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빙이 녹기까지
권미호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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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18년 심훈문학상 신인상에 당선되어 작가가 된 권미호의 단편소설집이다. 총 7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몇몇 단편은 굉장히 사실적으로 요즘 취직 안 되는 청년들 혹은 좋은 곳에 절대 취직할 수 없는 하위 청년의 삶을 다큐처럼 보여주어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책장을 열자마자 시작하는 첫번째 단편, '오늘 줄서기'는 뭐든지 대신 줄을 서주는 라인맨의 이야기이다. 한 달에 백여만 원 한다는 영어유치원에 부모 대신 줄서기, 한정판 나이키 운동화를 대신 사주는 줄서기, 힘있는 교수의 각종 잡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그 교수 편에 줄서기 등 주인공 청년은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남을 대신해 줄을 서주는 알바를 하면서 허비한다. 당장 목구멍의 풀칠을 위해 돈 많은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자신의 시간을 판다. 어찌보면 남는 장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밤새 줄 서고 30만원 버는 유치원 입학 추첨 같은 것은 정보만 있다면 많은 사람이 지원할 꿀알바가 아닌가? 나이키나 유명 메이커의 콜라보 한정판 되팔기도 이미 널리 알려진 알바 방법이 되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젊은 시절 그것도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에 이런 저런 알바로 시간을 다 뺏기면 정작 본인을 위한 체력과 지력, 시간이 남아있을까? 알바가 알바로 끝나지 않고 8개월 이상의 생활이 되고 그러다 직업이 되면 어떨까? 하루만 일하고 그 30만원으로 용돈 쓰면 좋은데 생활비, 등록금 등 생존을 위한 비용으로 다 들어가고 남는 게 없다. 인간의 삶에는 잉여분이 꼭 필요하다. 그래야 그 잉여분으로 미래를 위한 어떤 일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년은 나이키 매장 앞에서 줄을 서다가 앞줄의 교통사고를 목격하지만 줄서기 중간업자인 슬라임은 누가 차에 깔리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뭐해, 돈 필요하지 않아?"라며 어서 다시 줄을 서라고 재촉할 뿐이다. 슬라임이 핸드폰 확인하라고 주인공의 손을 잡아빼는 통에 그가 늘 들고다니던 오래된 야구공이 바닥으로 굴러간다. 재미있는 암시다. 바닥으로 떨어져 떼굴떼굴 주인공에게서 멀어지는 야구공. 그렇게 꿈도 희망도 줄서는 사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 포기한 다른 선택에 대한 가치를 기회비용이라고 한다. 줄을 서면서 알바를 하는 사이 주인공은 자기 꿈을 날리는 것이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굴러가는 야구공처럼 꿈은 그렇게 멀어진다. 얼마나 암담하고 답답한가? 그나마 젊으니까 줄서기 알바도 하는 것이고 고시원 생활도 참을 만하다. 20대가 줄서기 알바 하는 것과 40대가 하는 것, 20대가 잠깐 옥탑방, 고시원에 사는 것과 40대에도 고시원에서 사는 것은 비교만으로도 숨막히지 않을까. 나는 그 청년이 그대로 학비가 없어 대학 졸업도 못하고 이런 저런 알바로 연명하다가 모든 것을 놓치고 40대가 되는 상상을 해봤다. 지금의 청년 실업이, 장기불황이 이대로 10년만 지속되면 정말로 현실이 되고야 말 것이다. 사람들은 노숙자들이 나면서부터 노숙자인 줄 아는데 아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만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그 중에는 회사 사장도, 멀쩡한 가정도 있었던 평범한 사람들이 아주 많다. 자신의 미래를 위한 잉여분을 가질 수 없는 청년들의 삶에 숨이 막힌다.

