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멸종 안전가옥 앤솔로지 2
시아란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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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에 이어 안전가옥의 두 번째 앤솔로지 시리즈 '대멸종'을 읽었다. 앤솔로지란 말이 좀 어려운데 찾아보니 선집이란 뜻이란다. 엔솔로지의 어원이 꽃다발이라는데 이 단편집은 대멸종이란 다소 어려운 주제로 쓴 단편을 꽃다발처럼 모은 것이었다. 사실 대멸종은 종이 멸망한다는 뜻이니까 인류도 하나도 동물군으로 봐서 나머지는 살아있고 인류만 망한다고 본 것인지 모르겠으나 소설을 다 읽고나면 제목은 대멸망이 더욱 타당하다는 느낌이다. 싹 스며드는 소설집 제목은 아니다.

 

 

각설하고 총 5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작가 이력이 특이하다. 웬 공학박사 연구원에 심리학 전공자, 직장인까지 다양하고 전작인 냉면에서 본 작가가 또 보여서 반갑기도 하다. 다양한 작가의 단편집인만큼 소설의 개성도 강하고 작품성도 다소 들쑥날쑥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개인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첫번째 소개된 시아란 작가의 '저승 최후의 날의 기록'은 윤회나 저승사자 등 다소 식상한 주제를 리포트처럼 풀어낸 것이라 나는 좀 지루했다. 기본적으로 판타지물도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을 좋아하기에 섞어찌개식의 사후세계가 잘 납득이 가지 않고 아예 죽은 뒤라면 그 후의 상상은 아무려면 어떠랴는 생각도 있었다. 저승이 망하는 걸 걱정하는 건 저승사자뿐일지도?

 

 

 

두번째 작품은 심너울 작가의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인데 나같이 현실기반 판타지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작품 강추다. 작년에 열심히 본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오버랩 되면서 게임, 가상현실, 버그 등의 소재를 실감나게 다뤘다. 이 정도 지식은 그냥 사전조사만으로는 나올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작가 후기를 보니 코딩을 1년 배웠다고! 이 작가는 대학 때 마침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이 있었고 코딩 열풍이 불 때 직접 수강한 학생이 아닌가. 마구 웃음이 나는 순간이다. 캐릭터가 65,536번 점프를 하면 버그가 나서 서버가 터진다. 그 오류를 막기 위해 투입된 신규 프로그래머인 주인공은 원개발자가 의도적으로 심은 버그를 막기 위해서 그를 찾아야 한다! 게임회사 사장인 현빈이 버그 수정을 위해 개발자 찬열을 찾아가면서 모험이 시작되는 장면이 연상되면서 히죽거리며 읽게 되었다. 결말이 다소 황망한 것까지 둘은 닮았지만 물론 스토리상에 다른 공통점은 전혀 없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작가의 경험을 독자 자신의 경험과 비추어 어떤 점접이 있을 때 더 사실감을 느끼는 거라 내 취향은 제대로 저격이다. 게임알못이지만 개발자가 만들어놓은 던전이라든가 숨겨진 코드를 해석해서 실마리를 풀어가는 과정이 추리소설처럼 재미있다. 이 작품이 너무 재미있어서 다른 작품은 그 소재의 참신함에도 불구하고 빛을 다 발하지 못한 느낌마저 든다. 왜냐하면 다른 작품은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 너무 가버린 판타지의 세계라서 완전히 푹 빠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냉면도 그렇지만 대멸종도 실험적인 단편선임에는 확실하다. 더운 여름, 뱃살 사이로 땀이 흐를 때 딱 읽기 좋은 판타지 선집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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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려고 누웠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는 밤
정은이 지음 / 봄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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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에세이를 읽었다. 글이 솔직하고 따뜻하다. 저자는 30대의 직장여성으로 성인 ADHD를 앓고 있는 사람이다. 난 사실 요즘 흔히 듣는 정신질환을 10~15년 전쯤에는 거의 못 들었기 때문에 공황장애와 마찬가치로 ADHD도 마치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몸의 질병처럼 마음의 병에도 어떤 유행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한 사례를 읽고 나니 아마도 내가 어린 시절에는 아직 연구가 활발하지 않아서 병명을 붙이지 못했을 뿐 오래 전부터 계속 있었던 병은 아닐까 추측한다.

