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기억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그거 어쨌지? 거기 두었을 텐데." "자동차 키요? 아까 식탁 위에 지갑하고 같이 있던데.' …… 잔소리가 좀 많긴 해도 아내는 고마운 존재다. '그거' 혹은 '거기' 하는 것만으로도 대화가 통한다.

마흔아홉 살의 광고회사 영업부장 사에키는 요즘 들어 이처럼... 뭔가를 깜빡!하고 잊어버리는 상황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아내하고야 이처럼 '그거' 혹은 '거기'만으로도 대화가 이어질 수 있기에 별 문제가 없지만, 회사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종종 커다란 실수로 이어지기도 하지요. 중요한 거래처와의 약속... 그 날짜가 바뀐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적도, 심지어는... 업무상 나누었던 대화내용까지도 전혀 기억을 못하는 일들이 생기자 사에키는 매우 당황하게 됩니다.

그저 과로로 인한 단순하고도 일시적인 스트레스성 질환이라 생각하였으나, 병원 진찰 결과​ '약년성 알츠하이머'의 초기상태라는 판명을 받게 되지요. 이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발생하는 알츠하이머 병을 일컫는 말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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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내 나이조차 잊어먹기 일쑤다. 어쩌다 나이를 기입할 일이 생기면 펜을 멈추고 생각할 때가 있다. …… (또한) 요즘에는 휴일에 어떤 차림으로 외출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할 때가 많다. 티셔츠의 아랫단을 바지 속에 넣고 다닐 만큼 아저씨는 아니지만 …… 깃 달린 셔츠를 바지 밖으로 꺼내 입는 젊은이 스타일에는 영 적응이 안 된다. ……그래서 휴일에도 나는 양복을 꺼내입는다. 나한테는 가장 마음 편한 옷이다. …… 회사에 갓 취직했을 무렵에는 넥타이를 푸는 순간 본래의 내 자신으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다. …… (그리고) 언제부터일까. 리모컨을 쥔 손등에 늙은이의 상징인 검버섯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그렇게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이 이미 (물론 알츠하이머에 걸리기에는 젊은 나이겠지만) 적지 않은 나이의 중년 남성이라는 것을 그렇게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한 번 어떤 것에 신경을 쓰다보면, 생활의 모든 것이 '그것'때문이라 생각하게 되듯이, 그 또한 그가 이제껏 회사에서 써오던 데스크톱이 수명을 다해 새로운 노트북으로 교체되었을 때, 자신이 이제껏 써왔던, 하지만 지금은 버려진 그 데스크톱을 보며 그것이 마치 자신의 인생인양... 하는 생각을 해보게도 되지요.

새로운 노트북이 왔다. …… 자리만 차지하고 말썽만 일으킨다며 평판이 나빴던 나의 데스크톱 컴퓨터는 '폐품'이라는 쪽지가 붙여져 통로에 내놓아져 있었다. 누가 썼는지 쪽지 구석에 이런 낙서가 적혀 있다. 'good-for-nothing' - '쓸모없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기억력의 감퇴에 그는 자신의 하루하루를 꼼꼼하게 적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내, 바로 며칠 전 자신이 그 비망록에 써놓았던 것까지도, 심지어는 비망록에 기록했다라는 사실 자체까지도 잊게 되는 지경에 이른 사에키와 그의 아내 에미코는 생활의 모든 것을 알츠하이머의 치료에 도움되는 쪽으로 바꾸어 갑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사에키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에의 공포가 다가오지요.