그 다음 단편은 "공항 옆 영화관"이다. 회사에서 단체로 홋카이도 촬영을 가기로 했지만 어찌어찌해서 둘만 남게 된 은설과 도영. 도영은 이미 아들과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지만 은설은 그 날을 계기로 그에게 빠져들어 연인 사이가 된다. 춥고 폭설이 내리는 날, 지연된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 옆 썰렁한 영화관에서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사람 사이, 사귀는 계기가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닐 수 있고 또 헤어지는 계기 역시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작가의 통찰력이 빛난다. 아이가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마음으로는 와닿지 않았던 은설이 막상 도영의 어깨에 걸쳐진 자그마한 아이를 보자 현실로 돌아온다. 은설이 읽은 글귀, '사랑이란 상대방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상력과 하는 것'이라는 말은 많은 깨달음을 준다. 도영에게 은설은 일 다음, 아이 다음, 아내 다음이다. 그저 짬짬히 한가할 때 만나는 여자. 그걸 깨닫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돌고 돌아 처음 만났던 공항 옆 영화관에서 이별을 결심하는 과정이 한 편의 영화같이 아름답고 잔잔하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작품은 '골목길의 란다'였다. 이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유빙이 녹기까지'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골목길의 란다' 는 좀 더 격렬하고 영화 같아서 재밌게 읽었다. 부모가 없이 자란 4명의 자매, 완다, 소다, 시다, 란다. 인상적인 이름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주인공인 막내 란다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골목길 다 쓰러져가는 단독에 사는 완다, 소다, 란다는 어릴 때 엄마가 죽은 이후 뿔뿔히 흩어졌다가 이름을 바꾸지 말라는 완다 언니 덕분에 다시 모여 살게 된다. 그러나 거친 세월 속에 조금씩 변형된 모습으로 돌아오는데 큰 언니 완다는 은행을 믿지 못해 돈을 천장에 숨기고 커다란 트렁크를 준비해놓고 살며 늘 술에 취해 있다. 둘째 소다는 80kg의 거구가 되어 돌아오는데 충격적인 외모 뿐만 아니라 모든 게 폭력적이다. 닭도 한번에 세 마리를 뜯어먹고, 말도 막하고 당연히 동생도 좀 패다가 중고나라 사기 등 자잘한 범죄로 경찰에 끌려간다. 오히려 끌려가서 다행일 판이다. 이렇게 둘째 소다 언니가 사라진 후 첫째 언니 완다 역시 천장에 숨겨둔 돈을 들고 늘 준비해둔 트렁크를 챙겨 집을 나간다. 남은 것은 란다인데 알바 뛰는 맥도날드 매장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다. 같이 일하던 현주 언니가 퇴직금을 미처 못 탄 채 짤린 것이다. 아무래도 퇴직금 주기 싫어서 매니저가 술수를 부린 것 같지만 참 우습지..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짤린 현주 언니는 억울하게 나가는 마당이라 그런가 햄버거를 싹 털어서 나가는데 그 죄를 란다에게 씌운다.

 

 

아..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누구에게도 쉽게 동정해서는 안 된다는 스트릿 법칙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인간은 오직 자기 생각 뿐인데 이게 얄궂게도 밑바닥으로 갈수록 심해진다. 왜냐하면 그 곳은 자비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잡토피아'에서 최군이 그렇듯이 여기서도 같이 일하던 매니저와 현주 언니가 란다 뒤통수를 친다. 그나마 매니저는 애초부터 그런 인간이라 마음의 대비가 가능했지만 동격으로 일하던 최군이나 현주 언니 같은 사람을 더 조심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젊음을 착취하는 노동 시장과 죄의식까지 몽롱해지는 가난한 현실. 란다야 힘내.

패스트푸드 알바, 배달 대행 등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생활이 나아지기 힘든 일자리인데 그나마도 퇴직금을 안 주려고 1년을 못 채우게 하는 꼼수를 부리고 또 그 피해자는 자기 죄를 저보다 아래인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고 나가는 먹이사슬을 보여준다. 란다가 돌보던 길고양이 깜지가 추악한 발에 살해된 날, 란다는 깜지를 입양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그 후회가 란다를 나아가게 한 걸까? 꽃집에서 일하는 셋째 시다 언니로 추정되는 여자가 주인에게 폭행당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용기를 내어 그녀를 오토바이에 태워 도망치는 란다! 아무도 쫓아올 수 없는 그 익숙한 골목길로 사라지는 두 여자가 보인다. 씩씩한 란다의 이야기는 좀 더 살을 붙여서 나중에 영상물로 제작되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권미호의 단편 소설 속 청년들은 젊지만 희망이 안 보인다. 그들은 아직 미숙해서 착취 당하고, 젊어서 이용당할 뿐이다. 심지어 그들이 20대의 터널을 지나 30, 40대가 된들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 줄서기 하던 '나', 잡토피아의 '세호', 골목길의 '란다' 모두 부모의 지원을 받지 못한 청춘들이다. 대신 집세를 내주고 학비나 생활비를 지원해 줄 부모가 없는 가난한 청년들은 그 가난에 꿈도 저당 잡힌다. 있는 자만 공부하고, 배경 있는 애만 좋은 데 취직하고 애초부터 공정 경쟁이 아닌 사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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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도쿄행 - 조선 지식인들의 세계 유람기
이상 외 지음, 구선아 엮음 / 알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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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도쿄행'은 총 6명의 구한말 지식인들의 세계 여행 기행문 모음집이다. 제목은 시인 그 '이상'을 뜻하기도 하고 이상적인 삶을 의미하는 理想의 중의어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인 이상의 도쿄행 여행기라고 소개하기에는 이상의 분량이 너무나 적다. 겨우 6페이지이다. 가장 기대했는데 분량이 적어서 아쉽지만 내용은 또 발군이다.