사실 이 책은 ADHD환자인 저자가 쓴 것이지만 병 자체가 큰 문제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물론 본인은 심각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처음 진단받고 나서 큰 충격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제3자이고 완전 타인인 독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거의 모든 남의 고백이 그러하듯이 크게, 대단하게, 엄청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니 작가님도 안심하시길 바란다. 진짜로 세상 사람들은 남일에 별 관심이 없고 또 그렇게 이상하게 보지도 않는다는 걸. 도리어 '아, 저런 감정은 나도 느끼고 옆집 사람도 느낄 거 같은데...'싶은 부분은 너무나 많았다.

제목이 참 특이하고 이상적이라고 느꼈는데 '자려고 누웠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는 밤'은 방송에서 홍진경씨가 말한 행복의 의미란다. 나야말로 자려고 누우면 별의별 걱정, 오늘 하루 다 못한 일, 각종 후회가 밀려와서 여러 번 뒤척이곤 한다. 아무 걱정없이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는 밤이 과연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저자는 불안 증세가 너무 심해져서 결국 정신과 상담을 받게 되었는데 상담 내용이 인상적이다. 그녀가 겪는 고민이 과연 ADHD환자만의 고민인가 의아할 정도로 내 눈에는 지극히 정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부딪히는 나와 다른 남, 열심히 사는 사람 특유의 강박과 불안 심리, 이제 처음 엄마가 된 워킹맘의 고민 등 아마 저자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부지기수일 것이다. 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저자가 자기 탓할 때, 대부분은 남탓을 하고, 저자가 자기를 괴롭힐 때 절대 병원에 오지 않는 진짜 환자들은 남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이 책 읽으면서 완전히 동의한 내용은 회사에 정말 착하고 일 잘하고 섬세한 사람은 상처를 받아 못견디고 퇴사하고 그 반대 부류의 사람들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내가 회사 다니면서 느낀 바가 딱 그렇다.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 중에 얼마나 많은 수가 무능한데 아부를 잘해서, 라인을 잘 타서인가, 반대로 독한 상사나 동료의 뒷담화 등 등쌀에 못이겨 그만두거나 다른 직장으로 이직한 사람 중에는 얼마나 아까운 사람이 많았던가.

 

책 중반으로 가면 어떻게 저자가 ADHD를 이겨냈는지 그 과정이 자세히 나온다. 읽다보면 그녀가 완치 판정을 받는다면 그건 약발(?)이 아니라 순전히 본인의 용기와 노력 때문임을 알게 된다. 결국 모든 마음의 병이 그렇듯이 일단 과거의 상처를 온전히 들여다보는 과정이 먼저 필요하다. 누구나 너무 고통스러워서 영원히 봉인하고 싶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게 비밀이라면 비밀이 하나도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어릴 때이든 커서든 겪게 되는 안 좋은 일을 두려움없이 마주보고 그 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또 책 속 상담사의 조언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정신과 상담료는 한 시간에 99,000원이고 그것도 한달치를 선결제해야 한다는데 이 책을 읽으면 왠지 가벼운 증상은 자가치료가 가능할 것 같다. ㅋㅋ 불안증을 줄이는 방법으로 본인과 주변사람이 잘 되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볼 것, 지옥은 부정적인 생각을 멈추지 않는 한 계속된다는 것 등이 소개되었다.

