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름만 있는 계절에 네가 왔다 ㅣ K-포엣 시리즈 13
이영주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0년 6월
평점 :
시를 일상적으로 읽지는 않지만 휴가철에는 꼭 시를 읽고 싶네요. 제목도 아름다운 "여름만 있는 계절에 네가 왔다"는 올 여름 휴가 저의 원픽 시집이 되었습니다.
출판사 아시아는 K포엣과 K픽션 시리즈를 내고 있는데 정말 좋은 한국 현대시와 소설을 외국 독자를 위해 번역도 해서 영문판을 동시에 출간하고 있어요. 저는 K포엣은 처음이지만 K픽션은 몇 권 읽어봐서 자연히 관심이 갔습니다. 이래서 시리즈를 내는 건 중요해요.

실은 읽기 전에 어딘가 로맨틱한, 그러면서도 작품 분위기는 '무슨 너의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같은 걸 상상했으나 불경한 저의 기대는 왕장창 무너졌네요. 역시 책을 펼치기 전에 함부로 상상은 금물인가봐요.
"여름만 있는 계절에 네가 왔다"는 심지어 시의 제목도 아니고 "순간과 영원"이라는 시의 일부 내용에 불과했으니 여름만 있는 계절에 네가 왔다 다음 구절은 '불탄 얼굴로 왔다' 입니다. 아.. 시에 익숙치 않은 초보 독자는 조금 좌절합니다. 멋대로 상상하면 안되겠다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읽어갔습니다.
앞으로의 글은 순전히 개인적인 저의 감상일 뿐이니 전문적인 시 해석을 원하시는 분은 출판사 소개나 다른 서평을 읽어보시는 게 도움이 되실 것 같아요.
제가 느낀 이영주 시인의 세계관은 꽤 어두운 편입니다. 죽음과 악몽, 노동, 고통 이런 단어가 떠오르는 내용이 상당히 많아서 읽는 내내 울적해졌어요. 심지어 밤에 보기에는 조금 무서운 부분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꼭꼭 씹어먹듯이 시집을 읽어갔습니다.
실린 시를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제가 좋아하는 시 몇 편이 기억에 남습니다. 모든 예술 작품은 작가의 경험과 독자의 경험이 어딘가에서 만나는 지점에서 대화가 시작되는 것 같아요.
60페이지의 시인노트를 보면 아래와 같은 제주 공항에서의 일화가 실렸습니다. 비오는 제주에 시인은 혼자 갔나봅니다. 어지러웠고 그 때문에 무서웠고 삶이 어색해서 공항에서 조금 울었다라고 적혀있죠.

저는 이 시를 읽으며 20년도 전에 일본에 혼자 유학간 둘째날이 떠올랐어요. 혼자 공항에서 픽업을 온 낯선 사람을 따라 이미 으슥해진 밤시간에 역시 처음 본 여럿이 봉고차에 실려 기숙사로 갔죠. 첫날은 벌벌 떨면서 겨우 잠들었는데 다음날 해가 말짱하게 뜨자 집에 보고를 하러 슬리퍼 질질 끌고 공중전화로 갔습니다. 수화기를 들어 동전을 넣은 그 순간 웬지 눈물이 왈칵 쏟아져 전화는 하지 못했네요.
그 때 분명히 어지럼증을 느꼈어요. 설명하기는 어렵네요. 삶이 어색해서 공항에서 울었다는 기분을, 내가 원해서 간 거지만 시인이 말한 따뜻한 몰락을 꿈꾸고 있었다는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저는 시인이 슬프게 노래한 제주 4.3사건이나 저 먼 곳에서 고된 노동을 하는 외국인 염료공의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또 어느 지점에서는 무척 공감하게 됩니다.
"열대 식당"이란 시입니다. 이미 죽은 작은 아버지와 맵고 뜨거운 국수를 먹는 열대 식당을 읽다보면 몽환적인 환상의 세계로 빠져드네요.

까맣고 긴 손가락을 드는 조금 젊어진 작은 아버지. 왜 꿈에서는 죽은 사람이 더 젊게 나오잖아요? 어떻게 이런 지점을 섬세하게 짚었는지 감탄하고 맙니다. 그것도 대부분의 독자에게 현실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계시다면 조금 뜬금없는 작은 아버지 얘기가 더 실감나게 다가올 것 같네요. 작은 아버지란 아주 멀지도 않지만 어딘가 남 얘기 같잖아요?
저는 저 열대 식당을 읽으며 작년에 읽었던 SF소설이 떠올랐는데 안타깝게도 제 뇌가 제목과 작가를 기억하지 못하는군요. 그 때도 필리핀이나 그 비슷한 이국의 어느 열대 지방에서 맞으면서 고된 노동을 하던 소년과 엄마를 찾아 온 소녀의 이야기였는데 이 시에서도 그 소설과 똑같이 도마뱀 꼬리가 나옵니다.
나는 가 본 적도 없는 어느 더운 섬나라, 출몰하는 도마뱀, 기침을 하며 먹는 맵고 뜨거운 국수, 익숙치 않는 향, 퉁퉁 불어나 그릇 밖으로 흘러넘치는 국수.
이 쯤 되면 일개 독자인 저도 참을 수 없이 열대의 어느 식당에서 퉁퉁 불은 국수를 먹으며 아직 죽지도 않은 나의 작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식당 밖에서 작은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실제 저의 시퍼렇게 살아계시는 작은 아버지가 들으면 기함할 소리겠지만..
다소 어려운 현대시의 허들을 넘으면 시인이 직접 쓴 에세이가 선물처럼 거의 마지막에 실려있습니다. 무척 재밌게 읽었던 "안경을 썼지". 안경 쓰는 사람이라면 두려워하며 볼 내용입니다.

한쪽 시력을 상실하게 된 너무나 리얼한 이야기기에 화들짝 놀라고 그 섬세한 묘사에 한 번 더 질려버리네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영주 시인은 정말이지 본인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모르는 세계를 최대한 가깝게 느끼기 위해서 자세히 보는 습관이 있고, 자세히 쓰는 습관도 생겼다"고 합니다. 이건 시집을 읽어보면 무슨 소리인지 금방 알게 됩니다.

시가 소설이나 설명문은 아니기에 시인의 의도나 내용을 백퍼 이해할 수는 없지만 무척 세세하고 섬세한 묘사에 섬뜩 놀라기도 하고 또 어느 순간 따뜻한 한 줄 글에 안심하기도 했거든요.
"P60. 하지만 다정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불행을 밀어낸다. 중략..
P61. 전광수커피에서 커피 마시던 시절 생각이 났다. 그 날 우리, 살짝 들떴고 행복했어. 울지 말자, 친구야. 삶이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닐 거야"
위와 같은 싯구를 시인의 시집에서 더 많이 보고 싶네요. 그냥 그렇다구요. 다 읽고 나니 괜시리 제주 공항도 가고 전광수커피도 가고 싶어진 어느날 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