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 홍신 세계문학 7
존 스타인벡 지음, 맹후빈 옮김 / 홍신문화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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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소설이란?

 

실제의 역사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특정의 실존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을 재창조 또는 재현한 소설. 역사로부터 빌려온 사실과 소설적 진실성을 지니는 허구를 접합하여 역사적 인간의 경험을 그 의미를 부각시키는 보편적 인간의 경험으로 전환하는 문학양식이다. 이러한 전환에 필요한 작가의 상상력이나 의도를 조절하는 주제는 역사적 사실을 변형, 수정, 가감하는 기준이 되므로 고정된 소재로서의 역사적 사실이 다양한 모습으로 재현되는 이면에는 늘 작가의 역사관이나 세계관이 매개변수로 존재한다.

- 출처 : 네이버 <국어국문학 자료사전> 중 일부 인용

"특정의 실존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을 재창조 또는 재현한 소설'이라는 역사 소설의 기본된 정의를 따른다면, 이제껏 제가 읽어보았던 '역사 소설'은 바로 이전에 읽은 「왕자와 거지」이외는 없지않나 싶습니다(「무정」과 「황제를 위하여」가 역사 소설의 범주에 속할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건 제 능력 밖의 일인듯). 그래 이왕 이 쪽 소설을 읽어본 김에 한 권 더.의 역사 소설을 읽어보기로 했지요. 그 만만치않은 두께에 읽고 싶은 마음관 달리 선뜻 읽으려 집어들기를 계속 미루어만 두었던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가 바로 그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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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의 대공황(Depression of 1929) 또는 1929년의 슬럼프(Slump of 1929)라고도 한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街)의 ‘뉴욕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대폭락한 데서 발단된 공황은 가장 전형적인 세계공황으로서 1933년 말까지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여기에 말려들었으며, 여파는 1939년까지 이어졌다. 이 공황은 파급범위 ·지속기간 ·격심한 점 등에서 그 때까지의 어떤 공황보다도 두드러진 것으로 대공황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것이었다.

- 출처 : 네이버 <두산백과> 중 일부 인용

소설 「분노의 포도」는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경제를 강타했던 1930년대 '대공황' 시대의 미국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경기의 싸이클이라는 게 뭔 올림픽 폐막식처럼 몇월 몇일날의 정해져 있는 끝이 있는 건 물론 아니겠습니다만, 이 소설은 (이걸 우연이라 해야할지 모르겠으나) '우연히'도 일반적으로 대공황이 끝났다라 일컬어지는 바로 그 해인 1939년에 출간되었더군요. 소설 「왕자와 거지」가 왕자와 거지라는 극단의 사회적 계층이 바라본 당시 16세기 영국의 '일반적인' 사회상을 묘사하고자 하였다라면, 이 소설 「분노의 포도」는 '대공황'이라는 특별한 변수가 없었었다면, 그냥 그렇게... 이제껏 살아오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었던 평범했던 한 가정이 그 특별한 변수로 인해 어떠한 삶의 변화를 겪었어야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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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품이 사실주의/리얼리즘 소설인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은데, 이 소설들의 특징은 첫 번째로 전형성이고 두 번째는 디테일 즉 '세부 묘사'입니다. 전형적 인물들이 등장하고 세부 묘사를 갖춘 소설을 보통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부릅니다. 작품 속에 대단히 자세한 세부 묘사가 있어 마치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현실을 엿보는 듯합니다. 말하자면 '리얼리티 환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 이현우 著, 「아주 사적인 독서」 중

이 소설은 본문만 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긴 소설입니다. 그렇다고 활자가 시원시원하게 크고, 행간도 널찍하느냐하면 그것도 아니지요. 소설의 뒷표지에 이 소설을 가리켜 '대공황 시대를 그린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이라 적혀 있는데, 이처럼 '리얼리즘 소설'이라는 장르가 보여주는 그 극단적인 세부 묘사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이 소설의 분량이 이처럼 엄청난 것이 된겁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똑같은 내용과 주제를 가지고 만약 요즘에 한 편의 소설을 써낸다라면 이렇게까지는 길지 않을꺼라는거죠. 예를들어, 주인공 가족이 오클라호마로부터 서부 캘리포니아로 향해가는 한 과정 중에 나오는 도로변 식당에의 묘사를 잠깐 볼까요?