 

저자는 사랑하는 딸과의 행복을 위해 불행의 사슬을 끊어버렸다. 그녀에게는 다행히 밝고 건강한 남편이 있어서 조력자가 되어 주었고 예쁘고 착한 딸아이도 늘 빛이 되어주었다. 번듯한 타이틀을 가진 박사나 교수들이 쓴 심리학서도 여러 권 읽었지만 그분들의 책은 이성적이고 피상적인 사례 모음집 같은 느낌이었다. 저자는 한동네에 사는 30대 주부같이 친근하고, 또 솔직하다. 요즘 나오는 일반인들의 에세이를 읽으며 나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지들에게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나도 힘내서 살고 있으니 여러분도 힘을 내세요' 같은 따뜻한 응원의 마음. 병명이 ADHD이건, 공황장애이건, 흔한 우울증이건 뭐가 중요할까. 이겨내려는 의지, 행복해지려는 마음을 잃지 말고 모두들 밝은 미래를 끈질기게 상상했으면 한다. 참 좋은 책을 읽어서그런가 오늘은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을 거 같다. 어차피 세상일이란 게 마음에 걸리든 안 걸리든 시간이 지나면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나게 되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까지만 열심히 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는 자세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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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블랙홀을 건너는 크리에이터를 위한 안내서
라이언 홀리데이 지음, 유정식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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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어떤 책인지 제목만 보고 와닿지는 않았지만 창작을 하는 사람을 위한 길잡이가 되겠구나 싶은 마음에 책을 들었다. 저자 라이언 홀리데이는 미국의 작가이며 마케터이고 베스트셀러를 여러권 썼다고 소개되어 있다. 무려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까지 되었다는데 솔직히 말하면 목차에 따라 분명히 내용이 진행됨에도 다소 산만하고 마치 인공지능이 책을 쓴 듯한 인상을 받았다. 한 페이지에 적어도 3명 이상의 유명인이 한 말, 각종 사례가 줄줄히 나오는데 처음에는 아는 작품이나 작가가 나오면 유심히 봤지만 너무 많은 인용이 이뤄져서 이 책을 작가가 스스로 자기 의견을 개진하기 위해 쓴 것인지 흔한 미국식 베스트셀러로 급조하기 위해 유명인 기사나 짜깁기를 한 것인지 의아한 기분마저 들었다. 여기 소개된 각종 인사와 사례의 갯수를 세면 수백건은 될 듯 하다. 그러나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지나친 인용과 참고 자료를 따라가다보면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어지러운 느낌도 들었다. 

 

 

