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빙이 녹기까지
권미호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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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18년 심훈문학상 신인상에 당선되어 작가가 된 권미호의 단편소설집이다. 총 7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몇몇 단편은 굉장히 사실적으로 요즘 취직 안 되는 청년들 혹은 좋은 곳에 절대 취직할 수 없는 하위 청년의 삶을 다큐처럼 보여주어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책장을 열자마자 시작하는 첫번째 단편, '오늘 줄서기'는 뭐든지 대신 줄을 서주는 라인맨의 이야기이다. 한 달에 백여만 원 한다는 영어유치원에 부모 대신 줄서기, 한정판 나이키 운동화를 대신 사주는 줄서기, 힘있는 교수의 각종 잡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그 교수 편에 줄서기 등 주인공 청년은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남을 대신해 줄을 서주는 알바를 하면서 허비한다. 당장 목구멍의 풀칠을 위해 돈 많은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자신의 시간을 판다. 어찌보면 남는 장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밤새 줄 서고 30만원 버는 유치원 입학 추첨 같은 것은 정보만 있다면 많은 사람이 지원할 꿀알바가 아닌가? 나이키나 유명 메이커의 콜라보 한정판 되팔기도 이미 널리 알려진 알바 방법이 되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젊은 시절 그것도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에 이런 저런 알바로 시간을 다 뺏기면 정작 본인을 위한 체력과 지력, 시간이 남아있을까? 알바가 알바로 끝나지 않고 8개월 이상의 생활이 되고 그러다 직업이 되면 어떨까? 하루만 일하고 그 30만원으로 용돈 쓰면 좋은데 생활비, 등록금 등 생존을 위한 비용으로 다 들어가고 남는 게 없다. 인간의 삶에는 잉여분이 꼭 필요하다. 그래야 그 잉여분으로 미래를 위한 어떤 일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년은 나이키 매장 앞에서 줄을 서다가 앞줄의 교통사고를 목격하지만 줄서기 중간업자인 슬라임은 누가 차에 깔리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뭐해, 돈 필요하지 않아?"라며 어서 다시 줄을 서라고 재촉할 뿐이다. 슬라임이 핸드폰 확인하라고 주인공의 손을 잡아빼는 통에 그가 늘 들고다니던 오래된 야구공이 바닥으로 굴러간다. 재미있는 암시다. 바닥으로 떨어져 떼굴떼굴 주인공에게서 멀어지는 야구공. 그렇게 꿈도 희망도 줄서는 사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 포기한 다른 선택에 대한 가치를 기회비용이라고 한다. 줄을 서면서 알바를 하는 사이 주인공은 자기 꿈을 날리는 것이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굴러가는 야구공처럼 꿈은 그렇게 멀어진다. 얼마나 암담하고 답답한가? 그나마 젊으니까 줄서기 알바도 하는 것이고 고시원 생활도 참을 만하다. 20대가 줄서기 알바 하는 것과 40대가 하는 것, 20대가 잠깐 옥탑방, 고시원에 사는 것과 40대에도 고시원에서 사는 것은 비교만으로도 숨막히지 않을까. 나는 그 청년이 그대로 학비가 없어 대학 졸업도 못하고 이런 저런 알바로 연명하다가 모든 것을 놓치고 40대가 되는 상상을 해봤다. 지금의 청년 실업이, 장기불황이 이대로 10년만 지속되면 정말로 현실이 되고야 말 것이다. 사람들은 노숙자들이 나면서부터 노숙자인 줄 아는데 아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만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그 중에는 회사 사장도, 멀쩡한 가정도 있었던 평범한 사람들이 아주 많다. 자신의 미래를 위한 잉여분을 가질 수 없는 청년들의 삶에 숨이 막힌다.