 

"앨은 메이의 쾌활한 울림에 가끔 얼굴을 쳐드는 일은 있어도, 이내 눈길을 돌려 주걱으로 철픈을 문지르고 둘레의 홈에 기름을 떨어뜨린다. 찌직찌직 소리를 내고 있는 햄버거를 주걱으로 누르고, 반으로 쪼갠 둥근 빵을 철판 위에 올려놓고 굽는다. 철한에 흩어진 양파를 긁어모아 고기 위에 올려놓고 주걱으로 우겨 넣는다.빵 반 조각을 고기 위에 얹고 나머지 절반에 녹인 버터를 칠한 다음, 맛을 돋우기 위해 새콤달콤하게 절인 채소를 그 위에 엷게 편다. 빵으로 고기를 덮고 주걱으로 훌렁 뒤집어 버터를 바른 빵을 그 위에 올린다. 이렇게 다 된 햄버거를 작은 접시에 달랑 올려놓는다. 그 빵 옆에 피클 몇 개와 검은 올리브 열매를 두 개쯤 곁들인다. 앨은 그 접시를 마치 쇠고리를 굴리듯이 카운터 쪽으로 미끄럼을 태운다. 그리고 주걱으로 철판을 북북 긁고는 묵묵히 스튜 냄비를 본다."

 

마치 '찾아라 맛있는 TV'에나 나올법한 주방 속 풍경을 작가는 이렇게나 자세히 묘사해놓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 묘사는 소설의 주제나 이야기의 전개에 하등!의 비중을 갖고 있지 못한 부분이지요. 이처럼 영화의 대본 마냥 세세한 묘사들이 넘쳐나다보니 당연히 그 분량이 길어질 수 밖엔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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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가장 관심가는 부분인 '사회주의'라는 건 대체 이 소설에서 어떤 모습으로 부각되어 보여지게 되는걸까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관리, 자본에 의한 임금 노동의 착취와 그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 자본주의적 시장생산의 무정부성 등에 반대하여 생산수단의 공동소유와 관리, 계획적인 생산과 평등한 분배를 주장하는 이론 또는 사상, 운동 그리고 그와 같은 구상을 실현한체제를 말한다. 사회주의란 용어는 1827년 영국 오언파의 출판물에서 처음 쓰였으며, 사회주의 사상은 산업혁명 이후 산업혁명에서 비롯된 생산의 무정부성, 불평등, 빈곤 등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하였다.

- 네이버 검색, <매경닷컴> 인용

얼마전 친구에게 「분노의 포도」와 「에덴의 동쪽」을 너무 읽고싶은데, 두께에 질려 사뭇 집어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란 말을 했더니 친구가 말하길 '너 이젠 미국 좌파 소설까지 읽을라그러냐?'라 하며 웃더군요. 사실 전 그때까지 이 두 소설이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건지도 몰랐었었고, 존 스타인벡이라는 작가가 좌파(?)적 성향이었다라는 것 또한 알지 못했었지요. 그냥 단지 뭔가 좀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소설을 읽고 싶었었을 뿐이었건데말이죠.

 

자... 이렇게 <'작가의 역사관이나 세계관이 매개변수로 존재하는 역사 소설'이고, 그 역사의 배경은 '대공황'이며, 이때 작용되는 작가의 역사관은 '사회주의'인, 지극히 자세한 묘사들이 등장하는 '리얼리즘 문학'>으로 분류되는 「분노의 포도」는 도대체 어떤 이야기인지 한 번 들여다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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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들이 이 토지를 개척한 거야. 할아버지들은 인디언을 쫒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아버지는 여기서 태어났어. 아버지는 잡초나 독사들과 싸웠단 말이야. 그리고 흉년이 들어서 돈을 꾸지 않으면 안 되었지. 다음에 우리가 여기서 태어난 거야. 저기 저 방에서 말이야. 애들도 여기서 태어나고, 그리고 아버지는 또 돈을 꾸어야 했지. 그때 이 땅이 은행 소유가 된 건데, 우리는 여기 그대로 머물러서 우리가 거둔 걸 조금씩 얻어먹고 있는 거야. …… 이건 우리 땅이야. 우리가 측량을 해 우리 손으로 부친 땅이야.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나서 이 땅에서 죽어갔어. 쓸모없는 땅이라 하더라도 역시 우리들 것이요. 그게 정말 소유권이지 숫자를 적은 종이 따위가 소유권이 아니란 말이요.