일단 책은 크게 네 챕터로 이뤄져 있다. 창조의 과정, 포지셔닝 하기, 마케팅의 기술, 플랫폼 만들기이다. 그러나 내가 정작 궁금한 어떻게 창작을 하는지 어떻게 해야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은 없다. 여기서 저자가 마케터인 점에 주목하게 된다. 진정한 내용은 두번째 챕터부터 나온다. 이 사람은 어떻게 만들 것인가는 어차피 자기가 줄 수 있는 답이 아니므로 패스한 듯 하다. 잘 만든 다음에 어떻게 팔 것인가를 중점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오래 살아남고 사랑받는 작품을 쓰라고 하는데 이건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조언이다. 심지어 며칠, 혹은 길어야 한 달 멜론 차트에 올라가는 유행가를 만드는 사람들도 그렇게 금방 자리를 내주고 잊혀지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는 판매에 관한 상세한 기술도 몇 가지 안내하고 있다. 요즘 창작은 단순한 글쓰기만이 아니라 작곡, 영상물 제작, 음악가, 유튜버 등 그 종류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그 모든 창작자들이 오래 살아남을 작품을 일단 만들면 어떻게 홍보를 해야 하고, 어떤 식으로 팀을 구성해야 하며, 그래서 어떻게 팔아야 한다라는 것을 순차적으로 알려준다. 예를 들어 공짜를 활용하라 같은 기술인데 아마존 전자책, 블로그 마케팅, 넷플릭스 같은 유료 채널이 처음에는 진입 장벽을 낮춰서 무료 혹은 그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팬을 확보하고 그 후에 기막히게 좋은 기능을 얹은 프리미엄 버전에는 돈을 지불하게 만드는 식이다. 또 이메일 마케팅이 무엇이고 어떻게 할 것인지 이것이 왜 플랫폼이라는 일종의 판매 체계와 연결이 되는지 설명도 나와있다. 마찬가지로 단순한 팬에 그치지 말고 중독자를 만들어서 기능에 상관없이 애플처럼 충성적인 고객을 만들어라 같은 조언도 들어있다. 문제는 이런 방법이 이미 알려진 기술이란 것이고 여전히 나는 눈이 번쩍뜨일만큼 잘 만든 작품이 우선이지 그 후에 어떤 마케팅 방식을 택할지가 더 중요할까라는 의문이 든다. 크리에이터가 스스로 감추는 게 아니라면 작품을 만든 후에는 공모전이든, 유튜브이든, 본인의 블로그이든 적당한 마케팅 방식이 있을 것이고 인터넷이 있는데 활용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저자가 중시한 이메일 마케팅에도 고개를 갸우뚱한 것이 요즘 무슨 제품이 나왔다거나 어떤 알고 지낸 업체에게서 홍보 메일을 받고 '아, 참 반갑다'라는 느낌을 받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싶다. 나같은 경우는 스팸메일함에서 안 찾으면 다행이고 예전에는 단체 메일도 많이 보내봤지만 처음 한 두번이면 모를까 확인해보면 일단 받은 사람이 수신거부하거나 차단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고 책 내용이 다 올드하고 식상한 것은 아니고 다양한 채널을 통해 돈을 벌라는 조언 등은 참고가 된다. 작가의 주요 수익이 로열티나 매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설, 강의, 컨설팅에서 나온다라니. 요즘 작가들은 진짜 그렇지 않은가? 책을 내고 유명해진 사람도 있고 유명해진 후에 책을 낸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 책을 팔아서 돈을 벌기란 웬만한 베스트셀러로는 어림도 없다. 실리콘벨리 기업가들은 친구 회사에 투자를 더 잘한다던가, 뮤지션들에게 수익은 음반이 아닌 순회공연, 광고, 티셔츠 같은 굿즈판매에서 나온다니 웃프기도 했다. 하지만 창작자의 대다수가 원하는 만큼 충분한 수익을 올리기 어려운 현실을 감안하면 이만한 조언도 없는 셈이다. 한개의 작품만 쓰고 사라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음 작품을 만들려면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저자는 잠재적인 비즈니스 기회를 기꺼이 탐색하려는 열의가 중요하다고 한다. 어차피 작품은 어떻게든 자기가 만들어야 한다. 그런 방법이 나온 책은 아직까지 못 봤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었다고 작가가 되는 게 아니며 심지어 그 책 제목은 그닥 내용과 관계도 없다. 책 제목 자체가 일종의 마케팅 수법이었던 셈이다. 창작에 쉬운 길은 없다는 것이 "창작의 블랙홀을 건너는 크리에이터를 위한 안내서'를 읽고 똑같이 또 내린 결론이다. 그저 방법은 방법일 뿐 방법을 써먹을 뭔가를 만드는 게 우선이라는 당연한 결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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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와 나오키 1 - 당한 만큼 갚아준다 한자와 나오키
이케이도 준 지음, 이선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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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이후로 일본 장르소설은 오랜만이다. 한자와 나오키, 일본에서 드라마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몰랐다. 제목만 보고는 한자라는 사람과 나오키라는 사람, 둘이 듀오로 활약하는 내용인가 했는데 이런.. 성이 '한자와'이고 이름이 '나오키'였네. 후훗.. 여기서 일단 한방 먹고, 작가의 단순 조사만으로는 쓸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은행 묘사에 또 다시 놀란다. 작가 이력을 띠지에서 찾아 읽어보고야 납득이 간다. 저자 이케이도 준, 미쓰비시 은행에서 7년 근무. 마치 최근의 의학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전문성이 은행 이야기에 사실감을 더한다.

