교포 가족의 감동과 기적의 이야기
이주인 시즈카 지음, 이정환 옮김 / 서울문화사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프리퀄'이라 불리우는,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감각/경로를 통해서든 바라보게 되는 '과거'에 대해, 일반적으로 우리는 일종의 우월감과도 같은 감정을 갖게되곤 합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그저 사용하는 자의 입장에서 가져보게되는, '이렇게 편한 게 없었을 땐 대체 어떻게들 살았었을까?'하는 의문이 그 단적인 예이지요. 사실! 우리는 '이게 없었을 땐'의 다음에 '대체 어떻게들 살았었을까?'라는 의문이 아닌, '이런 걸 만들어낼 생각을 대체 어떻게 했었을까?'라는 감탄을 가지는 것이, 우리보다 먼저 살다 가셨던 그 모든 분들을 향해 가져야할 합당한/당연한 예의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성공한 사업가 소지로의 아들 다다​하루는 아버지의 바램과는 달리 가업을 이어받지 않으려 한다. --- 이 소설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즉, 우리는 소지로라는 사람이 현재(에도 살아있는) 성공한 사업가이고, 그의 아들 다다하루가 청년이 되어있는 지금까지도 그의 사업은 여전히 번창하고 있다라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채!... 아버지 소지로의 최측근이었던, 지금은 은퇴한 ​시미즈 겐조라는 사람에게서 다다하루가 (또한 독자가) 듣게되는 아버지의 옛 이야기들이 바로, 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겁니다. 현재를 만들어낸 프리퀄을 펼쳐내보이는 일종의 액자소설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상황이 이 작품의 이야기를 읽어가는 동안 극적 긴장감을 저해한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알아서... 독자가 가져야할 합당한/당연한 예의를 알아서 구비해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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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2세인 작가가 자신의 아버지의 실제 삶을 소설로 재구성한 작품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한국전쟁 속 재일교포 가족의 감동과 기적의 이야기'라는 표지의 문구는, 게다가 '아버지와 외삼촌'이라는 이 작품의 제목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들간에, 누가누가 더 안 어울리나 시합이라도 하는듯한 느낌을 얼핏 같게도 해주지요. 한국전쟁과 재일교포가 과연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게다가 어머니와 외삼촌도 아니고 '아버지와 외삼촌'이라니!!!

<주요 등장인물>​

소지로 (아버지) : 일제시대에 가난을 못이겨 일본으로 넘어 온 조선인

요코 : 소지로의 부인. 그녀의 부모 역시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온 재일교포

다다하루 : 소지로와 요코 사이에서 낳은 아들

​고로 (외삼촌) : 요코의 남동생

가네코 마사히로 : 요코와 고로의 아버지.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인 사장 밑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매우 인간적인 인물​

'처남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위험까지 감수하며 일본에서 밀항선을 타고 한국의 전쟁터로 향한 아버지의 이야기' --- 출판사에서 적어놓은, 이 작품의 줄거리이며, 무려 633 페이지가 되어서야 끝이 나는 이 소설의 줄거리는 또한 이것이 전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줄거리 자체가 별 것 아니라는 말은 아니구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흥미있는 줄거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작가가 재일교포 2세라는, 즉 최소한 그에게 대한민국의 피가 섞여는 있다!라는, 되도 않는 동류의식으로 이 소설을 바라보지는 않겠다라는 편견 아닌 편견을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이 작가가 '나오키 상' 수상자라는 사실을 굳이 모른다 할지라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무척이나 잘 읽히는 소설이라는 건 아마도 이 작품을 읽어본 분들이라면 대부분 선뜻 동의할 거라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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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는 맨 처음 이도령을 보았을 땐 별로 맘에 들지 않았었어요.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춘향이의 눈에 보이는 이도령의 행동이나 말투는 춘향이로 하여금 이도령을 싫어하게까지 만들기도 했었었지요. 한편 이도령은 춘향이의 외모에 한 눈에 반하기는 했지만, 기생의 딸이라는 그녀의 신분이 짐짓 마음에 걸렸더랬어요. 그랬던 그 둘이... 어떠어떠한 일들을 겪어가며, 결국엔 서로의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었답니다! :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간단하게 표현해보자면 딱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투적'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조차 상투적이기만 한 내용을 가진 이 작품을 위대하게 만들어 준 건 다름아닌 '어떠어떠한 일들을 겪어가며'라는 그 (사랑의) 진행과정에 있는거지요. 춘향이가 기생의 딸이고, 이도령은 엄친아라는 설정은 그저 그 진행과정에 필요한/사용되어지는 도구에 불과할 뿐인겁니다. --- 이런 관점으로 이 작품 「아버지와 외삼촌」을 걸러내어보면, 제 생각에, 결국 남게 되는 두 가지는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싶네요.