 

 

이상은 잠시 뒤에 다시 이야기하고 여행기의 배경이 되는 1920년대~30년대는 다들 알다시피 일제 강점기이다. 그나마 1920년대는 소위 일제의 문화통치라는 민족분열정책 시기(1919∼1931)에 해당하기 때문에 국문으로 이런 제한적인 글이나마 잡지와 신문 등에 실렸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 6명 중에는 독립운동가도 있고 친일파도 있다. 희한한 게 독립운동가인 허헌의 기행문을 읽어보면 에둘러서 아주 참으면서 전체 기행문 중 몇 줄만 썼어도 국권이 피탈된 수모와 울분, 민감한 정치 얘기를 할 수 없는 아쉬움 등이 행간에 많이 묻어나는 반면, 친일파인 노정일의 기행문에는 그 옛날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여기 저기 대학에서 공부하는 호사를 누렸음에도 순 자기 얘기 뿐이다. 미국 부인의 집에서 스쿨보이로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힘들었단 얘기, 장학금 탄 이야기, 미국에 대한 찬사 등으로 고국에 대한 안타까움은 전혀 없다. 분량을 다 읽자 화가 날 지경이었다. 별난 인간이 친일파가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지극히 평범한 이기주의자가 친일파가 되는 것이다. 자기 공부, 자기 고생, 자기에게 잘해준 사람 등 온통 관심이 자기뿐인 사람들이 어떻게 일제시대에 친일을 안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이역만리 타국에 가서 멋진 구경을 하면 뭐할 것이며 거창한 공부를 하면 무슨 쓸모가 있을까? 결국 공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배운 것을 남을 위해 이롭게 쓸 수 있느냐는 고민이 필요하다. 똑같이 미국에 가고 세계 여행을 해도 허헌, 노정일 이 두 사람의 향후 발자취는 굉장히 다르다. 노정일의 여행은 마치 요즘 사람들 여행 같다. 워킹홀리데이를 하고 대학 학위를 따고 간간히 기차여행을 하는 등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다. 일제 강점기에 미국까지 가서 그 많은 교육을 받고 돌아와 기껏 한 게 친일. 차라리 못 배우고 무식해서 먹고살기 위해 친일을 했다면 모를까 유학파 지식인의 친일은 더욱 한심하게 느껴진다.

돌아와서 다시 찐빵 속 단팥인 '이상의 도쿄행'을 아껴가며 읽었다. 독자들이 이 글만 곶감처럼 빼먹고 책 안 살까봐 가운데 콕 박아둔 거 같아 슬며시 웃음이 난다. 이상은 1936년에 결혼하고 1937년에 폐결핵 악화로 죽었다. 원래 폐가 안 좋은 지병이 있었지만 1937년 사상범으로 옥살이를 한 게 결정타였을 것이다. 폐결핵 악화로 출감했다지만 감옥에서 병이 그냥 악화되었겠는가. 일제가 거의 죽을 때 다 되었으니 놔준 것일텐데 씁쓸한 마음으로 약력을 읽었다. 다른 사람들 중에는 거의 70페이지의 기행문도 있었는데 이상은 겨우 5페이지 남짓한 짧은 글이다. 그러나 시인 이상의 동경 여행기가 다른 이의 70페이지보다 훨씬 강렬함은 왜일까? 시인답게 이상의 글은 다른 이들과 결이 다르다. 어디가서 뭐하고 뭐 보고 같은 일정 나열식의 여행기가 아니고 또 할 말을 억지로 숨기느라 고민한 흔적도 없다. 함축적이고 자유분방하고 도쿄의 주요 거리에 대한 감상이 거의 전부이다. 일기에 가깝지만 요즘 읽어도 무척 세련되었다.

