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윤성희 외 지음, 강미연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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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10대의 청소년의 성장과 우정의 시작부터 20대의 첫 출근, 70대에 시작하는 사랑까지. 살면서 마주할 법한 시작의 장면들을 다양한 연령의 눈으로 만나 볼 수 있도록 꾸려두었다.

독서 편식이 심한 사람인데 이러한 테마 소설을 읽음으로서 다양한 저자의 글을 만나 볼 수 있고, 내가 모르던 저자의 새로운 글맛을 알게되니 읽는 즐거움의 폭이 확실히 넓어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_ 연봉도 많이 올랐다. 2,663만원. 그러면 이제 세후 201만원. 월세 50, 관리비 7, 공과금 10, 인터넷 1, 핸드폰 요금이랑 할부금 7, 남친은 없지만 혹시 모를 언젠가를 대비한 결혼자금용 적금 55, ....... 앞으로는 교통비 포함 하루 만천원씩 쓰는 게 목표였다.

이미 잘 아는 저자이며, 2020년에 읽었던 단편의 작품을 2024년의 끝자락에 읽으니 느낌이 묘했다. 그 때 똑 같은 문장에 밑줄을 긋게되고 다시 살펴보지만 다가오는 감정은 더욱 촘촘해졌음을 느낀다. 그래봐야 똑같은 30대의 내가 읽는 것인데 30대 초반이 떠올리던 그 시절 나와 30대 후반이 되어 그 시절을 겹쳐보는 나는 확실히 달라졌음을 실감한다.


더운 여름 땀으로 번질 블라우스가 걱정되 마시는 아이스아메리카노, 첫출근에 늦을까봐 올라탄 택시. 정직원이 되면서 받은 건강검진에서 질병이 발견되 퇴사 권고가 될까봐 건물 입구에서부터 드는 불필요한 걱정들. 앞선 기대들도 포함. 이제는 정규직이니 휴가도 갈 수 있겠다 싶어 내년 여름엔 해외에 있을 꿈만으로 가득한 발걸음. 또각또각 거리는 새로산 구두굽의 경쾌함. 한남동 빌딩숲 사이에 내가 일할 곳이 있고, 당당한 발걸음과 정장 차림의 나는 누가봐도 이 동네 회사의 직원이며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고있으니 그토록 부러워하던 직장인이 된 거 같아 으쓱해지는 어깨. 끝이 있긴 한가 싶은 이력서 작성의 순간. 내년엔 되겠지 하던 계약직의 하루살이 같은 시간들. ‘정.규.직’이라는 이 단어가 뭐가 그리 대단했던건지 사람을 참 비참하게도 때로는 몹시 커보이게 만드는 것 같아 씁쓸해진다. 돌아보면 내가 버텼던 2년의 계약직 시간들도 별반 다른게 없었으니 말이다. 계급이 없는 사회? 평등한 사회? 모두가 걱정없이 살 수 있는 나라? 글쎄, 지금 현생은 아닌거 같다. 다시 태어날지 어찌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생에는 글렀다 싶어.

-여기까지다 2020년 02월에 내가 기록 해 둔 글이다.

그 때의 나는 대학 졸업반 시절 기업 면접을 보러다니는, 아직 정장이 어색한 모습의 내가 보였고, 또 이야기의 후반부 즈음엔 20대 중반 계약직으로 눈칫밥 먹고 자발적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며 정규직들 사이에서 주눅들어있는 계약직의 내 모습을 글에 녹여내며 많이 울컥했던 때가 떠올랐다.

지금의 나는? 그러니까 지금의 나의 조건은 어떤가? 입사 10년이 훌쩍 넘어버렸고, 이젠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더 많고, 회사에서는 허리쯤 오는 위치로 레벨업 된 상태. 언니, 누나라는 말보단 과장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우고 있는 고인물이 되어버렸다. 여전히 막내이고 싶으나 책임을 져야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이력서 파일 갱신 일자도 까마득 해 졌고, 증명사진을 찍어 둔 것도 입사를 위해 풀메이크업하며 공들여 찍은 날도 언제였는지 까마득할 지경이다. 언제 다시 저 입장이 될런지는 모를 일이겠지만 익숙해져버린 이 자리를 뺏기지 않으려 나는 또 내 위치에서 또 아등바등거릴게 빤해보인다. 누군가에겐 입사를 위한 종종거림이 시작이겠지만, 또 누군가에겐 아침마다 무탈히 출근을 하며 한뼘도 안 되는 내 명함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출근하는 시작이 있을 것이다. 오늘도 아침 해가 뜨기 전 푸르스름한 새벽 스타터를 딛고 시작한 내 하루의 시작이 부디 무사히 마무리되어 결승점에 골인하길 바라게 될 뿐이다.(결승점=퇴근 후 집앞에 무사히 주차하며 시동을 끌 수 있는 그 즈음)