● 주인공 소지로는 장인,장모 그리고 처남을 일본으로 데려오기 위해, 6·25 전쟁 와중에 일본에서 남한으로 혼자 몰래 밀입국 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처가집을 찾아간 소지로는 현실적으로 그들을 일본으로 데려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방법을 제외한 최상의 방안이라 생각되는 것을 결국 힘겹게 모두 실행에 옮겨내지요. 여기서 자신의 목숨까지를 내던졌던 그의 행동은 '가족의 강한 인연과 사랑' 이라는 단어로 표현되고 있지요. 또한 책의 뒷표지에도 '당신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문구가 적혀 있듯이, (최소한) 출판사는 이 작품을 그 '가족의 강한 인연과 사랑'이라는 주제로 표현해내고 싶었던 듯 합니다만, 물론 그러한 의미가 충분히 작품 속에 담겨져 있기도 합니다만!!!

​사실... 주인공 소지로가 자신의 목숨까지를 걸어가며 처가 식구들을 일본으로 데려오기 위해 한국으로 갔던 이유를 선뜻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적 감성에 기반을 둔다면) 자신의 엄마가 살아계심에도, 친모를 제쳐두고 장인·장모·처남만을 전쟁 중이었던 한국땅으로부터 탈출시키려 한다는 설정은 더더욱이 피부에 와닿지 않았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한 번쯤 읽어볼 만한'이란 수식어를 붙이게 되는 건, 이러한 스토리를 통해 작가가 ('가족애'보다 훨씬 더 무거운) '조국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더 나아가서는 '사상이란 사람의 삶에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서까지도 (그 '가족애'와 연관지어져) 읽는 이로 하여금 진지하게 고민해볼 것을 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일본이 미국에 항복을 하고 나자, 일본이 통치하는 상황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인, 대만인, 중국인 등이 일본 전역에서 독립과 관련된 조직을 만듭니다. 물론 일본은 어수선해졌지요. 이런 상황을 바라보는 요코는 "국가가 패전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리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라 말합니다. '국가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던, 즉 국가는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그녀를 통해 이렇게 작가는 독자에게 '국가란 과연 무엇일까요'라는 첫 질문을 던져주지요.

 

이 '전형적인 스토리의 이민사'는... 이것이 실제 오래전이지도 않은 우리의 선조들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 사실이었었으며, 그들이 그러한 삶을 살았어야 했던 이유는 오로지 그들이 '힘없는 나라'의 백성이었기 때문이었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쁨이 기쁨으로, 슬픔이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 감정 이전의 상태. 그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사는 체념의 모습"으로 살아갔던 그들 멕시코의 조선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갈구하며, 자신들을 먼 이국 땅으로 보냈던 그 조선으로 다시 돌아가길 꿈꾸었지요. 도대체... '조국'라는 게 무엇이기에 그들은 떠날 때의 마음과 달리 자신들의 나라, 조선으로 되돌아가고가 했었을까요. 

「에네껜 아이들」이라는 책을 읽고 썼었던 감상문의 일부입니다. 이제 우리는 '국가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변형시켜 '조국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닿게 됩니다. 다음에 인용해 놓은 ① 요코의 아버지인 마사히로를 통해, 그리고  ② 한국전쟁 당시 이 땅에 살아야했던 국민들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일반 민초들이 가졌었던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엿볼 수 있지요.

① ​"처음에는 속국의 국민이었지만 새로운 법 덕분에 우리는 신 국민으로 받아들여졌어. 나는 조국을 버리고 복종하라는 말을 하는 게 아냐. 일본은 동아시아를 장악하고 있는 나라야. 이곳에는 조국과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가족도 구성할 수 있고,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일본의 교육도 받을 수 있어. 우리는 새로운 국민이야." 아버지는 자신이 직접 그것을 실천해왔다. 요코와 고로도 일본인으로서 교육을 받게 했고 일본식 생활습과도 자진해서 가정에 도입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버지의 긍지이기까지 했다.

② ​북한군의 서울 점령에 서울 시민들의 대응은 여전히 마치 일제시대의 그것마냥 '대한민국이 옳으냐, 인민공화국이 바르냐', 따라서 '대한민국을 따르느냐, 인민공화국을 좆느냐'하는 확고부동한 태도가 서 있지 않고 결국은 어느 쪽이 이길 것이냐, 그럼 어느 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냐, 그보다는 당장 어느 쪽인 척해두는 것이 우선 위험도 모면하고 나중에 가서도 말썽이 없을 것이냐였었다고 저자는 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의 목숨앞에선 이념 자체의 선택이 아닌 생존 선택에의 도구로서 이념이란 것이 작용했었다는 것이죠. 이는 '어느 쪽 이념은 인간을 살리고 어느 쪽 이념은 인간을 죽이는 게 아니기에 무지렁이 민중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자의던 타의던) 선택된 체제에 길들여지기 마련이었다'란 문구에서도 확인되는 바입니다.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의 감상문 중