이야기의 전개가 시작되는 갈등은 바로 이렇게 생겨납니다. 위에서 인용했던 '사회주의'의 정의에 비추어보자면 바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관리'라 표현할 수 있겠지요. 이때 등장하는 '생산 수단의 새로운 소유자'는 바로 '은행'이라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조직이었으며 그렇게 구체적 일 개인이 아닌, 그러하기에 항의조차 마주앉아 할 수 없는 보여지지조차 않는 미지의 상대에게 자신의 선조때부터 살아왔었던 땅을 빼앗기게 되면서 소설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들 삶의 터전을 빼앗기게 된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건 <캘리포니아로 오세요! 캘리포니아엔 일자리가 넘쳐나며 그 일자리들은 오렌지나 포도를 따는 아주 낭만적인 것이랍니다. 품삯도 아주 높지요!!!>란 광고전단지였지요. 주인공 톰의 가족은 그렇게 타의에 의해 절망밖에는 남지않게된 정든 고향 오클라호마를 떠나 아무 기약도 없는, 허나 (광고전단지가 선사해준) 희망으로 가득차있는 캘리포니아행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대공황'이라는 사회적 충격, 거기에 더해진 '가뭄'이라는 자연적 충격에 못이겨 그렇게 캘리포니아행을 선택한 톰의 가족에게 닥친 첫 번째 변화는 바로 '가족의 해체'라는 시련이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가족은 함께여야한다'라는 신념을 우선시했던 톰의 어머니의 바램도 여행 도중에 닥친 할아버지의 사망과 뒤이은 할머니의 사망, 그리고 첫째 아들인 노아의 이탈을 막아내지는 못했었지요. 급성 중풍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자신의 남편을 잃은 슬픔에 정신 이상을 겪게된 할머니의 뒤이은 죽음은 얼핏 지극히 개인사적인 차원의 일이라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작가는 등장인물 중 하나인 케이지 전도사의 말을 빌어 할아버지의 죽음은 결코 개인의 육체적 한계에 다다른 자연적 끝맺음이 아닌, 어쩌면 인위적 재촉의 결과물이었을지도 모른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오늘 밤에 돌아가신 게 아니야. 집을 떠나시던 그 순간에 돌아가신 거야. …… 할아버지는 곧 그 땅이었고, 자신도 그것을 알고 계셨지요."

 

톰의 가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캘리포니아에서의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실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자기를 괴롭히는지도 모른다'는 소설 초반 전도사 케이지의 독백처럼, 괴로움이 닥치긴 했으나 앞으로 펼쳐질 그들의 꿈을 상상해보자라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죽음, 그리고 장남의 행방불명조차도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주어야만 했던거지요. 이처럼 톰의 가족들이 가진 '희망'은 어쩌면 첫째 딸인 로저샨의 뱃속 아기로 대변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저샨과 그의 남편 코니는 그야말로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잠재력 가득한 의지로 장차 뱃속의 아이와 함께 맞게될 캘리포니아에서의 자신들의 삶을 그 어떤 가족 구성원보다 더 희망차게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톰의 가족이 품고 있는 희망의 원천은 지극히 단순했습니다. <일자리가 넘쳐나는 캘리포니아로 오세요!>라 적혀 있는 노란색 광고전단지 한 장이 그 모든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 여정의 과정에서 그 단순한 희망의 원천마저도 온전한 것이 아니었음을 톰의 가족은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캘리포니아로 향하고 있는 수많은 인파의 행렬들 중에서, 자신들과는 반대로 오히려 캘리포니아로부터 다시 되돌아와 그들의 고향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입을 통해 '일자리와 오렌지와 포도가 넘쳐난다'는 캘리포니아의 현실을 비로서 듣게 된겁니다. 

 

원래 한 8백명 쯤 필요한건데 …… 광고지 5천장을 찍어 동부에 뿌렸고 …… 그걸 한 2만명 정도가 보았을테고 ……  2-3천 명의 가족이 그것만 믿고 서부로 …… 캘리포니아의 농장 주인은 이젠 2백명정도 밖에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는데도 …… 5백명쯤의 텐트치고 죽치고 있는, 먹을 것이 다 떨어져가는 사람들에게 일자리 주겠다, 내일 어디로 나와라 …… 하면 그 말이 돌고돌아 아침엔 천명 쯤 몰려와있을테고 …… 농장 주인은 광고지의 약속관 달리 한 시간에 20센트밖에는 줄 수 없다 말하며 싫으면 관두라 하고 …… 사람이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특히 굶주린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임금이 싸게 먹히는 거요. 또 그놈은 되도록 아이가 딸린 사람을 쓴다오. …… 내가 당신들에게 가르쳐주려고 한 것은 거의 1년이나 걸려서 겨우 깨우친 거요. 새끼를 둘씩이나 죽이고 마누라까지 잃고서야 겨우 깨달은 거였소. 