📖근육의 모양_ 나는 그러니까 어디에 있건 존중을 받고 싶었던 것이라고, 언제나 어디에서나 다른 사람이 귀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 그건 직업을 바꾼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상대를 대하는 정중한 마음 만큼 나 또한 그렇게 대접받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데, 생각보다 돌아오는 마음은 성에 차지 않는다. 융숭한 대접을 기대하지도 않지만 어딘가 모자라고 또 어느 지점에서는 하대하다 싶을 정도의 짤막한 끝맺음의 태도는 매번 내가 하대받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회사를 다니면서 이른바 '넵넵 봇'이 되기도 하고, 메일을 발송 할 때 '반갑습니다'와 '감사합니다'를 반복하는 나를 보면 뭐가 그리 반가워서 인사를 건네고, 뭐가 그리 감사해서 이 문장을 꼬리표처럼 줄줄 엮어사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진짜 반가운거 맞아? 정말 감사한게 있긴 한가? 를 떠올려 보지만 이러한 문구를 적고 있는 내 표정은 항상 (ㆆ_ㆆ) 딱 요정도. 좋고 싫음도 없는 좌표 0의 상태의 입꼬리와 눈꼬리를 갖고있다.

매번 그러는 꼴이 싫어 퇴사를 하고 다른 직군으로 발을 들여놓더라도 상황만 달라질 뿐 또 비슷한 갈래의 고민을 하게되고 타인의 반응을 기대하게되는건 어쩔 수 없음을 느낀다. 그저 나이가 드는 만큼 상대에게서 얻어지는 반응에 인이 박혀 굳은살이 생겨 뜨뜨 미지근한 반응이 오더라도 그걸 초월 할 만큼 두터운 마음을 가져 덜 찔리고 덜 베이는 두둑한 마음을 갖길 바랄 뿐이다.


📖어제의 일들_ 나는 그가 무엇을 미안하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면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 유행인지 약속인지, 보는 사람마다 미안하다고, 다 가지 때문에 내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흔하디흔한 말이 별로 감동적이지 않았다.

학창시절 선생과의 사이를 오해한 친구들의 따돌림, 그리고 선생의 외면으로 옥상에서 뛰어내린 주인공. 그 때 다친 후로 그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고 간병을 해주었던 여인의 배려로(=엄마라고 부르게됨) 주차장 관리를 하며 그림책의 삽화가로 살게된다. 주인공 상현에게 동창인 율희가 찾아와 과거의 일들을 끄집어내며 그 때 있었던 일을 기억하게 만든다.

상현의 상황만 놓고 보면 극단적인 결정과 그 선택으로 얻어진 정신적,육체적 장애는 타인이 보기에 안타까울 수 밖에 없는 조건이다. 하지만 상현자체를 놓고 보면 그녀는 그렇게 슬프거나 비관적으로 살아오지 않았던 장면이 더러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을 도려내어 살았기에 그에 해당한 정신적 육체적 값을 지불 한 듯 거기서 더 나아간 비극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하게된다. 안타까움과 동시에 차라리 잊고 살며 어른 율희를 만나기 전이 더 나은건 아니었을까를 생각이 들었다. 잔잔히 살던 상현의 머리를 헤집는 율희가 나로서는 반갑지 않았거든.

그제서야 미안하다고 말하고 사과를 건네고 그 한마디를 통해 자신은 미뤄뒀던 사죄를 한 것에 두다리 뻗고 잘 수 있을 후련함을 만드는 것. 사과받는 이는 모르겠고 오로지 제 마음 하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식의 몸만 자란 동창이란 자들의 말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께름직한 과거에 묶여있다 후련히 사과하고 가볍게 시작하고픈 마음이 나는 달갑지 않다. 상현은 그들이 할퀴고 갔던 이후의 삶을 어렵게 시작했고 제 속도로 더디지만 잘 나아가고 있었다. 잊고 살던 일련의 상황을 다시 다 들여다 보았고, 이젠 모를 수 없는 과거를 쥔 채 다시 마음을 다 잡아야 한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깊은 숨을 몰아 쉰 후 시작해야하는 무거운 스타트. 이것 마저 상현의 몫이지만 동창이라는 그들도 일정부분 공동부담하며 계속 쥐고 살아줬음 싶은 명치 언저리의 무거운 돌이길 바라게 된다.




📖어제의 일들_ 모든 게 화무실일홍인 거라. 후회하고 원망하고 애끓이면 뭐 해. 좋은 날도 더러운 날도 다 지나가. 어차피 관 뚜껑 닫고 들어가면 다 똑같아. 그게 얼마나 다행이냐.

