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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된 자연 - 생물학이 사랑한 모델생물 이야기
김우재 지음 / 김영사 / 2020년 2월
평점 :
생물학이 사랑한 모델생물 이야기
<선택된 자연>
이런저런 생물학 관련 대중서적들을 읽었지만 모델생물이라는 처음 접하는 소재였고 접근법 부터가 신선했다. 일단 책날개의 저자 김우재의 본인 소개부터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초파리 유전학자이며 본업인 행동유전학 연구에 매진하고 싶지만, 가끔 한국사회의 과학이 부패한 권력과 영혼 없는 관료사회에 유린당할 때, 혹은 박정희식 경제발전 패러다임을 벗어나 건강하게 자리잡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 있을 때 글을 써서 의견을 낸다는 아주 멋진 형님이셨고 과학자로서 평생을 걸고 마지막으로 이루어야 할 목표를 위해 다른 삶을 준비 중이 며 여전히, 초파리로 세계정복을 꿈꾸고 있다는 멋진 말씀을 하신다.
자기 소개에서도 느껴지지만 책을 읽다보면 곳곳에 그의 우리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느낄 수 있는 대목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모델생물이란 개념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초파리, 예쁜꼬마선충, 애기장대, 효모, 쥐, 제브라피시처럼 생물학의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특별히 선택된 생물이다.
저자는 26종의 모델생물을 중심으로 모델생물의 독특한 특징, 놀라운 과학적 발견과 생물학의 흐름, 선택의 주체인 과학자의 삶을 조화롭게 엮어 풀어낸다.

생물학은 물리학과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르다. 같은 과학이지만 생물학에는 특수성이란게 있다. 그 특수성이 나오는 곳이 바로 모델생물이다. 물리학은 일반적으로 적용이 가능한 이론들인데 반해 생물학은 특수성의 원리가 지배한다. 연구 결과가 어떤 생물에서 나왔는지가 중요하다. 발견한 어떤 결과가 이 생물에만 국한된건지 다른 종에도 적용할수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 책의 모델생물들을 배우다보면 생물학의 철학적 기반, 숨겨진 이야기들, 생물학자들이 따라가는 지침서들이 이 모델생물학에 녹아있단걸 알게 된다. 한장한장 짧은 챕터로 이루어져 재밌게 읽을 수 있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전체를 보면 생물학이란 학문이 이런것이었구나, 생물학은 모델생물에서 나오는 거구나 하는 걸 깨달게 된다.

생물학자들은 자신을 ‘면역학자’라든가 ‘유전학자’ 등으로 거창하게 소개하곤 하지만, 그건 생물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나 소개할 때의 일이다. 생물학자들끼리 만나는 장소에서 “저는 유전학을 연구합니다”처럼 구태의연한 수사는 없다. 그런 어이없는 소개를 들은 상대방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뭐로 연구하시는데요?”
집쥐처럼 드라마틱한 반전을 겪은 모델생물은 과학사에서 흔하지 않다. 집쥐가 생물학자들에 의해 간택되기 전까지는 온갖 더러운 이미지들이 집쥐라는 명칭 속에 섞여 있었다. 근대의학의 영웅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에서조차, 집쥐에게는 테일러리즘이라는 노동자들에게 비극적인 이념과, 우생학이라는 생물학자들의 슬픈 과오와, 여성이라는 소수자에 대한 과학계의 차별이 스며들어 있다.

육종의 역사에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개와 토끼 육종가의 차이다. 개 육종 분야에선 족보가 아주 중요하다. 즉, 혈통과 족보를 알 수 없는 개는 아예 대회 출전권조차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족보도 모르는 개들을 교배해서 아무리 외적으로 아름다운 개를 만들어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다. 반면에 토끼와 가금류 육종의 역사에는 그런 족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혈통보다는 생김새만으로 평가가 가능했다. 재미있게도 개 육종가는 대부분 중산층 이상에 속한 이들이었고, 토끼나 가금류 육종가는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두 집단의 경제적 계급 차이가 족보를 따지는 관습을 형성한 것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들이 사육한 동물을 평가하는 기준에 따라 동물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차이가 발생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인류에게 과학이 선사한 풍부한 상식이 존재한 이후 대부분 사회적으로 합당한 결정의 배후엔 과학이 있다. 이제 정치인들은 근거가 빈약한 정책을 함부로 펼치지 못하며, 의사들은 효과가 없는 약을 환자에게 투여할 수 없고 법조인들은 과학이 제공하는 건강한 상식을 넘어서는 판결을 할 수 없다. 과학은 비인간적으로도 보일지도 모르는 건조한 발견들을 묵묵히 쌓으면서 사회를 지탱해왔다. 또한 근거에 기반한 토론과 합리성이야말로 사회적 합의와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치며, 과학은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