이게 바로 '희망의 유일한 원천'이었던 그 광고지의 진실이자 현실이었던 겁니다. 그들이 꿈꾸었던 희망의 땅 캘리포니아에는 그저 '자본에 의한 임금 노동의 착취'만이 있었을 뿐이었던 거지요. 이 과정에서도 또한 '가족의 해체'는 필수옵션이었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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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톰의 가족이 겪는 세세한 일상과 더불어 중간중간 '전지적 시점'에서 바라본 '사회의 전반적 모습'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톰의 가족이 내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보며 살아가고 있다면, 전지적 시점의 누군가는 그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를 설명해주고 있다고나 할까요? 톰의 가족이 드디어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을 때, 이 전지적 시점의 화자는 독자들에게 앞으로 그들이 어떠한 험난한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걸 다음과 같이 미리 암시해줍니다.   

 

지주는 이미 농장에서 일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을 서류 위에서만 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흙을 잊고, 흙의 향기와 흙의 감촉을 잊었다. 단지 자기들이 그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 기억했고, 땅에서 돈을 벌고 손해를 본다는 것만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농장은 너무 커져서 이미 한 인간의 머리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 이윽고 그러한 농장주들은 상인이 되어 상점을 경영했다. 그들은 농장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고, 그들에게 식량을 팔아 지급한 돈을 되찾았다. 얼마 안 가서 그들은 노동자에게 전혀 돈을 지불하지 않게 되었으며 장부를 만드는 성가신 일을 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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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없는 굶주린 사나이가 아내를 옆자리에, 빼빼 마른 아이들을 뒷자리에 앉히고 길을 달리노라면 곳곳에서 돈벌이는 되지 않을지 모르나 식량은 충분히 생산할 수 있는 놀고 있는 땅을 항상 보게 된다. 그럴 때 그 놀고 있는 땅이 뼈만 남을 정도로 여윈 아이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죄악이며 범죄인가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네!!! 작가 존 스타인벡은 이처럼 당시 캘리포니아(크게는 미국 전체)의 사회·경제상에 대한 간략한 서술을 통해 톰의 가족들 또한 장차 '자본에 의한 임금 노동의 착취와 그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독자들에게 넌지시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예의 톰의 가족이 바로 그 '자본에 의한 임금 노동의 착취와 그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의 혹독한 현실을 맞이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지요. 허나 이러한 '착취'는 비단 톰의 가족과 같은 노동자 계층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농장주들은 통조림 회사를를 만들었고 …… 소지주들은 빚이 밀물처럼 그들에게로 밀려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 이 조그만 과수원도 내년이면 대지주의 손에 넘어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빚이 소유주의 숨통을 막아놓고 있을 테니까. 이 포도원은 은행으로 넘어가겠지. 오직 대지주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통조림 공장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과수원에서 수확한 배는 5파운드  마흔 개에 5달러밖엔 안 되지만, 껍질을 벗겨 반 토막씩 내어 익혀서 통조림한 배는 네 개에 15센트(씩이나 한)다. 그리고 통조림 배는 썩지도 않는다.

이처럼 '자본의 힘'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소유하지 못한 자들에게만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소유하고 있는 자가 덜 많이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도 또한 똑같은 모습으로 발휘되고 있는게 현실이었던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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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사회주의'가 극복하고자 했던 그 마지막 대상인 '자본주의적 시장생산의 무정부성'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꼬집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물을 가지고 강물에 버려진 감자를 건지러 오면 감시원이 그들을 쫒아낸다. 사람들이 산더미처럼 버려진 오렌지를 주우러 털털거리는 차를 몰고 오지만 거기엔 석유가 뿌려져 있다. 사람들은 우두커니 서서 감자가 떠내려가는 것을 지켜본다. 구덩이 속에서 죽어 생석회가 뿌려지는 돼지들의 비명을 들어야 하고, 썩어 문드러져 물이 흘러나오는 오렌지의 산을 지켜본다. 사람들의 눈에 패배의 빛이 떠오르고, 굶주린 사람들의 눈에 분노가 서린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의 포도가 한 가득 가지가 휘게 무르익어간다. 수확의 때를 향하여 알알이 더욱 무르익어간다.  