마지막 말은 낭만이란 것이 폭발한다. "이태백이 놀던 달아! 너도 차라리 십구 세기와 함께 운명하여 버렸었던들 작히나 좋았을까." 마치 탄식같기도 한 이 대사 한 줄에 SF소설의 아포칼립스 장르처럼 세계의 멸망, 대재앙을 바라는 마음이 여실히 느껴진다. 이상이 이런 심정으로 돌아본 도쿄의 거리는 거의 90년이 흐른 지금과도 별 차이가 없어서 놀랍다. 가솔린 냄새, 도쿄에 오고 나서 이튿날 지진, 자동차, 우유에 탄 커피, 후지산을 보고 싶다, 긴자, 택시, 기노쿠니야 서점, 지하철까지. 어떻게 이상이 본 동경과 내가 가 본 도쿄가 이리도 똑같을까? 나는 드라마 '시그널'처럼 이상과 마치 동시대에 살고 있는 심정을 느끼며 그 아까운 달랑 6페이지를 넘겨버렸지만 그동안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귀한 글이었기에 그만한 가치를 느낀다.

편집상 아쉬운 부분은 이상은 곶감이니까 가운데 박았다고 해도 글자 폰트가 너무 작고 상대적으로 여백은 광활하다. 책 판형이 작아도 폰트를 좀 더 키워주면 주석도 없는 쓸데없는 여백도 줄이고 40대 이상의 독자들도 읽기 편할 텐데 갖고 있는 소설 등과 비교해봐도 글자가 다소 작아서 초반에는 눈이 불편했다. 책 표지는 1916년 김용조 작가의 해경이라는 작품이다. 근대 서양화가의 풍경화인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 화가라 놀랐고 또 멋지다. 확 망해버렸으면 싶은 그 시대의 세계 기행문과 어울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표지이다. 그저 철없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지금에 감사하며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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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와 오토바이 북극곰 무지개 그림책 51
케이트 호플러 지음, 사라 저코비 그림, 이순영 옮김 / 북극곰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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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길을 떠나는 꿈을 꾸는 토토의 이야기는 잘 익은 노란 밀밭의 풍경으로 시작한다. 이 동화책을 읽으며 과연 이 책은 어린이만을 위한 책일까 생각했다. 매일 밤 차가 다니는 도로를 바라만보며 저 먼 곳을 상상만 하는 토토의 쓸쓸한 모습은 늘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며 떠나고 싶고 바꾸고 싶지만 용기가 없어서 체념하고 사는 어른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토토는 다행이도 슈슈 할아버지가 있었다. 멋진 라이더 복장을 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던 할아버지. 이제는 늙어서 밀밭을 떠날 수 없어도 그에게는 신나는 모험 이야기가 있다. 토토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함께 여행을 한 듯 만족감을 느낀다. 이 또한 요즘 사람들이 여행 프로그램, 정글, 자연인 등을 보며 위로받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넘긴다.

 

 

그러나 토토와 슈슈 할아버지의 다정한 한 때도 아주 슬픈 소식으로 끝이 난다. 동화책에서는 토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암시만 있을 뿐 직접적인 묘사는 없다. 어느 어두운 밤, 토토가 그 긴 귀를 축 늘어뜨리고 슬픔에 잠긴 모습과 '아주 슬픈 소식'이란 단어로 추측할 뿐이다. 토토 옆에 놓인 화분의 꽃잎마저 시들고 떨어져있다. 아무 날도 아닌 때와 꽃잎만으로도 대조를 준 작가의 섬세함이 빛난다.