대한민국 진보의 가장 큰 약점은 '종북'이고, 대한민국 보수의 가장 아픈 곳은 '친일'이라고들 하지요.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해 틀린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종북은 진보에 몸담고 있는 정치·문화 권력들의 약점인 것이고, 친일 또한 보수에 몸담고 있는 정치·문화·경제 권력들의 아픈 곳인 것이지, 위의 두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결코! 자신을 진보던 보수이던 그 어느 편도 아니라 말하던간에 일반 민중에게는 약점도, 아픈 곳도 아니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일제시대 당시, 그 상황이 언젠간 끝이 나리라 생각했었던 무지렁이 민중이 있었을까요? 당장 내가 먹고 살 일이 걱정인데, 창씨개명 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라는 판국에 국제정세와 국내정치를 분석해 일제 치하가 언젠가는, 어쩌면 곧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요구할 권리가 그 누구에게라도 있었던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아보이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당위의 문제를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만, 그 당위의 문제가 결코 일반 민중들의 몫은 아니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①에 나와있는 마사히로의 생각과 말을 저는 비난할 마음이 전혀 없으며, 또한 그러하기에 한국전쟁의 한복판에서 고로가 보여주었던 행동들 또한 ②번의 이유로 하여 비난할 수 없었었지요.

오덕은 북한군에 가담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 전쟁을 시작했는지 알 수도 없었다. 다만,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다는 공산주의의 주장이 진실인지, 이 나라 사람들을 정말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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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다르다는 이유로 재일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로부터 보이는/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는 같은 민족끼리도 서로를 죽이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했지요. 이쯤 되면... 도대체 조국이란 것이 무엇인지, 사상이란 건 또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물론... 저 또한 이 두 개의 질문에 대해 완성된 해답을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러하기에... 이 소설은, 이야기가 주는 재미의 차원을 떠나, 그 누구에게든 '한 번쯤 읽어볼 만한'이라는 수식어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봤던거지요. 결국! 이 작품 또한 '소설'이라는 외피를 하고는 있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끄집어 내야 할 것은 '소설의 줄거리'가 아닌, '작가의 질문'이라는 겁니다. (물론 제 블로그에 제가 쓴 감상문이기에 이는 전적으로 저만의 생각입니다.)

 

이승만도 김일성도 사람의 아들일 거예요. 아버지도 있을 테고 어머니도 있겠지요. 부모님이 있는 사람들이 왜 우리 민중을 이렇게 슬프게 만드는 것일까요.

​한국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에 있던 한 한국인 노파의 탄식입니다. 사상, 제도, 정치... 이 모든 것들은 사실 민중, 더 나아가 만인의 더 나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생겨난 것들임에도, 민중들은 오히려 그것들 때문에 고통을 받고있는 거지요. ---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야 모두 같은 '조국'을 가지고 있으니 그 문제야 그렇다쳐도, 각기 다른 스펙트럼의 '사상'을 가진 채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었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니, '도대체 사상이란 게 무엇이기에'라는 질문 한 번 가져보지 않은 채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었었다라는 게 문득... 많이 창피해지더군요. 진보이건 보수이건, 그런 사상들이 나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채 주장하는 나는 진보이다, 나는 보수다라는 말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하는, 이 근본적 질문을 늦어도 너무 늦게, 이제서야 가져보게 된겁니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전하고 있는 메세지가 '조국이란, 사상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유일한 정답은 될 수 없겠습니다만, 일반 민중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하게 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써 지금 당장엔... 이 이야기보다 더 설득력있는 것을 저 스스로 생각해낼 수 없다라는 고백으로 이 소설의 감상문을 마치겠습니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돈이 필요하지만, 결국엔... 그 돈으로 인해 불행해지게 된다라는, 그 모순과도 같이 어쩌면... '사회'의 일원로서의 개개인이 선택하게 되는 '사회적 합의' 혹은 그 '사회적 합의로서의 사상'으로부터 발생되는 갈등 또한... '사상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가장 상위의 의문에 대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만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도 싶네요.

(왜 일본으로 건너갔었느냐 묻는 고로의 질문에 대한 소지로의 대답) 그 이유는 간단해. 살기 위해서야. …… 그것밖에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어. 장인어른도, 그 염전에서 일하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을 거야. 살기 위해 새로운 세계가 필요했던 거야. …… 나는 그렇게 생각해. 살아 있으면 희망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 …… 나는 어려운 말은 몰라. 공산주의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인지, 미국이 가지고 온 민주주의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어. 하지만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족이라는 사실은 알아. 전쟁터에서 자네가 무엇을 보았는지,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그러나 사람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사람의 손에 죽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냐.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지. 그것도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가 아닐까...

 

※ 본문에서 인용되었던 포스트들

- 문영숙 作, 「에네껜 아이들」​ : 구한말, 멕시코로 팔려갔던 조선인들의 이야기

- 강준만 著,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에 관한 거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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