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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 너머 ㅣ 북극곰 무지개 그림책 49
마리아 굴레메토바 지음, 이순영 옮김 / 북극곰 / 2019년 9월
평점 :
'울타리 너머'는 애완돼지 소소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독특한 그림책이다. 불가리아에서 태어난 저자 마리아 굴레메토바는 예술가인 부모님 밑에서 자랐는데 덕분에 그림에 대한 소양이 어릴 때부터 풍부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함께 정물화를 그리거나 산으로 소풍을 다니는 등 산으로 여행을 많이 다닌 경험이 이 책의 배경이 되었다. 덕분에 '울타리 너머'에는 그리운 자연 풍광이 넘쳐난다. 끝이 안 보이는 푸른 들녘, 같은 풍경이 저녁 무렵에는 황금빛으로 바뀌는 것까지 책장을 넘길수록 어딘가 머나먼 이상향을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은 자연 풍경만 감상하는 그림책이 아니다. 주인인 소년 안다와 그의 애완돼지 소소의 관계는 일견 단순해보이지만 삶에 필수적인 고민을 담고 있기에 책을 읽는 아이에게 가치있는 물음을 던진다. 갇혀사는 소소에게 자유란 무엇인지, 어떤 편리함을 희생해야 자유를 얻을 수 있는지, 또 안다가 소소에게 자기의 의견과 취향만을 강요하는 게 소소에게 있어서 얼마나 폭력적인지 등등 자세한 설명이 없어도 소소의 표정 변화와 상황만으로 깊이있게 와닿는다.
그저그런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을 보내도 어떤 계기가 없이는 미처 느끼지 못한 채 적응해버릴 때가 있다. 소소 역시 거대한 저택에서 안다라는 도련님의 애완돼지로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중 우연히 산책을 나갔다가 야생 맷돼지 '산들'을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다. '울타리 너머로는 갈 수 없다', 즉 집을 떠날 수 없다고 말하던 소소는 점점 산들이 있는 대자연을 갈망하게 된다. 또 산들이는 안다처럼 소소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법이 없이 소소의 뜻에 따라 그를 만나러 와준다. 인간 안다와 맷돼지 산들의 태도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진정한 우정이란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고, 내 의견만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안다는 소소를 마치 장난감처럼 다루며 자기가 좋아하는 옷만 입히거나 놀이의 상대로만 대했지만 산들은 울타리 너머로 갈 수 없다는 소소를 배려해서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그럼 얘기나 하러 다시 올게"라고 쿨하고 다정하게 말해준다. 그는 소소의 입장을 이해하고 헤아려주며 약속을 지키는 멋진 맷돼지이다.

소소의 마음이 어디로 향할지는 너무나 뻔한 일이다. 그림책에서 소소와 안다의 관계는 일방적이다. 안다는 말하고 소소는 듣기만 한다. 안다는 소소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보다보면 슬퍼진다.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 단어가 바뀌었지만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소소의 마음으로 인간의 집에서 살아갈까 마음이 아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