토토의 변화는 갑작스럽지 않다. 할아버지가 남긴 오토바이를 보며 그는 그대로 당근도 캐고 일을 하며 계절을 보낸다. 그저 조용하고 아무 일 없는 매일 매일. 어쩌면 인생의 진짜 불행은 토토의 밀밭처럼 아무 일 없이 그저 세월만 흐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가을도 가고, 겨울도 가고, 다시 여름이 오는 동안 토토는 조용히 마음의 변화를 겪는다. 할아버지가 부쩍 그리워진 토토는 밖에 세워둔 오토바이를 집으로 들인다. 할아버지의 라이더 자켓을 걸치고 오토바이와 함께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는 토토의 모습이 몽환적으로 그려졌다.

그림이 어쩌나 아름다운지 중반까지의 이야기는 더욱 쓸쓸하게 다가오지만 다행히 우리의 토토는 용기를 냈다. 안 가 본 길을 떠나는 것, 그것은 겁이 나는 일이다. 토토는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고 싶으면서도 두려운 마음을 동시에 안고 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꿈에서 오토바이의 부릉부릉 소리를 듣자 한 번 나가보기로 결심한다. "저 길 끝까지만 가 보자." 토토의 이 말은 큰 의미가 있다. 첫 발자국을 떼는 것, 힘들지만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일이다. 아이들은 토토가 용기내는 모습을 보면서 은연 중에 배울 것이다. 용기를 내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토토는 귀를 펄럭이며 오토바이를 타고 달린다. 그림책의 판형이 크고 양 페이지를 다 써서 그림을 그렸기에 무척 시원시원하다. 영화처럼 보는 맛이 있다!

 

 

과감하고 아름다운 붓터치 속에서 숲속의 계절감은 더욱 풍성히 드러나고 토토의 여행 속에서 책을 넘기는 나도 같이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밀밭을 지나 끝없는 길도 달리고 삼나무 숲을 거쳐 갈매기가 끼룩거리는 바닷가, 또 선인장과 태양이 작렬하는 사막까지 거침없는 여행 속에 토토는 성장한다. 처음에는 저 길 끝까지만 가보자고 한 토토가 이제는 밀밭으로 돌아오는데 여름 한철이 걸릴 정도로 용감해졌다. 이제 그에게 떠나는 것은 더 이상 두려운 일이 아니다. 처음에 슈슈 할아버지가 "용기만 있다면 정말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단다. 낯선 곳도 오랜 친구처럼 느껴지지." 라고 말한 것처럼 당당하고 멋진 모습으로 여행에서 돌아와 동네 아이에게 모험담을 이야기해 줄 정도로 성숙해졌다. 토토의 얼굴에서 더 이상 아이의 모습은 없다. 토토의 밀밭은 여전히 조용하지만 예전같이 죽은 듯 쓸쓸한 조용함이 아니다.

 

마지막 면지에는 봄을 상징하는 밀밭의 푸르름이 펼쳐지며 끝을 맺는다. 처음 책장을 펼쳤을 때는 노랗고 잘 익은 가을의 밀밭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면지까지 계절의 흐름이 더없이 풍성하고 아름답다. 그림 작가인사라 저코비 씨는 필라델피아 외곽의 숲속을 헤매며 자랐다고 하고, 글 작가인 케이트 호플러 씨는 조용한 오하이오주의 멀리 고속도로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 살고 있다는데 어쩌면 두 분 다 그런 경험을 잘 농축해서 담았나 감탄하며 봤다. 생각보다 페이지수도 많고 이야기와 그림의 조화도 아주 훌륭한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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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력 - 일과 인생에서 롱런하는 사람들의 비밀
다사카 히로시 지음, 정혜주 옮김 / 새로운현재(메가스터디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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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직장 생활 중 성장이 멈췄다고 느끼지만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는 직장인들을 위한 경제, 경영서이다. 하지만 결국 더 나은 자신이 되어서 현재의 정체 상황을 타파하고 성장하는 힘, 즉 성장력을 높이는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기계발서로 보아도 무방하다.

저자는 도쿄대와 도쿄대학원을 나와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우수한 재원인데 졸업 후 원하는대로 연구소에 취업하지 못하고 민간기업 기획영업부에 들어가게 되어 실망한다. 저자가 7년이나 늦었다고 좌절한 나이가 겨우 30세라 요즘 우리나라에서 박사 학위까지 따고 취업하는 청년들과 비교하면 기가 막혀 웃음이 나지만 군대를 안 가는 일본 남자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는 그 우수한 머리로 회사 생활도 잘 했냐하면 그렇지 않은데서 이 책은 시작한다.