 

 

주인공은 도쿄 중앙은행의 엘리트 융자 과장 한자와. 그는 오사카 서부 지점에서 기업에 융자를 심사해서 대출해주는 업무를 맡고 있는데 서부오사카 철강이란 곳에 아사노 지점장이 부실 대출을 해 준 건으로 위기에 몰리게 된다. 서부오사카 철강의 사장인 히가시다가 계획적으로 도산을 하는 바람에 은행이 대출해준 5억엔이 부실채권이 되고 그 돈을 회수하지 못하면 지점장 아사노의 모략으로 융자 과장인 한자와가 책임을 다 뒤집어쓰는 상황이다. 1권의 주요내용은 어떻게 대출해준 5억엔을 회수하느냐이다. 처음에는 전혀 회수할 방법도, 사장이 돈을 은닉한 증거도, 한자와를 도와줄 인맥도 없어보였는데 사방팔방 다니며 노력한 끝에 다케시타라는 거래처 사람을 만나 수사를 시작하고, 사내에서도 친구의 도움을 받아 범인의 포위망을 좁혀가는 이야기가 박진감 넘치게 펼쳐진다.

 

히가시다라는 드러난 적과 은행 내부에 있는 감춰진 적. 원래 소설에서 한꺼번에 패를 다 보여주면 재미가 없다. 어떻게 이 두꺼운 책을 다 읽나싶었는데 100페이지를 넘어가자 줄어드는 게 아까울 정도이다. 중간 중간 챕터마다 끼워진 한자와 과장의 분노어린 만화컷도 재미있고 소설 자체가 만화같다. 이런 작품이 영상화되지 않으면 무엇으로 드라마를 만들까 싶을 정도이다. 이케이도 준의 작품마다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했다고 하는데 소설이 아니라 마치 어떤 영상물을 보는 것처럼 서사에 강한 글이고 주인공의 성격이 분명하며 일관성이 있다.