그 다음 단편은 "공항 옆 영화관"이다. 회사에서 단체로 홋카이도 촬영을 가기로 했지만 어찌어찌해서 둘만 남게 된 은설과 도영. 도영은 이미 아들과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지만 은설은 그 날을 계기로 그에게 빠져들어 연인 사이가 된다. 춥고 폭설이 내리는 날, 지연된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 옆 썰렁한 영화관에서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사람 사이, 사귀는 계기가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닐 수 있고 또 헤어지는 계기 역시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작가의 통찰력이 빛난다. 아이가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마음으로는 와닿지 않았던 은설이 막상 도영의 어깨에 걸쳐진 자그마한 아이를 보자 현실로 돌아온다. 은설이 읽은 글귀, '사랑이란 상대방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상력과 하는 것'이라는 말은 많은 깨달음을 준다. 도영에게 은설은 일 다음, 아이 다음, 아내 다음이다. 그저 짬짬히 한가할 때 만나는 여자. 그걸 깨닫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돌고 돌아 처음 만났던 공항 옆 영화관에서 이별을 결심하는 과정이 한 편의 영화같이 아름답고 잔잔하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작품은 '골목길의 란다'였다. 이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유빙이 녹기까지'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골목길의 란다' 는 좀 더 격렬하고 영화 같아서 재밌게 읽었다. 부모가 없이 자란 4명의 자매, 완다, 소다, 시다, 란다. 인상적인 이름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주인공인 막내 란다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골목길 다 쓰러져가는 단독에 사는 완다, 소다, 란다는 어릴 때 엄마가 죽은 이후 뿔뿔히 흩어졌다가 이름을 바꾸지 말라는 완다 언니 덕분에 다시 모여 살게 된다. 그러나 거친 세월 속에 조금씩 변형된 모습으로 돌아오는데 큰 언니 완다는 은행을 믿지 못해 돈을 천장에 숨기고 커다란 트렁크를 준비해놓고 살며 늘 술에 취해 있다. 둘째 소다는 80kg의 거구가 되어 돌아오는데 충격적인 외모 뿐만 아니라 모든 게 폭력적이다. 닭도 한번에 세 마리를 뜯어먹고, 말도 막하고 당연히 동생도 좀 패다가 중고나라 사기 등 자잘한 범죄로 경찰에 끌려간다. 오히려 끌려가서 다행일 판이다. 이렇게 둘째 소다 언니가 사라진 후 첫째 언니 완다 역시 천장에 숨겨둔 돈을 들고 늘 준비해둔 트렁크를 챙겨 집을 나간다. 남은 것은 란다인데 알바 뛰는 맥도날드 매장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다. 같이 일하던 현주 언니가 퇴직금을 미처 못 탄 채 짤린 것이다. 아무래도 퇴직금 주기 싫어서 매니저가 술수를 부린 것 같지만 참 우습지..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짤린 현주 언니는 억울하게 나가는 마당이라 그런가 햄버거를 싹 털어서 나가는데 그 죄를 란다에게 씌운다.

 

 

아..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누구에게도 쉽게 동정해서는 안 된다는 스트릿 법칙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인간은 오직 자기 생각 뿐인데 이게 얄궂게도 밑바닥으로 갈수록 심해진다. 왜냐하면 그 곳은 자비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잡토피아'에서 최군이 그렇듯이 여기서도 같이 일하던 매니저와 현주 언니가 란다 뒤통수를 친다. 그나마 매니저는 애초부터 그런 인간이라 마음의 대비가 가능했지만 동격으로 일하던 최군이나 현주 언니 같은 사람을 더 조심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젊음을 착취하는 노동 시장과 죄의식까지 몽롱해지는 가난한 현실. 란다야 힘내.

패스트푸드 알바, 배달 대행 등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생활이 나아지기 힘든 일자리인데 그나마도 퇴직금을 안 주려고 1년을 못 채우게 하는 꼼수를 부리고 또 그 피해자는 자기 죄를 저보다 아래인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고 나가는 먹이사슬을 보여준다. 란다가 돌보던 길고양이 깜지가 추악한 발에 살해된 날, 란다는 깜지를 입양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그 후회가 란다를 나아가게 한 걸까? 꽃집에서 일하는 셋째 시다 언니로 추정되는 여자가 주인에게 폭행당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용기를 내어 그녀를 오토바이에 태워 도망치는 란다! 아무도 쫓아올 수 없는 그 익숙한 골목길로 사라지는 두 여자가 보인다. 씩씩한 란다의 이야기는 좀 더 살을 붙여서 나중에 영상물로 제작되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권미호의 단편 소설 속 청년들은 젊지만 희망이 안 보인다. 그들은 아직 미숙해서 착취 당하고, 젊어서 이용당할 뿐이다. 심지어 그들이 20대의 터널을 지나 30, 40대가 된들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 줄서기 하던 '나', 잡토피아의 '세호', 골목길의 '란다' 모두 부모의 지원을 받지 못한 청춘들이다. 대신 집세를 내주고 학비나 생활비를 지원해 줄 부모가 없는 가난한 청년들은 그 가난에 꿈도 저당 잡힌다. 있는 자만 공부하고, 배경 있는 애만 좋은 데 취직하고 애초부터 공정 경쟁이 아닌 사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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