나는 위에 언급 한 듯 동창이라는 자들이 이 무거운 마음을 공동부담하고 평생 떠앉고 죄책감 가득 안고 살길 바라는 심보인데, 어른 상현이 된 시점에 엄마가 되어준 그녀가 한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그리 미워하고 그리 원망하며 나를 찌르듯 상대를 찔러가며 서로 미움을 쥐고 살면 뭐하겠냐는 듯한 말에 뒷통수를 쎄게 후려맞은 기분을 갖는다. '미워해서 뭐하냐, 달라질 건 없는데' 라는 뉘앙스로 쟤는 저러고 살겠지, 너는 너대로 살아라 싶은 마음으로 해주신 말씀에 타인을 탓하고 원망하며 쏘아대는 마음을 단박에 잘라버리게 만드셨다. 상현이 어머니가 해준 말을 밥 한숟가락과 함께 먹어 삼키는 것 처럼 나도 한입 가득 넣고 곱씹으며 꿀떡 삼키려 한다. 상현이 말하듯 돌이킬 수도 없고, 명백히 지나가 버렸고, 기세등등한 위력은 잃은지 오래니 말이다. 상현의 어머니를 통해 나도 못된 심보를 먹어 없앨 수 있어 다행이다.



단편의 시작들은 '마법사들'을 통해 10대 시절의 순간부터 차곡차곡 연령을 높여가며 이야기를 얹어주었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시작'의 기회를 만나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있게 뛰어들지 못하는 주저하는 마음, 결과와 과정에 대한 불안함,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다양한 예시처럼 들려주며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는 삶을 들려주었다. 모든 결정에는 용기가 있어야 했고, 모든 결정에는 곱절의 고민을 헤치고 나와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생의 진행형을 확인했다. '시작'이 반이라 하지만 '시작' 조차 두려운게 사실이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아무거라도 하는 것'이 덜 한 후회와 덜 한 아쉬움을 남긴다는 걸 우린 실감하며 산다.

그러니 매 순간 시작하며 매 순간 과절하고 또 그만큼 고뇌할 테지만 그 때마다 안하는 것보다 나았음에 안도하며 일단 해보길 권해본다. 그렇게 해도 세상은 두쪽이 날 만큼 무너지지도 않았고, 나름 괜찮게 살아가는거 같으니 말이다.


📖창비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기록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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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
임지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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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가 몇 해 전 나를 되돌아 보게 만들었다. 한때 노잼의 시간이라고 말 했던 그 즈음이다. 명랑만화처럼 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우울의 늪에 빠져 사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그 때엔 모든게 그저 그랬고 또 사는 것 마저도 그저 그런 날의 연속이었다. 너무 잘하고 싶었고, 너무 열심히 살고 싶었기에 그랬던 부작용처럼 느껴졌다. 제 성질에 못 이겨 차라리 미워하고 말자 싶어하며 비뚤어진 마음으로 꺾어두는 못된 진심.

그래서였을까? 이 책 제목에 홀려서, 이 표지의 뚱하고 세상 무관심의 표정에 끌려서 손에 쥐게 되었다.

누구나 한번쯤 특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미워해본 경험. 그 '싫음'에 대한 감정은 어떤 마음에서 뻗어진 결과물일까를 생각해본다. 누군가에겐 숨기고픈 감정일테고, 누군가에겐 차라리 들켰으면 좋겠다 싶어하며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얽힌 감정. 거기에는 어떤 선망이나 외로움, 부끄러움 같은 것들이 들어있다는 걸 저자가 알려주는 글이다. 한편으론 자기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돋보이게 하려는, 서툰 사랑의 마음이다.

슬픔과 기쁨과 외로움. 거기에 타인이 알아주길 바라는 이른바 냉탕도 온탕도 아닌 혼탕과 같은 삶에 깊이 몸을 담그며, 미움과 사랑 사이의 낙차를 발견하는 과정이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마음. 입으로 내 뱉게되는 말들과 속으로 담아놓고 차마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 이는 날이 서 있는 단어의 조합들이라 잘못 꺼내어두면 서로 다치고 마음이 쓰릴까봐 이 '싫음'에 대한건 나의 세상 속에만 놓아두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



📖작가의 말_ 무언가 이유 없이 싫어지는 날이면 그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대체로 거기에 있는 건 내가 가진 진실이다. 내가 좋은 것의 집합이 아니라는 진실, 때로는 너무 중요한 것이 생김으로써 나쁜 마음이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진실, 나쁜 마음은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만큼이나 자연스럽다는 진실, 그럼에도 사람은 미움이 스스로에게 향하는 걸 두려워한다는 진실.