당연히 말이지만 일머리와 공부머리는 다르다. 학력이 높다고 꼭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그 이유를 구구절절 풀어서 설명했지만 사실 우리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지식과 지혜는 다르고 학교에서 한 공부가 직장생활에서는 거의 무쓸모라는 게 밝혀진 지 오래이다. 지금도 기업들이 지원자 스펙을 보는데 여념이 없지만 그렇게 고학력, 고스펙을 가진 사람들만 뽑아서 우등생들로만 회사가 굴러가냐하면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스펙 너머의 뭔가를 보기 위해 다양한 경험을 추가하는 추세이기도 하다.

 

 

그럼 저자는 어떻게 또래보다 입사가 7년이나 늦은 난관을 극복했을까? 그는 7가지 벽과 해결책을 제시한다. 책에서는 굉장히 쪼개서 얘기하고 있는데 다 읽고나니 나는 한 단어로 비결을 축약했다. 바로 '겸손'이다. 겸손한 자세로 연구하듯이 상급자, 동료, 고객을 보고 배우고 계속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결 7개의 주제는 '겸손'으로 통한다.

 

 

유명 대학을 나온 사람은 자꾸 자기 전문지식에 기대고, 논리적 사고로만 판단하려고 하는데 지식보다 중요한 게 지혜라는 것이다. '나는 일을 잘해', '나는 유명 대학을 나왔어'라는 자만이 성장을 가로막는다. 마찬가지로 그런 자만심이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현재 자신을 똑바로 보는 것을 방해한다. 지식과 지혜는 엄연히 다르는 것도 강조한다. 지혜는 경험과 인간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지식의 세계는 이미 인공지능이 많이 접수한 상태이니 지식에만 의존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일침을 놓았다.  

그럼 그런 실패의 경험을 통해 지혜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반성이다. 저자는 밤마다 5분씩 시간을 투자해서 반성 일기를 쓰라고 권한다. 후회하는 것과 반성하는 것은 다르므로 구체적으로 이런 상황이 또 온다면 어떻게 할지 객관적으로 반성해서 글로 써보는 과정을 거치라고 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반성 일기를 쓰면서 나와 상대의 마음을 동시에 보게 된다. 반성 일기를 통해 스스로를 바라보는 또 다른 자아와 대화하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 마음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성장을 추구하라', 이것이 저자의 비결이다.

 

 

 

같은 의미로 자신만 바라보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볼 줄 알아야하고 또 상사와 동료의 마음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동료와 상사의 신임을 얻지 못한 사람이 낸 기획안이 통과된다 해도 그들이 지원해주지 않으면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없다. 저자는 심리학 책 아무리 읽어도 남의 마음 못 읽는다고 봤다. 깊은 지혜는 현실의 경험을 통해 생기는 것이지 책 읽는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말 들으면 이 책을 읽는 것도 소용없나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건 아니다.