다만 장르소설이라는 한계도 있어서 감정선은 무척 단순한데 주인공의 주요감정은 분노이고 그의 목표는 사회정의 실현이다. 다 썪어빠진 일본 은행의 비리와 직장생활의 쓴 맛, 거품 경제가 붕괴되고 불황일 때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당시 일본 사회상을 보는 재미도 있다. 다른 등장인물인 히가시다 사장이나 아사노 지점장, 나미노 경리과장 등도 비교적 평면적인 인물로 등장하고 전지적 작가시점이라 여러 등장 인물을 번갈아 보여주기에 그들의 속사정이나 의도를 금방 알 수 있어서 속은 시원하지만 통속 소설이라는 한계는 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추리나 미스테리물을 좋아하는 독자층을 충분히 만족시킬 만한 완성도이고 무엇보다 뒷얘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 스토리텔링이 무척 뛰어난 작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직장 생활이라는 것이 문제를 하나 해결했다고 끝이 아니므로 한자와 과장의 활약은 뒷편에서 계속 되겠지. 2, 3, 4권이 근간으로 잡혀있던데 빨리 후속권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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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 그리던 아버지가 되어 - 죽음을 앞둔 서른다섯 살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는 이야기
하타노 히로시 지음, 한성례 옮김 / 애플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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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에 걸려 젊은 나이에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가 아직 아기인 아들에게 남기는 글을 모아 에세이로 냈다. 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은 겨우 3년, 아들은 이제 2살이다. 의사의 예상시간이 맞다면 저자는 아들이 초등학생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저자는 아들에게 당부할 말을 마치 유언처럼, 그렇지만 최대한 담담하게 적어내려갔다. 사실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들에게 전하는 지혜라는 설정을 빼더라도 이 글 자체로 누구나 납득할 내용이다. 원제는 일본어로 僕が子供の頃、欲しかった親になる。직역하면 '내가 어릴 적 원했던 부모가 되다'. 그렇다, 저자는 자기가 꿈꾸던 아버지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서 최선을 다해 아들의 긴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남기기로 한다. 아들과 함께 나이먹고,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시의적절하게 고민을 나누는게 더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 남은 물리적인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서른다섯 살의 포토그래퍼 아버지, 객관적으로 봐도 주관적으로 봐도 너무나 짧은 인생이다. 요즘 35살은 결혼도 하지 않은 사람이 많은데 이 나이에 무슨 인생이 경험이 그리 많으랴 생각할 수 있다. 나도 글을 읽기 전에는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남자는 건강하고 다소 철없는 미혼의 35살이 아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고, 암투병으로 체력까지 저하된 절박한 35살의 아버지이다.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들과 아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떠나기 싫을 것이다. 의사가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았다면 주위에서 뭐라고 하든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을 쳤을 나이이다. 하지만 그는 다발골수종이라는 암에 걸렸고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은지 자기 운명을 받아들였다. 이 부분이 다 납득이 가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기적이 가끔 있고 의사가 죽음을 선고했다고 그 시간 안에 모두 운명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가 자기 인생을 정리하는 것은 하되, 자기 운명에 대해서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지켜보면 어떨까 싶었고 그의 재능과 젊음이 아깝기까지 했다. 하지만 저자가 내 생각을 알면 이 또한 다정한 학대라고 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무척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살면서 좋은 부모를 만나 그 나잇대에 맞는 도움을 받고 부모자식이 서로 성장해가는 좋은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꼭 그렇지 않다. 준비없이 부모가 된 사람도 많고 또 부모가 된 것 자체가 처음이기에 실수도 많고,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 구체적인 다짐이나 생각이 없이 아이가 생겨서 자동으로 부모가 된 사람들도 많다. 자식도 자신이 어떤 부모를 가졌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생활한다. 부모 자식간이란 운명이기에 대개는 자라면서 남의 아버지와의 비교를 통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삶의 지혜는 결국 저자가 젊은 시절 몸소 사회의 쓴 맛을 보면서 깨달은 내용이다. 어느 부모가 자식도 자신과 똑같은 고생을 하고, 전철을 밟으며 어른이 되길 바랄까?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지켜줄 수 없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아들이 꽃길만 걷는 것은 아니더라도 흙탕물은 피해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 것임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아들에게 "유優"라는 이름을 지어줬는데 형용사로 읽으면 야사시이, 즉 상냥하다, 다정하다라는 뜻을 가진 일본어이다. 기초 일본어에도 나올 만큼 쉬운 한자이므로 누구나 읽기 쉽고, 또한 중성적이어서 남자나 여자나 사용할 수 있다. 그는 온화하고 다정한 게 좋아서 그런 여자를 만나 결혼했고 아들 이름도 그렇게 지었다. 작가가 말하는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이란 그저 연약하고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 강인하고 적극적인 선한 사람을 의미한다. 아들이 그렇게 선한 영향력을 다정한 가진 사람이 되도록 구체적인 방법론을 적었다. 그 세세한 내용이야 책을 읽은 게 나을 것 같고 아버지가 가르쳐주는 삶의 잔꾀 부분이 마음에 든다. 말이 잔꾀이지 요즘같은 세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언이다.

 

 

그는 싫은 사람을 상대하는 법, 왕따를 당했을 때 대처법, 꿈과 일과 돈이란 어떤 것인지(먹고 살기 위해 돈벌이로 하는 일과 꿈을 위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을 분리해서 설명하고 있다), 왜 혼자하는 여행이 좋은지, 배우자는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남들이 부정적인 말을 쏟아낼 때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하는지 등 아버지가 곁에 있다면 아들에게 당연히 해주었을, 혹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주었을 지혜를 꼼꼼히 적어두었다. 그 따뜻한 부정에 가슴이 아파오는 에세이다. 그러나 저자는 건강했을 적 사냥을 즐기던 터프가이였고, 몸이 많이 아픈 지금도 남이 자신을 동정하는 것을 끔찍히 싫어한다. 어머니가 울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무쇠같이 단단한 아버지가 가슴에 사랑을 숨기고 담담히 전하는 말이라 더욱 깊은 울림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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