세상이든 인간의 본성이든 양가적인 것이라 했다. 같은 상황이라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헤아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는 각자가 가진 삶의 방향성과도 일치할 것이고, 본성과도 연관되어지겠지? 과한 애정이 매번 이런 미움의 싹도 틔우고 애증의 잔소리도 스물스물 올라옴을 느낀다. 하지만 입밖으로 꺼냄과 동시에 이 말을 하는 세치 혀도 미워지고, 이 말을 듣는 상대의 표정을 보는 내가 빨리 지칠게 뻔하고. 결국 상대보다 내가 곱절로 지칠게 빤해보인다. 그래도 이 마음들을 마냥 묵힐 수 없으니 글을 통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며 꾹꾹 눌러담았던 울컥한 마음을 주르르 꺼내어 보는 것에 동참해본다.



📖중인배들_ 정말이지 사람은 왜 그런 걸까. 타인으로 인해 캄캄해진다는 건, 욕망이 시커멓게 비친다는 건 왜 이렇게 사람을 우습게 만들까?

SNS를 하다보면 이러한 마음이 생긴다.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또 어떠한 면에선 나의 액션에 반응해주길 바라는 마음. 이러한 티나는 움직임에 상대는 무던하게 반응 할 때 과한 기대는 미움이 되기도 한다. 어디 이러한 감정으로 인기척을 내는 이들이 한둘이겠냐만 그 와중에 나는 알아주겠지 하는 그런 기대 심리. 때론 그게 너무 헛짓거리 같아서 뭐하는 짓인가 싶은 마음에 내 존재가 우스워지기도 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생각도 들어 한없이 쭈그러드는 옹졸함도 생긴다. 주체가 나여야 하는 삶은데 때때로 이렇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타인의 의중에 좋았다 미웠다를 반복하게 되는 자신을 들여다 보면 참 '너도 너다'라며 혀를 차게 된다. 그냥 그 모습의 내가 싫은 거다.


📖한 뼘의 자리_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부로 대해질까봐 곤두서 있던 나머지 거의 모든 날 모든 순간 나 자신을 보살피는 데 줄곧 어려움을 겪어왔다.

아마 비슷한 방식으로 내 부모는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내가 부모보다 조금 더 나은 삶으로 왔다는 것. 그런 게 나를 곤두서게 하고 고지식하게 하고 상처받게 한다. 내가 서로를 위하느라 자신을 외면하는 법부터 익혀온 한 가족의 산물이라는 것 말이다.

가장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애증의 깊이는 가족이다. 엄마를 향한 마음과 동거인을 대하는 마음. 그 중 엄마를 향한 이른바 개딸의 진심은 더욱 진하고 깊다.(욱하는 마음과 어떻게든 잘 해주고픈 마음은 선명하고 진하다. 그래서 더 어찌 할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다.) 멀찍이 내다보면 나와 꼭 닮은 사람들이자 나의 원류인 그들. 당신들이 당신을 돌보지 않아서 내가 더 울컥하고 과하게 무언갈 하게 만드는 사람들. 그건 유년기에 받았던 마음이 가세가 기울만큼 차고 넘치게 받은 사랑으로 인해 내가 값아야 할 빚처럼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금전적으로는 혜택을 받지 못했으나 심적으로는 우울함이나 불안함 없이 사랑 많이 받고 자란게 이렇게 연결되나 싶어지기도 한다. 내 부모가 당신들을 돌보지 않고 오롯이 자기 새끼만을 챙겼던 걸 어른이 되어 더 뚜렷하게 받아들이게 되니 덜 해도 된다고, 덜 해도 아무도 손가락질 하지 않는다고 일러주고픈 과거의 기억이기도 하다.



📖후회와 살기_ 하지만 사는 일엔 후회가 있다. ... ... 어느 때보다 온갖 데 열심인 나의 지금은 후회에서 온 것이니까. 동생의 후회란, 실은 동생이 더 입체적인 삶을 꿈꾼다는 증거이니까. 그 꿈이란 꾸는 것, 꿔오는 것, 빌려오는 것이라서. 나는 동생에게 빌려줄 수 있는 최대한을 빌려 주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저자에겐 가족 중 가장 아픈 손가락이 동생으로 보여졌다. '죽고 싶음'에 매번 끌려가는 저 아이를 보면 낯선 전화에 흠칫하게되고, 혼자 두었을 때의 불안감은 저자 본인이 더 크게 겪었을 감정이다. 강한 삶의 의지가 때론 과한 죽고 싶음으로 결부된다. 그게 동생이 삶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아이가 호두(반려견)를 데리가 왔다는 것. 저 조막만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몸집도 능력도 더 큰 동생이 부지런히 몸을 놀려야 한다는 것. 그러니 삶을 살아야 할 동기가 하나 더 생긴 것의 시작을 담아둔 단편이다.

