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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빚을 져서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평점 :

예소연 작가의 신작 소설 <영원에 빚을 져서>은 은 깊은 우정과 역사의 아픔을 교차시키며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관계의 본질을 섬세하게 탐구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캄보디아 해외봉사단에서 함께 활동했던 친구 '란'으로부터, 오랜 시간 연락이 없었던 친구 '석'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프놈펜으로 향한다. 석이를 찾아 나선 여정은 단순한 재회의 이야기를 넘어, 세 친구 사이에 맺혔던 오해와 상처, 배신감과 수치심의 흔적을 마주하는 길이 된다.
작품은 2010년 프놈펜 물축제에서 발생한 압사 사고와 2022년 이태원 참사를 배경으로 하여, 개인의 기억과 상실을 사회적 참사의 맥락 안에서 다층적으로 펼쳐 보인다. 작가는 현실의 비극을 소설의 무대로 삼되, 그것을 단순한 설정으로 소비하지 않고 "애도와 공감의 윤리는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또한,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하고 오만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끝내 이해할 수 없다는 절망 안에서도 서로를 향해 애쓰는 일이 왜 여전히 의미 있는지 묻는다.
작품은 한 인물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결국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여정으로 이어진다. 화자와 친구 란은 석이라는 인물을 따라 프놈펜으로 향하지만, 그 여정의 목적지는 석이 아니라 결국 자신이었다. 그 길 위에서 화자는 오래된 기억과 쌓여 있던 감정, 말하지 못했던 진심과 무심코 지나쳤던 상처들을 하나씩 마주한다. 석이라는 존재는 그들이 과거에 맺었던 관계의 이름이자, 그 관계 속에서 놓치고 외면해온 ‘다른 사람’ 그 자체였다. 가까웠기에 더 잘 안다고 믿었던 자신감은 흔들리고, 그 믿음 위에 세운 판단은 오히려 석이를 그들 안에 가두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향한 여정은 그렇게 결국, 나를 향한 여정이 된다.
화자는 석이를 함부로 추측했다. 예전의 기억을 끌어와 지금의 마음을 가늠했고, 그 가늠을 이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석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리를 지나왔는지는 알지 못했다. “이해하는 것과 가늠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p.65)라는 문장은,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통찰이기도 하다. 행동은 맞췄지만 마음을 몰랐고, 그래서 완전히 틀린 결과가 되었음을 그는 깨닫는다. 소설은 독자에게 조용히 묻는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자격이 정말 있는가.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독자는 결국 화자가 직면하게 되는 더 본질적인 질문으로 끌려간다. 나는 과연 나 자신조차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가. 무심코 넘겼던 기억들, 잊은 줄 알았던 상처, 오래된 말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얼굴을 들이민다. 슬픔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감정임을, 화자는 엄마의 죽음을 통해 배운다. 상실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며드는 것이고, 그 슬픔은 나로부터 흘러나와 내 관계와 삶 전반을 적신다. 슬픔을 부정하지 않고 믿겠다는 고백은, 그래서 더욱 단단하다.
공감 역시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의 감수성이라는 것을, 이 소설은 반복해서 보여준다. 더 가까운 사람에게, 더 비슷한 배경의 인물에게 공감하게 되는 우리의 편향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조건이지만, 그 편향이 때로 타인을 외면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석이를 향한 란과 화자의 이해는, 결국 ‘우리’라는 이름 속에서 그를 재단하는 일이었고, 그건 곧 타인을 바라보는 가장 일상적인 폭력이기도 했다. 석이를 진심으로 대하기 위해서는, 내가 쥔 기준과 시선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 내려놓음이야말로, 진짜 관계를 시작하게 만드는 첫 조건이라는 것을 소설은 설득력 있게 말한다. 그것은 공감과 애도의 태도에 대한 가장 절실한 윤리이기도 하다.
"상실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수많은 상실을 겪은 채 슬퍼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 거고 그것은 나와 관계 맺은 이들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엄마를 잃음으로써 상실을 겪었듯, 누군가도 나를 잃음으로써 상실을 겪을 것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상실의 늪 속에서 깊은 슬픔과 처절한 슬픔, 가벼운 슬픔과 어찌할 수 없는 슬픔들에 둘러싸여 종국에는 축축한 비애에 목을 축이며 살아가게 되겠지.
“나는 슬픔을 믿을 거야.”
처량하고 처절하게 절실한 것들을 믿을 거야."
p.113
이해하고자 하는 일, 누군가의 상실에 함께 머무는 일은 나를 해체하는 일과 닿아 있다. 나를 구성하는 관계는 동시에 나를 무너뜨릴 수도 있고, 그래서 우리는 종종 두려움 속에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을 멈추기도 한다. 하지만 관계는 결국 연루됨으로 성립하며, 연루된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의 상처를 품고 살아간다. 이 소설은 말한다.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취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빚을 지고 살아간다고. 그 빚은 감당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빚 속에서만 우리는 인간다워진다고. 그래서 이 작품은 이해와 공감, 슬픔과 연대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나를 내려놓아야만 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마치 나를 구성하는 관계가 동시에 나의 와해를 요구하는 것처럼.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든 사람들, 그래서 좋든 싫든 나의 일부가 된 이들은 나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 어쩌면 내가 무너질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것이 이해와 공감에, 그리고 애도에 필요한 일일 것이다." p.137
《영원에 빚을 져서》는 단단한 문장과 정교한 감정선 위에, 기억과 오해, 공감의 한계, 인간의 연루됨을 조용하고도 힘 있게 그려낸다. 이 소설은 우리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에게, 관계에, 상실에 빚을 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빚을 직면하는 일이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정직한 애도의 방식일지 모른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