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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징비록 - 전시 재상 유성룡과 임진왜란 7년의 기록
이재운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15년 2월
평점 :
1592년부터 1598년 사이 7년간의 전쟁, 임진왜란.
그 전쟁에 대한 기록을 담은 ' 징비록(懲毖錄)' !
이 책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을 때 집필한 것으로, 임진왜란 전란의 원인과 전황 등을 담았다.
제목인 '징비'는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의 "예기징이비역환(豫其懲而毖役患)", 즉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유성룡은 참혹했던 전화를 회고하면서,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 조정의 여러 실책들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였다고 한다.
내가 읽은 《소설 징비록》은
유성룡과 이효원이 <징비록>과 <호종일기>를 펴 놓고 전쟁의 시작부터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하고 있다.
<호종일기> 는 당시 승지 '이효원'이 전란 중 선조와 광해군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시고 피난다니면서 매일 기록한 일기로, 이 소설의 저자가 이효원의 후손으로, 집안대대 전해오는 <호종일기>를 탐독하여 <징비록>과 함께 소설의 팩트로 삼고 있다.
소설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란을 앞두고 조선의 정세는 붕당정치의 소모적인 당쟁으로 인해 국력은 날로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임진왜란 전 이미 전란의 조짐이 감지되고 있었으나 그에 대한 조정의 대응은 참으로 안온했다. 일본으로 다녀온 통신사 일행에게 물은 전란의 가능성에 대한 엇갈린 반응들과
전란의 코앞에 닥쳐왔음에도 지배 계층의 내부 당파 분열은 더 극심해졌고 민심의 동요는 불안했다.
결국 1592년 일본은 대마도를 거쳐 부산포 쪽으로
넘어왔으나 조정은 전쟁발발 사실을 나흘이나 넘어서야 인지하고 부랴부랴 왜적에 맞섰서나 대패하게 되고, 급기야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나서게 된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유성룡 역시 선조와 함께 하게 되었다.
" 30일 새벽, 왕은 마침내 돈의문을 통해 한양을 빠져나갔다. 왕과 조정이 떠난 궁궐에는 성난 백성들이 난입하기 시작했다. 호종 명단에 오르지 않은 하급관리들이나 궁녀들은 뿔뿔이 달아나고, 노비, 백정 같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여저기 불을 지른고 창고 문을 열어보았다. 그들은 특히 장예원 문서를 다 끌어내놓고 불을 질러버렸다. 노비 문서를 태우기 위해서다. 이렇게 하여 한양성은 일본군이 들어오기 전에 자진 함락당했다. 적군에게 함락된 것이 아니라 제 나라 백성들에게 함락된 것이다. 오죽했으면 백성들이 제 나라 임금이 살던 궁성을 불 지를까." - p. 59
이는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임금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배신감이 극에 달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전란 초기의 관군들의 전패로 패전의 그림자가 드리울 무렵,
명나라의 원병과 이순신의 승전, 전국 각지에서의 의병의 봉기는 정말 하늘의 구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실 명나라 원병의 경우는 틈만 나면 싸움을 피하려고만 했을 뿐 지원군의 입장으로 왔음에도 실제로는 왜적보다 더하게, 위세를 가지고 국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면이 더 많았다.
" 일본군이 무려 10만 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면서 패퇴한 사실은 분명한데, 도대체 누가 그 10만 대군을 죽였는지 왕은 알지 못했다. 그저 대명의 천군이 도와서 그랬으리라고 막연히 짐작할 따름이다. 혹한과 기아, 그리고 의병ᆞ승군의 유격전, 권율 등 관군의 집요한 저항, 이순신 등 수군의 연전연승은 잘 생각나지 않고, 그저 명군이 때려대는 꽹과리며 북소리만 지금 당장 귀에 들려온다. " - p. 214
1593년 4월, 1년 만에 서울을 다시 수복하여 돌아오게 되나 도성은 참혹했다.
그리고 남해안 일대에서 왜군은 지구전 태세로 돌입한 중에 삼군수군통제사 이순신이 하옥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순신의 가장 강력한 후견인이 다름 아닌 유성룡 자신이었음에도 그는 적극적인 구명활동을 하지 못했다.
"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은 단 한 번의 출전 거부로 사형 위기에 몰렸다.ᆞᆞᆞ 그들의 적은 일본군이 아니라 조정의 입이다. 그 입이 왜란도 부른 셈이다. 이순신을 사형시키라고 재촉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난 임진년에 도망쳐 다니거나 입으로만 전쟁을 한 사람들이다. 명군과 조선군 간의 합동 작전에 분루를 흘리면서 뛰어다닌 유성룡은 이런 분위기를 돌려보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미친 여론은 광풍처럼 일어났다." - p.272
책의 후반부에는 이순신과 관련한 부분이 꽤 등장하는 것 같다. 특히 이순신의 전사와 관련하여 유성룡이 회고하여 말하는 부분에선 이순신이 유성룡에게 단순히 훌륭한 수군사령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었음을 보여 준다하겠다.
"임진년의 변은 이순신이 막아주었는데, 정유년의 변은 누가 막을지 영의정인 내 걱정이 태산 같았지. 그런데 그 이순신이,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겪은 그가, 철저히 버림을 받은 그가, 왕을 원망하여 꼬리를 사릴 만도 하련만 겨우 열두 척 배로 명량 대첩을 거둘 줄 누가 알았는가. 하늘이 낸 인물이 아니고서야 그럴 수는 없었지. 참으로, 못난 전시 재상, 나의 죄를 씻어준 건 바로 이순신이라."
- p. 326
1598년 7월, 왜군의 우두머리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과 함께 종전을 하게 되고, 이로써 7년간의 임진왜란은 끝이 나게 된다.
" 임진왜란 7년간 왜구와 싸웠다지만, 정작 내가 재상으로서 싸운 상대는 적괴인 풍신수길이나 가등청정, 소서행장이 아니라 고비마다 발목 잡는 이 나라 대신들이었고, 위기 때마다 무기력해지는 국왕 전하셨지. 또한 싸움을 피하기만 하려는 명나라 장수들을 설득하는 것도 지난한 싸움이었지."
- p.373
" 나는 전시 재상으로서 내 임무를 다하지 못했네. 반성하네. 그래서 <징비록>을 남기는 거라네. 후세를 향해 바치는 참회의 책이라고나 할까. 다시는 이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소원하는 마음뿐이네. "
- p.374
참으로 가슴 아픈 역사이다. 그 전란에서 고통 받고 핍박받은 것은 우리 국민이었을진데 , 그 이후 우리의 조정과 지배계층들은 반성을 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후 '병자호란' 의 경우만 보아도.
이 소설 《소설 징비록》의 내용은 유성룡의 <징비록>의 내용을 기반으로 세세한 인물 간의 대화와 극적 스토리를 넣은 것이므로, 읽으면서 어느 부분이 사실이고 어디 부분이 허구인지 헤갈리기도 했다. 아마 이것은 늘 언급되어지는 역사소설의 아쉬운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우리에게 일깨우고 전하려는 메시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 임진왜란 중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거나 죽은 지휘관들의 명단을 실었다. 이들 외에도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희생한 전사들의 명단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말한다.
"역사를 두려워해야 한다. 역사는 반드시
기록한다. 영광스런 이름, 오욕의 이름, 결코 잊지 않는다." 라고.
책을 읽은 후 리뷰를 쓰며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고 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 상고사 머릿말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