자신의 병식을 인식하고 자기만 아직 무엇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도 걱정을 끼치지 않는 독립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과정이다. 의지가 없는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호두라는 생명을 빌려 동생에게도 호두만큼의 뜨끈한 삶의 온도가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된다.



📖바람이 분다_ 내가 할 수 있는 게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겠지만, 살아가는 곳이 바뀌지 않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그칠 것이다.

지하철 구석에 있던 맹인 할아버지. 복잡한 승강장을 올라 갈 때 주저하는 저자 대신 비슷한 주름의 모양을 한 할아버지가 자신의 팔을 넘겨주며 잡고 같이 올라가자는 나란한 발걸음. 병원에서 느리고 불안 한 걸음을 마주 할 때 잠깐의 시간을 내어 그 사람의 동행자가 되어 주는 찰나. 세상은 변하고 인간은 나이를 먹고 매번 배우고 깨우치는 삶의 방식이라 하지만 느려지는 걸음만큼 뒤쳐지는 삶의 대응법. 젊은이의 무던한 손짓에도 늙은이는 감사하고 또 고마움이 가득 차 오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그치겠다만 그 능력이라도 있는 것에 감사해지는 순간이 분명 존재하니 소용없는 헛된 마음과 행동은 아님을 느낀다.


시니컬한 표정의 표지 답게 세상이 미운 구석도 많지만 때론 좋아하는 것들도 많은 사람이다. 이 책을 추천한 오은 시인의 말처럼, '곡절 없이 좋아하는 것을 몇 곱절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과정'을 통해 이 사람의 미움은 넘치는 애정이 눌러붙은 잔상이 될 수 있으니 마냥 미워보이지 않음을 느낀다. 미움도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마음이고 이 양가 감정은 모두가 겪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이 마땅한 마음을 통해 나의 불완전한 마음을 들여다 볼 용기를 얻어간다.


📖하니포터9기로 한겨레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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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 소멸 사회 - 압축 성장 대한민국은 왜 복합 위기의 길로 들어섰나
이관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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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의 배색이며 문장은 꽤나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싶은 듯 한데, 나로서는 '압축 소멸 사회'라는 말에는 이골이 나 있는 상태다. 언론이나 SNS를 통해 많이 들어본 말이다. 지방을 사는 직장인이며, 애를 낳지 않은 부부로서 이 세태에 이바지하고 있음을 알고있긴 하냐는 잔소리를 배부르게 먹어온 사람이다보니 내가 이 세상을 소멸시키는데 선동한 기분마저든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저 하고 싶은데로 사는 놈이 누구냐 하는 식으로 두눈 시퍼렇게 뜨고 달려와 이 모든 사회적 수순에 어떤 가담을 했는지 턱밑까지 다가와 이유를 채근하는 기분. 지방거주/중소기업 근로자에 대한 평균 이하, 그러니까 수도권에 못 미치는 혜택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고, 그저 부정적인 관점에서만 탓을 하고 그러한 질타를 받은 국민의 1인으로서 더욱 개선의 의지나 희망적인 방향으로 회로가 돌아가지 않고 있음을 느낀다.

한국 사회는 '압축 성장'을 했고, 이제는 '압축 소멸'의 수순만 남은 상태. 아니, 벌써 시작되어진 실정이다. 무엇을 어떻게 하고자 하는 뉘앙스는 아니다. 일단 이러한 수순으로 흘러가게 된 이유, 이러한 절망을 부추기는 사회와 방치된 실정, 이어지는 정치의 소멸과정을 3부작으로 이야기하고있다. 마지막 단락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하며 정치복원과 압축 소멸을 막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한다.

더하면 더했고, 생각보다 더 심해질게 눈에 그려지는 벼락 발전 이후의 벼락 소멸 선택의 과정.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건지 일단 들어보고 생각해 볼까 싶어 정말 오랫만에 정치비평칼럼을 꺼내들었다. 쌍심지 안 켤테니 일단 들어보자.



📖지금 여기 사는 청년이 행복해야 하는 이유_ 우리는 '청년은 지역을 떠나고 싶어 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비슷하게 '청년은 아이를 낳고 싶어 하지 않아'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문제다'라는 생각은 쉽게 '그것이 원인이다'라는 생각으로 연결되고, 그 원인을 제거하려는 노력은 다시 그 현상 자체를 '문제화'합니다.

매번 정책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마음으로 '떠나는 청년을 붙잡자'에 혈안이 되어있다. '지금 여기 사는 청년을 행복하게 하자'며 있는 사람들을 위한 조건은 철저하게 배제되어있다. 아직 떠나지 않은 청년의 삶은 보장되지 않은 채 이미 미련없이 떠난 존재들의 허상만 붙들고 있다. 그런다고 다시 돌아올까? 이미 모든걸 끊어버리고 그들이 우선시 여기는 더 좋은 조건과 혜택을 기대하며 간 사람들인데, 그보다 더한 조건을 제시해도 올까말까한 결정일텐데 논점을 왜 거기에만 놓아두는건지 알 수 없다.

