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로 산다는 것 - 가문과 왕실의 권력 사이 정치적 갈등을 감당해야 했던 운명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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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매주 주말에 방송되던 <역사저널 그날>에서였는데 깔끔한 설명으로 쉽게 역사를 설명해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역사서는 국왕을 위시한 집권세력 중심으로 서술되었기에 일반 백성들이나 여타 인물들에 대해서는 깊이 알기가 쉽지가 않다고 생각되는데 이번에 출간된 왕비로 산다는 것이란 제목의 책의 차례를 살펴보니 조선의 첫 국모로부터 마지막 왕비까지 살펴볼수 있는 기회가 될꺼라 여겨지는데 과연 그녀들은 역사적 혼돈속에 구중궁궐에서 어떤 생을 보냈을지?


첫번째로 소개되어 있는 신의왕후 한씨는 정작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사망하여 추존은 건국직후 이루어졌으며 제릉은 개성에 있다고 하네요. 대외적으로 고려말 왜구와 여진족등의 침입으로 혼란하였으며 대내적으로 권문세족등올 대표되는 지배층으로 인한 혼란하던 시기에 6남 2녀를 잘 양육하였다고 하니 이것만 보아도 대단한 여성임을 짐작할수 있었네요.


정몽주를 죽인 방원(태종)를 변호해주던 신덕왕후는 세자 책봉을 두고 태종과 갈등하게 되었고 결국 왕이 되어서는 신덕왕후에 대한 정치 보복을 하였다고 하니 이러한 형태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가 싶은데 인간의 속성은 지위를 막론하고 동일한것이기 때문이겠지요.


TV드라마로 태종과 왕비인 원경왕후에 대해 알고 있는데 태종이 왕이 되기전에 헌신하였지만 왕이 된 이후 외척세력을 견재하고자한 태종과의 불화는 어쩌면 예견된 일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이러한 불화는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의 집안에까지 미쳤다는 점은 왕권강화를 위한 태종의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지 않나 싶네요.


세종의 아들 문종의 3번의 세자빈 간택으로 알게 된 비극에 이어 단종의 왕비였던 정순왕후의 불행했던 삶까지

그녀들의 운명은 자신들이 결정하지 못하고 역사적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은 시대적 아픔이라 할수 있을것 같네요.


남편인 의경세자가 20살의 나이로 요절하는 바람에 사제에서 생활했던 소혜왕후 한씨는 아들인 질산군이 13세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대비가 되면서 인생역전하는듯 보였으나 그녀의 말년은 폐비 윤씨의 사건으로 관련된 것을 알게 된 연산군의 악행을 지켜보아야 했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지?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더니 인수대비의 인생은 돌이켜 보건데 적절한 단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가로 쫓겨난 윤씨는 폐출에 그치지 않고, 1482년 성종이 내려준 사약을 마시고 죽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연려실기술》에는 "윤씨는 폐위되자 밤낮으로 울어 끝내는 피눈물을 흘렸는데 궁중에서는 훼방하고 중상함이 날로 더했다. p127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극심한 갈등은 결국 조선 왕실 최초로 왕비의 폐출과 사사라는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p129


수렴청정으로 명종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던 문정왕후 윤씨는 외척정치와 불교 중흥 정책을 펼쳤다고 하니 당시 시대상으로 보았을때 얼마나 많은 반대에 봉착했을지 상상이 되네요. 시대를 거스른다는것은 그만큼 많은 정치적 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었겠지만 왕의 어머니라는 타이틀과 외척들의 협조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되네요.

 

 

 

 

 

 임진왜란만 아니었어도 크게 부족한 점은 없었다고 알고 있는 선조의 의인왕후 박씨는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지만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고 하니 자식이 없어기에 조연에 그칠수 밖에 없었겠지요.


임해군보다 광해군의 후계 계승을 힘들게 한 인물은 동생 영창대군이었다. 영창대군의 최대 후원자였던 유경영은 선조 사후 한 달이 못 되어 처형되었다. P207


인조반정으로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왕후는 광해군에게 복수를 하게 되었고 대비로서의 지위를 회복하였다고 하니 그녀의 인생도 참으로 기구했다고 할수 있겠네요. 선조가 좀 더 오래 생존하였다면 영창대군이 다음 왕이 되었을것이고 그렴 그녀는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겪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보았습니다.


학창시절 배웠던 기억이 생생한 예송논쟁의 당사자 장렬왕후는 인조의 계비였는데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장렬왕후의 상복에 관한 문제는 무의미한데다가 당시 백성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문제라고 여겨지는데 정치적 대립관계이던 서인과 남인이 정국 주도권을 위한 말 그대로 논쟁을 벌였던 사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했던 시대상을 잘 파악할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고요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빈 강씨는 인조(시아버지)가 내린 사약을 받고 사망하게 되지만 숙종때 신원되었다고 하네요. 그녀는 소현세자와 인조 사이의 정치적 갈등속에 희생된 여인이라 할수 있지 않나 싶은데 병자호란이 아니었더라면 그녀의 인생을 아마 달라졌으리라 생각되네요.


장희빈과 함께 많이들 알고 있는 인현왕후는 숙종의 계비로서 불행했던 삶을 영위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복위하였으나 7년만에 사망하였다는 점은 결코 길지 않아던 인생이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자 인생 뒤옹박이라는 말도 있는데 인현왕후는 지아비와 시대를 잘 못 만난 여인 중 한명이라 할수 있을것 같네요.


조선에서 최장수 하였다고 알고 있는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는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그도 그럴것이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니 엄격한 유교질서 사회에서는 크나큰 약점이 되었을것인데 영조에게서의 입지는 유명무실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성왕후는 1757년 2월 15일 창덕궁 관리합에서 66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정성왕후는 평소 창덕궁 대조전에서 거처챘는데 병환이 위중해지자 "종사를 이을 왕손을 낳을 대조전에서 생을 마칠 수 없다"고 하며 관리합으로 거처를 옮겼다. 결국 이곳에서 승하했다. p329


사도세자의 비로서 지아비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비운의 여인 헌경왕후 홍씨


19세기 세도정치를 시작시기에 왕비가 된 순원왕후는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것을 보지 못했으나 이후 2대에 걸쳐 수렴청정을 할수 있었다고 하니 그 권세가 얼마나 높았는지 인식할수 있게 되기도 하였고요.


일본군들에 시해된 명성황후와 마지막 왕비인 순정황후까지 많은 왕비들을 만나 볼수 있었는데


집권세력의 정치적 갈등과 역사의 운명 속에서 세찬 풍파를 감당하여야 했던 조선왕비들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확인할수 있었던 뜻깊은 기회가 되었는데 다수의 불행했던 왕비들의 삶은 시대적 아픔이자 슬픔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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