과잉생산되어 버려지는 감자를 강물에 버리고 오렌지에는 석유를 뿌려 사람들이 그것들을 못 먹게 한 이유는 똑같은 상품들이 여전히 시장을 통해 거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를 몰고 조금만 교외로 나가면 감자와 오렌지를 공짜로 주워올 수 있다면 그 누구도 그것들을 시장에서 돈을 내고 사려하지 않을테니까요. <경제학 원론>에서 신앙처럼 받들어지는 '시장 기구를 통한 수요와 공급의 조절'은 (최소한 1930년대 당시엔) 이와 같이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이룩되고 있었던거지요. 그 반면...에!!!

 

한정된 숫자의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거의 무한정으로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정상적인 수준의 임금이 성립될 리가 없겠죠. '시장'은 이럴 때엔 예의 자신의 역할, 즉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통한 가격의 결정'이라는 메커니즘을 기가 막히게 수행해냅니다. 톰의 가족이 받을 수 있는 임금은 계속 떨어져만 가 결국 요즘 말로 '최저 생계비'에 못미쳐도 한참을 못미치는 수준까지 떨어지게 되지요.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개인'이 아닌 '단체'의 필요성을 서서히 느껴가게 됩니다. 물론... '자본' 또한 이러한 상황을 그저 바라만보고 있지는 않지요. 노동조합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한 '자본'은 그 주동자들을 '빨갱이'라는 한 단어로 낙인찍었고, 이때 보안관으로 대변되는 '국가'는 그런 '자본'의 편을 들어줍니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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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에 누구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다. 그리고 하나라도 놓서는 안 될 일은, 조금이라도 좋으니 앞으로 나간다는 것은 더러는 다소 뒷걸음질하겠지만, 아주 후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일이 올바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얼핏 보아 헛수고를 하는 것 같아도 실은 결코 헛일이 아닌 것이다."

 

반전(?)의 실마리는 이 한 마디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실마리에 기름을 붓게 되는 건 다름아닌 성경 속 구절들이지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으니라. 그것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더 나은 상을 얻기 때문이니라. 쓰러질 때는 한 사람이 그 벗을 일으켜 줄 것이다. 혼자 쓰러진 자는 불쌍하도다. 이는 일으키는 자가 없음이니라. …… 또 둘이 같이 자면 따뜻하도다. 혼자 자면 어찌 따뜻하리오. 그리고 한 사람이면 패하지만 둘이서는 이를 막을지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도다.

성경 <전도서>에 쓰여있다는 이 구절로부터 톰은 드디어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노동조합'만이 계속되는 임금의 하락을 막아낼 유일한 길임을, 그리고 '자본'에 고용된 깡패들에게 맞아 죽었던 전도사 케이지의 뒤를 이어 자신 또한 '노동조합'의 건설을 위한 선동가 - '자본'의 용어로는 빨갱이 - 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죠.

 

"대개의 설교는 가난한 사람들만 얘기해요. 앞으로도 쭉 같이 살아갈 가난뱅이 말이죠. 설령 한 푼도 없더라도 그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얌전하게 견디고 있으면 죽어서 금쟁반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얘기밖에 가르쳐주지 않아요. 그런데 <전도서>라는 건 두 사람이 함께 일하면 혼자보다 더 나은 상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 어머니, 나는 곰곰이 생각했죠. 돼지처럼 살아가는 우리들 가난뱅이가 있는가 하면 아주 기름진 땅이 그냥 놀고 있고, 혼자서 1백만 에이커나 갖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몇십만이 될지 모르는 건실한 농민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 만일 우리가 모두 단결해서 전번의 그 사람들처럼 아우성치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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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족의 희망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었던 로저샨의 뱃속 아기마저도 사산되고야 마는, 이런 상황하에서도 과연 '사람이 살아야할 이유를 가질 수 있는걸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의 비참함으로 마무리되지요. 물론, 그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어쩌면 이 소설의 핵심 주제라 할 수도 있겠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으니라'라는 메시지는 끝까지 지켜집니다. (다소간의 상투적인 작위가 보이기는 합니다만, 이 작품이 1930년대에 나온 것임을 감안하다면 그 '상투적'이란 표현도 감히. --- 허나 소설의 맨 마지막 장면에 만큼은 이 '상투적'이라는 표현을 정말 아니쓸 수 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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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삶의 조건을 개선해 가는 끊임없는 진보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이 어느 시기에나 동일하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기나긴 정체의 시대가 있는가하면 가파른 발전의 시대를 맞기도 한다. 심지어 소용돌이치며 역류하는 물처럼 간혹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아가는 시대가 나타나기도 한다. ……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와 역사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계급은 토지나 자본과 같은 그 시대의 주요한 생산수단을 어느 특정 집단이 독점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생산수단을 독점한 집단(지주와 자본가)은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집단(농노와 임금노동자)에게 생산수단을 빌려 주고 일을 시켜 그 결실의 상당 부분을 가로채기 때문에 일하지 않고도 잘살 수 있다. 반면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집단은 항상 고된 노동과 빈곤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토지나 공장과 같은 생산수단을 일하는 사람들의 공동소유로 만들어 버린다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의 계급적 차별은 사라지고, 그와 동시에 인간의 선한 마음을 왜곡시켜온 온갖 질시와 오만, 증오와 비애도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 「붉은 땅의 기억」의 말미,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 김세걸 서강대 교수 씀> 의 일부