청년의 기준 연령이 올라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원하는 목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먼 미래보다 당장의 내 삶과 주변의 가족이 더 눈에 들어오는 세대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돈이 있든 안정화된 경제수단이 있든 나라에서는 관심이 없고, 일단 '결혼해봐 자살할 생각 줄어들거야. 청년들이여 아이 낳으면 집 줄게, 돈 줄테니까 지방 소멸도시에 살아봐. 경제활동? 뭐 차 타고 멀리 나가거나 나라에서 준 돈으로 먹고살면서 생각해봐' 라고 할 때, 좋다고 넙죽 받고 그대로 이행할 이들이 얼마나 될까?



📖지극히 한국적인 자살률과 출생률_ 지금 한국은 '자살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국가적 차원에서 진지하게 자살을 말하는 정치인이나 정당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간혹 저출생,고령화나 지역 소멸에 대응하는 정책이 제안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자살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살은 단지 의료 분야에 한정된 정신 건강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입니다.

지금 정당에서 정치를 담당하는 연령대는 이해 못할 자살률이다. 그들의 세상은 우리가 겪은 것보다 빠른 성장과 흐름에 인력이 그만큼 모자랐던 시대다. 굳이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이른바 기술도 있고, 이 한몸 부지런히 놀리다보면 꼬박꼬박 은행에 적금 넣어 이자불리는 맛도 느끼며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집도 살 수 있을 만한 시절이었다. 지금은? 대학 학위는 돈으로 사는 것 마냥 다들 들어가고, 숨만쉬고 일해도 돈 한푼 안쓰고 10년간의 연봉을 다 쏟아부어도 내 이름으로 된 집도 마련하지 못하는 허무하고 서러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희망보다 절망이 더 코앞에 있으며, 미래가 뚜렷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노력을 더 해도 나의 윗 세대들이 겪은 만큼의 고도성장이 더는 일어나지 않는 사회이니 과거 방식의 계층 이동을 기대 할 수 없다. 지극히 당연한 자살률의 결과인데 무엇을 탓할까 싶다. 10~30대에서는 우울감을, 40~50대에서는 경제적 어려움이 주된 자살의 이유였다. 성적과 진학에 대한 우울이 시작된 10~20대 부터, 직장에 관한 우울, 40~50대로 넘어가면 얻어지는 경제적 우울과 사회적 우울. 단지 의료분야에 한정되어야만 하는 항목일까? 우울의 시작점은 질병이 아니라 사회임을 인식해야하는데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 각자의 사업부에서 이 중대한 문제를 떠앉게 될까 쉬쉬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저출생 문제 막을 생각 없는 저출생 정책_ 차라리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건 어떤가요? '우리는 저출생에 대해 걱정했다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쓰는 것이지, 실제로 저출생을 막을 생각은 없다'고.

낳을 사람들은 다 낳게 되어있고, 낳지 않을 사람들은 백날 귀에 인이 박히도록 말을 해도 낳지 않을 이유는 변하지 않는다. 이건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이유이기도 하지만, 내 동료들도 그러한 걸 보면 단지 한두개의 문제로 결부되는건 아닌 듯 하다.

세종의 출생률을 보고 절망했다지? 거주자 중에 맞벌이 공무원에 안정적인 직업비율이 높으며, 학교와 도서관, 공원의 신도시 인프라도 있다보니 아이키우기 좋은 조건. 조건만 부합된다도 이 모든게 맞아떨어지는 인과관계 같은 결혼-출생의 흐름일까. 내 어릴 시절을 기억해보면 그보다 덜한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생겨났고 방목하듯 놓아두어도 이른바 알아서 잘 크는 시대였다. 지금은? 출생의 시점부터 경쟁이다. 수도권 이외의 지역엔 자연출산이 가능한 병원도 의사도 없다. 아동병원은 양육자 한명이 밤새 병원앞에서 대기를 해야 겨우 접수를해서 진료가 가능하고, 보육관련 기관도 집근처 어디서든 맡길 수 있는게 아니라 추첨제에 그 또한 여의치 않으면 조부모의 손을 빌리거나 부모 한명의 급여가 온전히 소비되는 시터나 학원 뺑뺑이가 이뤄져야 한다. 시작부터가 매번 극한의 퀘스트다. 이럴거면 모바일게임 속에서 아이를 키우는게 덜 고난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애 병원 보내거나 징검다리 연휴로 양육자는 회사출근이고 아이는 집에 홀로 남아야 할 때 외출이나 연차는 모든 이들의 눈초리를 받는 사회이며 양쪽의 설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간다. 뭔가 씁쓸하고 한숨나오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렇다.

