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비티 북스의 SF시리즈는 신선한 감각을 지닌 젊은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엄선해서 출판하고 있다. 외국의 SF소설과는 그 결이 다르고 등장인물이 한국인, 한국이 배경인 것도 SF소설을 읽는 색다른 매력이 된다. 대개의 SF소설이 그렇듯 "무너진 다리"가 그리는 미래의 모습도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다. 기술은 발달에 발달을 거듭해 인간같은 로봇보다 한층 더 나아간 휴론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휴론은 휴먼과 클론의 합성어로 신체배양 기술을 적용해서 다리를 잃은 사람에게는 휴론이 배양한 다리를 떼어주고, 팔이 없는 사람은 팔을 길러서 가져가는 식이다. 무척 잔인한데 로봇이 아무 의사도 감각도 없다고 생각하면 마치 지금 돼지에서 인간으로 장기 이식을 연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맥락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만 로봇이 인간을 닮으면 닮을수록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데 이는 일본의 로봇 공학자가 말한 '불쾌한 골짜기 이론'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로봇이 사람의 모습과 비슷해질수록 인간이 로봇에 느끼는 호감도가 증가하지만 그 유사성이 '어느 정도'에 도달하게 되면 오히려 강한 거부감을 유발하게 된다고 한다.


이 책은 무려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인데 사실 읽기가 쉬운 책은 아니었다. 매일 열심히 읽어도 초반에는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빛반사가 심한 흰종이라서 시력이 좋지 않은 나로서는 계속 각도를 조절해가면서 봐야했다. 또 내가 SF장르에 익숙치 않은 초보 독자이기도 했지만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서 주인공인 아인과 동생인 아라, 엄마인 임교수, 친구인 마티아스, 중요 휴론인 카인과 아벨 외에는 읽어도 그닥 기억에 남지 않는 조연이나 엑스트라급의 등장인물도 꽤 많은 편이다. 만약 나처럼 처음 100페이지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초보 SF독자라면 본문을 읽기 전에 맨 앞에 나온 등장인물 소개를 꼼꼼히 읽고 진행할 것을 권한다. 아니면 읽으면서 등장인물 메모를 하면 여기저기 시간과 장소를 옮겨 넘나드는 이야기를 따라잡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간단히 줄거리를 말하자면 주인공인 우주비행사 아인은 새로운 행성 가이아를 개척해서 지구인을 이주시킬 계획을 가지고 동료들과 우주선 펄서를 타고 우주로 간다. 그러나 갑자기 등장한 유성을 피하지 못해 우주선이 유성과 충돌하고 동료 둘을 잃고 아인만 가까스로 탈출선을 타고 오랜 시간만에 지구로 오는데 오는 사이 몸은 다 상하고 뇌만 살아남는 처참한 지경이 된다. 그에게는 단 하나뿐인 남동생 아라가 있는데 지구에 남았던 아라는 불의의 사고로 다리를 잃었고 자신의 대체 다리를 배양하는 휴론을 스스로 풀어준 후 자살을 한다. 동생의 자살 소식은 우주 비행중인 아인에게 큰 충격이었고 감당할 수 없는 충격 탓에 운전을 동료들이 맡아서 한 것이다. 그 사이 사고가 났기 때문에 아인은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린다.
아인이 혼자 이런 시련을 겪으며 탈출선을 타고 지구로 귀환하는 동안, 지구에서는 제2의 지구인 가이아로 가기 위해 쏜 핵엔진이 폭발해서 아메리카 반도로 추락했고 그 결과 지구 절반이 사라진다. 남은 사람들은 방사능에 피폭되어 죽고 다치고 아비규환이고 세계의 멸망이란 어떤 모습인가 익숙한 모습의 암울한 미래가 펼쳐진다.

남은 절반의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암흑의 땅이 된 아메리카 대륙으로 휴론을 보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보려고 하고, 이상하게도 보낸 족족 연락이 두절되자 마지막 수단으로 아인의 뇌를 이식한 안드로이드를 만들어서 정찰을 보낸다. 이후의 이야기는 지나친 스포라서 생략하고 또 줄거리가 중요한 소설은 아니다. 아포칼립스 소설이 그렇듯이 지구 대멸망이 진행되는 동안 그곳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 인간이 더이상 인간의 모습을 한 게 아니어도 어디까지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스스로 감정과 생각을 가진 휴론 같은 로봇이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그들을 과연 기계로만 취급할 수 있는가하는 윤리의 문제가 등장한다. 지금도 인공지능을 가진 기기와 대화를 하면서 외로움을 달래는 사람들이 있다. 그 기술이 더욱 발전해서 기계가 인간을 닮아갈 때 우리는 그들을 어디까지 로봇으로, 어디부터는 인간처럼 대하게 될까? 미래에는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서 인류가 생존할지도 정말 알 수 없는 일이고, 그 때에도 우리가 이런 모습의 인간으로만 살게 될지는 또 모르는 일이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어버리면 로봇과 다를 게 없듯이 로봇도 진화를 거듭해 인간과 같아지거나 그 이상이 된다면 어떤 대접을 받고 싶어할지 모를 일이다.

아인이 휴머노이드의 몸에 갇힌 잔인한 시절에도 카인이라는 휴론과 함께 희망의 씨앗을 뿌리듯이 익숙한 지구가 멸망해도 그것이 인류의 끝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휴론을 개발한 임교수가 본인은 췌장암으로 죽는 것을 선택한 반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신체를 배양해 삶을 연장하는 모습이 참으로 추해보였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세월이 변해도 사람이 사람다울 때 그 고유의 가치가 있다. 아마도 두뇌로도 신체 능력으로도 로봇에게 인간은 곧 따라잡힐 것이지만 인간다움을 잃지 않아야 인류의 미래가 있다고 믿으며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