 

중국은 이러한 '자본'의 폐해에 대한 해결책으로 소유권의 강제 이전, 즉 '공산주의'를 선택했습니다만, 이 소설의 배경인 미국은 뉴딜 정책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에의 수정'을 통해 그것을 극복해 냈지요. 그 '자본주의의 수정' 속에는 물론 '노동조합'도 포함되어 있고말이죠. (물론 중국 또한 '공산주의에의 수정'을 했다고도 할 수 있을겁니다. '주식시장'을 가진 공산주의! --;;) 작가 존 스타인벡은 과연... 이러한 결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었을까.가 문득 궁금해집니다. 보통... 이때 가해진 '자본주의에의 수정'은 다름아닌 사회주의적 성격의 가미를 의미하곤 하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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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만약 지금 발표되었다면 그다지 특별한 주목을 받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물론 제 생각에) 이 작품은 한 가지 큰 결점(?)을 가지고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바로 할아버지들은 인디언을 쫓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라는 문장이지요. '자본의 힘'에 철저하게 유린당할 수 밖에 없는 '가지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를 이 소설은 하고 있습니다만, 대상을 표현하는 단어들만이 바뀌었을 뿐인 미국인들에 의한 인디언들에 대한 무자비한 제압을 이 소설은 또한 "쫓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단 한 문장으로 그 역사적 당위를 주장하고 있지요. 물론 소설의 중간에 "우리 할아버지는 인디언한테서 빵을 빼앗았지. 그렇지만 그건 좋지 않은 짓이야."(p361)의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만, 작가가 무려 700여 페이지의 이야기를 통해 '자본의 힘'에 대해 비판하려 한 것에 비한다면, 과연 위 두 문장을 반성다운 반성이라 할 수 있을까요? 

 

오랫만에 읽어본 아주아주 두꺼운 책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다 읽고나니 무척 뿌듯.했었었. ^^;;) '재미있다'란 표현은 결코 어울리지 않겠습니다만, (그것에 동의하든 동의하지않든) 작가의 뚜렷한 주제를 볼 수 있었었다라는 점에서만큼은, 또한 그것으로 인해 독서에의 집중력이 떨어질 겨를조차 없을만큼 쉬임없이 읽어내고 싶다란 생각을 갖게 해주었던 것만큼은 틀림없다 말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고전"이란 타이틀이 결코 과장이 아닌 작품이란 것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듯 싶네요.  

 

 

 

 

 

 

 

 

성장하고 일하고 창조하고자 열망하는 결정적인 인간의 기능, 곧 일하기를 열망하는 근육, 어떤 단순한 욕구를 통해 필요 이상의 것을 창조하기를 열망하는 정신, 이것이 인간이다. 벽을 쌓고 집을 세우고 댐을 건설하는 것, 그리고 그 벽과 집과 댐 속에 인간 자신을 투자하는 일, 또한 벽과 집과 댐이 갖는 어떤 힘을 인간 자신에게 환원하는 일, 그 건설 자체에서 강건한 근육을 얻고, 구상을 통해 명확한 선과 형체를 끌어내는 일은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주의 모든 유기체나 무기체와 달리 자기가 창조한 것을 넘어서서 성장하고, 자기의 사고의 범주를 딛고 넘어 자기가 이룩한 업적보다 앞서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 인간을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 인간은 고통을 겪으면서 때로는 과오를 범하기도 하고 비틀거리면서 전진한다. 앞으로 발을 내디디다가 뒤고 미끄러지는 일도 있지만, 그것은 고작 반 발짝일 뿐이며 한 발짝 그대로 후퇴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말할 수 있고 누구나 알 수 있다. 

 

 

  

 

 

   

 더... 두꺼운 「에덴의 동쪽」(게다가 무려 두 권!)에의 기대를 더.더욱 커지게만 해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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