나는 이 회사를 근무 할 때 결혼을 했고, 꽉 채운 10년의 결혼생활을 이어가고있다. 내가 결혼 한 이후 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은 사람은 둘? 그마저도 여직원은 출산 후 3개월의 육아휴직 후 돌봐줄 양육자가 없어 퇴사를 했고, 남직원의 경우는 아내가 공기업에 있어 장기 육아휴직이 가능했기에 가능했던 가족계획이라 했다. 탓하지 말자. 인구계획에 이바지 하느냐와 이 인구절벽에 가담했느냐로 질타하지 말자. 각자의 세상에 말 못할 사정은 차고 넘치니까. 세상이 이런데, 내 처지가 이런데 너라면 되겠냐? 라는 분노섞인 되물음을 받기 싫다면 잠자코 있길 바란다.




📖무엇을 위한 법치,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_ 단지 운이 없는 일이거나, 전 정부가 잘못 세팅해 놓은 일이거나, 공무원들이 일을 제대로 안 해서 생긴 문제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역시나 내 허물은 잘 알지만 드러내긴 제 살 깎아먹기이니 못하겠고, 전 정부를 탓하든 타 연계 기관을 탓하든, 마지못해 최후의 보루라는 듯 천재지변까지 탓해서라도 자신은 이러한 의도로 한게 아님을 어필해본다.

이 책을 읽는 와중에 늦은밤 계엄령을 선포한 일이 있었다. 이게 뭔 날벼락인가 싶을 정도의 당황스러운 것. 근현대사에 외울거리 또 하나 만드는 소름돋는 체제. 일상을 무너뜨릴 생각으로 모든걸 제한하려는 이기심. 진짜 누구를 위한 법치이며 누구를 위한 선포인지를 다시금 상기시키게 만드는 이슈였다. 점점 정장 자켓 한켠에 뱃지를 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지수가 내려가는 기분을 느낀다.




📖정치 복원, 압축 소멸을 막는 유일한 방법_ '더 나은 나라, 더 좋은 사회'는 누가 대신 만들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시민 스스로 소멸하는 대한민국을 멈추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 ... 정치가 만연해서가 아니라 정치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정치가 없어서 문제입니다. 정치가 아니라 권력 투쟁에만 몰두하는 정치인과 정당에게는 박수든 비난이든 보낼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 그 자체입니다.

혐오사회를 동조하는 바는 아니다. 내가 나서서 정치를 하며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노력할만한 능력치가 없으므로 일단 그나마 나은 정책과 방향을 바라며 안건을 발휘하는 이들에게 걸림돌은 되지 않아야 겠다는 마음을 갖게된다. 갈등은 드러내어야 하는게 맞고, 곪아 터진건 도려내는게 맞으며, 사과 할 것과 바로잡아야 할 것은 정중한 사과와 개선이 수반되어야 한다. 잘못은 하루라도 빨리 인지하고 바로잡는게 더 큰 화를 일으키지 않는 방법이다.

유치원 다닐때 다들 해본 방법 알꺼야.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며 선생님 앞에서 이러저러한 일 때문에 치고박고 싸웠다고 고자질하는 둘. 그때 선생님은 어느 편도 들어주지 않았다. 너는 이래서 잘못했고, 쟤는 저래서 잘못한거고 둘 다 잘못한거니까 서로 사과하고 악수하고 안아주고 다신 그러지 않겠다며 손가락 걸고 약속하던 그 방식. 우린 어른이니까 손가락까지 걸진 않아도 잘못은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개선의 방법을 빨리 찾는 것. 과연 그런 날이 오긴 할지 내가 사는 순간에 그걸 볼 수 있긴 할지 떫은 입맛만 다실 뿐이다.


📖한겨레출판을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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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브 창비교육 성장소설 13
보린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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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현실성에 SF의 소재가 한 스푼 얹어진 이야기. 얼핏 만화같은 설정이라 할 수 있지만 등장인물들이 겪는 갈등은 10대의 끄트머리에서 진로 탐색과 변화될 환경에 고민하며 불안감을 가지게 될 다양한 감각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청소년 소설이었다.