​알츠아이머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 다. 언어나 사고에 이어 몸의 기능마저 앗아가버린다. 몸이, 살아가는 방법, 삶 자체를 잊어가는 것이다. …… 밤이 오는 게 두려웠다. …… 어둠이 두렵기 때문이다. …… 정적마저도 두려웠다. 어둠과 정적은 내게 죽음을 연상시켰다. …… 지금껏 살아오면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없었던 것 같다. 젊을 때는 죽음을 그다지 두려운 존재로 여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때까지의 인생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내 앞에 가로놓인,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던 인생이 더 두려웠는지 모른다.  …… 죽음을 의식하게 된 것은 (딸) 리에가 태어났을 무렵부터다. 자식이 생기면 왜 그런지 인간은 자신의 수명을 역산하게 되는 모양이다. 이 이아기 스무 살이 되면 나는 몇 살? 이 아이가 지금의 내 나이가 되면? 나는 몇 살까지 이 아이의 인생을 돌봐줄 수 있을까.

​딸 리에는 결혼을 곧 앞두고 있는데, 사에키는 자신의 발병을 딸에게 감춥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 공포까지는 감출 수 없어, '내일 아침이 되면 딸의 얼굴을 못 알아볼지도 모른다'라는 두려움에 마주앉은 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하며, 자신의 손주가 여자아이라는 것까지도 혹시나 잊을까 하여 수첩에 적어놓아야만 하는 지경이 되고 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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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진행은 이제 사뭇 '뻔한' 과정을 밟아갑니다. 딸의 결혼식때까지만이라도 남들에게 자신의 발병 사실을 숨긴 채 회사에 남아 있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마음, 그렇게 하루가 다르게 점점 심해지는 기억상실에 대비해 딸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주인공의 행동... 그런 것들을 보며 함께 가슴 아파해하는 것이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가져야 할 유일한 예의어린 준비물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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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 나는 열의 없이 쑤석거리던 그라탱 속에서 호박 덩어리를 파내 걸신들린 양 먹어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딸의 얼굴을 기억해 내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호박만 전부  골라 먹고, 입가에 미역을 질질 흘리며 개펄 냄새나는 해초 샐러드를 볼이 미어져라 입에 넣었다.

결국... 주인공이 부인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것으로로 끝맺음되고 있는 이 작품은 그렇게... 별 특별한 스토리도 없는, 더 솔직하게는 제 취향에 딱 들어맞는다 말할 수도 없는 소설이었습니다만 문득... 한 가정의 가장으로,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난, - 주인공이 딸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그것이 효력이 있는지조차 불분명한 호박을, 그리고 해초를 먹는 장면을 묘사한 위의 부분을 읽으며 - '난 과연 무엇을 얼마나 그런 (타인과의 관계로 존재하는) 나를 지켜내기위해 노력했었었던가'하는 생각을 해보게 만들어주더군요. 

이처럼 자신의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노력은 사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회사에 피해를 주게 될까봐, 아내에게 짐이 될까봐, 또한 딸의 결혼식에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론 손녀의 얼굴, 그리고 손녀를 처음 안았을 때의 감촉을 잊지 않기 위해... 서였었지요. 결국... 자신도 이 세상에 처음 선을 보였었을 때에는 지금 자신의 손녀마냥 주변을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였었었으나, 이제는 '쓸모없음'의 딱지가 붙어 있는, 게다가 주변에 피해만 주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 이후, 그나마 그 피해를 남들에게 안겨주지 않기 위한 노력들일 뿐인겁니다.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자신 스스로로부터가 아니라,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버지, 그리고 누군가의 아들'... 로 더 먼저 규정짓게 되는 40-50대의 남자. 그런 그가... 자신의 기억을 잃어간다라는 것조차에서도 결국엔 자신에게 주어져있는 '타인과의 관계'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라는 거. 그게... 정녕 남의 일로만 보이지는 않...더군요. 어느덧! 50이란 나이가 40이란 나이보다 더 가까워져 있는 지금, 말이죠. --;;

두려웠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이. 기억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보다 구체적인 공포였다. …… 두려웠다. 기억을 잃어간다는 사실이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 기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것을 잃어가고 있는 나는 뼈저리게 실감한다. 기억은 결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고 확인하는 것이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소중한 약속이 되기도 한다.

 

 

 

 

 

 

(읽어본) 오기와라 히로시의 다른 작품들 :   소문」 · 타임 슬립」 · 「네 번째 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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