그만큼 자만심을 버리고 남의 마음도 좀 읽으라고 권하는 것이다. 독불장군식 태도로는 회사생활에서 성공하기 힘들고 곧 벽에 부딪힐 테니 타인의 말투, 시선, 행동, 태도, 분위기 등에 신경써서 민감하게 감지하는 연습을 하면 지혜가 생긴다고 일러주고 있다. 이 책을 사회 초년생 때 진작 읽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그 때는 이상한 상사를 만나거나 안 맞는 동료 때문에 힘들어도 그 사람들을 연구할 생각은 못하고 어떻게 하면 안 마주칠까, 아니면 그만둘까만 궁리했었다. 저자처럼 남들보다 스킬이 떨어진다고 느낄 때 겸손한 자세로 끝없이 배우고 반성하고 남들도 좀 연구했으면 많이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탓이다'라는 마음, 실패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고 남에게서는 장점을 찾아 배우는 자세, 타인의 마음을 읽어서 상황을 유연하게 파악하고 환경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영리함, 동료와 상사에게 호감을 얻는 사람이 되는 법 등 다양한 조언이 꽉 차 있다. 중간 중간 일본인 특유의 꼼꼼함 때문에 조금 오글거리기도 하지만 다 피와 살이 된다고 생각하고 겸손한 자세로 읽었다. 책을 읽을 때에도 꼭 한 가지는 얻어가야지 하고 보면 가볍게 읽을 때와는 다르다. 결국 저자의 성공담에 기존에 못 들어본 대단한 비결 따위는 없었다. 인생은 그 자체로 끝없는 공부, 끝없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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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가 된 의사 이야기 - 정신과 의사 이시형의 마음을 씻는 치유의 글과 그림!
이시형 지음 / 특별한서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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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형 박사님이 유명한 분인 줄은 알았지만 이번 책이 100번째라고 한다. 책을 이렇게나 많이 내셨을 줄이야... 막상 '이번 농부가 된 의사 이야기'라는 문인화+에세이를 읽어보니 책을 많이 낸 분은 오히려 힘을 빼고 쓰시는 구나 싶었다. 여백이 넘치는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글은 흙을 닮았고 다소 간략한 그림과 그 제목만 봐서는 어떤 내용인지 알기 어려운데 곁들인 글이 짧게라도 설명 역할을 해줘서 이해하기가 쉬웠다. 문인화라는 것이 전문화가가 아니라 문인들이 그리는 그림이라 아마추어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문외한의 눈으로 봐도 박사님의 그림이 대가들처럼 작품적으로 잘 그린 것 같지는 않지만 그 풍류와 멋만은 수준급이다. 책의 앞편은 농부가 된 의사 이야기로 주로 산골에서 살면서 겪은 소회, 과거에 대한 회상, 인생 이야기가 담겼고 뒷편은 사계-봄, 여름, 가을, 겨울을 주제로 글과 그림을 실었다.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진지한 인생 이야기, 산골살이, 계절이 지나가는 것에 대한 감상이 나오지만 '온동네 이야기 다 알고 있는 놈 믿지 마라'처럼 위트와 해학이 넘치는 글도 있어서 무슨 명언처럼 붓글씨로 쓴 이 말에 빵 터진다. 마치 박사님 스스로가 모 프로그램처럼 자연인이 되어서 깊은 산 속에서 소박하게 사시는 것 같고 그 마음의 여유가 고스란히 책에서도 전해진다.

 

 

 '농부가 된 의사 이야기'라는 책 제목은 애초에 저자가 연 문인화 전시회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문인화가 갖는 특징이 풍부한 여백인지라 책 편집에서도 그 여백의 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아래 '남산에 올라 비에 젖은 서울을 내려다보니'를 봐도 알 수 있지만 글과 그림이 균형이 잘 잡혀 있고 비오는 날, 저자로 보이는 모자를 쓴 사람이 저 꼭대기 남산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고즈넉한 풍경이 아름답게 실렸다. 많은 선을 쓰지 않아도, 그저 먹 한가지 단색으로 그려도 그림을 감상하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게다가 높은 산에서 수많은 빌딩을 보며 저자가 젊은 시절 느꼈던 '나는 내 한 몸 누일 방 한 칸이 없어 애가 타는데, 저들은 어떻게 저 높은 빌딩을 지을 수 있을까?'하는 장면에서는 저런 생각을 한 사람이 나말고도 많겠구나 싶어서 울컥했다. 나도 저렇게 똑같이 산아래 끝도 없이 펼쳐진 집들을 보며 저렇게 많은 집이 있는데 왜 우리집 한 칸이 없을까 우울해했던 적이 있었다.

 

이 책은 언제 보아도 좋지만 굳이 계절과 시간을 꼽으라면 겨울밤이 딱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저녁도 먹고 잠자리에 들기 전 차 한 잔 마시면서 한 장 한 장 펼쳐보면 은근한 재미가 있다. 김홍도 전시회에서 본 신선과 닮은 풍류를 여기서도 간간히 만날 수 있다. '겨울밤이 깊어야 깊은 차 맛이 제대로 납니다'를 보면 아랫목에 앉아 생각에 잠긴 채 그윽한 차 한 잔 마시는 사람 그림과 그에 대한 글이 함께 실려있다. 차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겨울이어야 하고, 온 세상이 조용한 밤이어야 한다는데 이 책을 읽는데도 겨울밤, 그만한 때는 또 없는 것 같다. 힐링이라는 게 굳이 장소가 중요할까? 이렇게 책 한 권 마주하고 차 마시면 힐링이고 나는 자연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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