이야기는 연우로부터 시작된다. 학교에서 투명한 막에 갇히는 순간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누가, 왜 연우를 투명한 큐브에 채집했고 1년간 그 속에 묶어두었는지를 알리진 않았으나 연우의 감정 선을 따라가다보면 그 시절에 느꼈던 감각과 생각들로 조금씩 유추 해 볼만한 점들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당황하게되고, 영영 돌아갈 수 없을까봐 불안하기도하며,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 그 패턴에 순응하게 되면서 탈출의 의지가 줄어들고 무던해지는 감정으로 변해간다. 그 심경의 끝엔 스스로 탈출하겠노라는 마음까지도 사그러들어버린다. 어쩌면 크게 변화되지 않고 반복되는 하루가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배해버리면 그곳이 가장 안전하게 느껴지는 큐브가 되어버리는 것임을 터득한 것 같았다. 표지의 소년의 모습이 딱 그런 상황이다. 몸은 붕 떠 있지만 표정은 생각보다 평온해 보이거든. 큐브는 스스로를 가둬두었고 스스로가 벗어나고픈 욕심마저 상실하는 뭉툭하고 무신경해진 상황을 표현 해 두었다. 아무리 부딪히고 튕기더라도 아무런 타격감 없는 말랑한 큐브에 적응해버린 삶.


📖바나나 우유 스물다섯 상자_ 아무것도 리셋하지 못한 채, 되풀이되는 과거의 한순간 속에 갇혀 있었다.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알지 못한 채, 해고니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던 그때 그 순간 속에.

연우의 인물배경을 보면 그럴 수 있겠다는 공감 할 수 밖에 없는 조건들이 있다. 일단 대한민국 고3이다. 그리고 공부는 제법 하는 편이지만 원하는 대학과 학과는 있지만 그게 진짜 자신이 하고싶은 것인지, 좋아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는 명확하게 답변할 수 없는 어중간한 상태이다. 만약 그 선택을 하게된다면 익숙한 공간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모든걸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법적 성인인데 자신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몸만 큰 어린아이는 해야한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괴리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그려보게된다. 어릴 때 부터 좋아하는 이성친구가 곁에 있는데 그 아이와는 다른 진로가 눈에 보이며 같이 생활하는 이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영영 볼 수 없을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불안감도 갖고있다. 남들이 좋다하고 남들이 다 그게 맞다며 등을 떠미는 것 같은 자신의 진로. 그에 반해 자신이 하고싶어하는 것이 명확했던 해곤, 특출난 건 없으나 가업을 이어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 거기에 관련된 학과를 가며 부모가 다져 놓은 안전한 미래에 자신의 목표를 얹어보는 나루. 세상이 더 나은 조건이라 말하며 여러 조건을 따져 줄세워 놓은 더 괜찮은 대학에 가기 위해 재수를 선택한 윤찬. 연우가 큐브에 갖혀있던 시간동안 친구들은 각자의 선택으로 변화할 삶에 적응하기도하고 때론 그 선택을 번복해보기도 하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행복한 삶이 되고 재미난 삶이 될지를 고민하게 된다.



📖문어일까, 나일까?_ 연우는 큐브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미지근한 온실밖, 심장이 말이 안 되게 뛰고, 땀이 삐질삐질 솟고, 더운 숨결이 귓가에 감기던 그 순간, 불안하고도 외롭지만, 서로 닿으려고 몸부림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독감에 걸려 몽롱한 상태. 자신만 교실에 남아 엎드려 쉬고 있던 그 순간 변해버린 세상. 몸과 마음이 가장 나약해졌을 때를 노렸다. 독감처럼 외부에서 들어온 알 수 없는 바이러스라 여기고픈 심리의 공격이었다. 처음에는 큐브라하고, 빨간 불빛이라 하며 연우가 겪는 1년 남짓의 상황을 그려두었는데 1년 후 일상으로 돌아온 다음 아버지가 어렵게 말해준 이야기와 해곤의 어머니가 알려주셨다는 연우의 성장과정. 대략적으로 유추는 할 수 있었지만 이 시간을 겪어낸 어른들이 말해주는 연우의 상태로 독자가 연우의 심리까지 닿기에는 조금 아쉬운 복선들이었다. 배를 타고 나가는 아버지, 홀로 있는 시간이 많은 연우. 그렇게 시간이 연우를 자라게 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은연중에 벽을 쌓고 그 안에 스스로 갖히게된 연우를 그려내는 과정에서 좀 더 촘촘한서사가 있었다면 우린 연우에게 더 깊게 이입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이 책을 읽게될 청소년들도 한 번 씩은 열병처럼 이 병치레를 하게 될 텐데 자신의 성장과정이나 고민들을 연우와 비교해보며 서로 불행 배틀을 하라는게 아니라 '너도 그랬구나, 나도 그랬었어'라는 식으로 서로의 아픈 순간을 각자의 온기로 토닥여 줄 수 있는 연대 형성을 하도록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를 의논해보고싶었다.

비 온 뒤 맑음처럼 우리는 여전히 꾸준하고 단단한 행복을 바라게된다. 설령 돌아가기도하고 남들이 뛸 시기에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는 일이 생기더라도 이 레이스를 멈출 순 없고 멈추어선 안된다는걸 아니까 그래서 고뇌하고 자신을 다그치는 거겠지.



📖미디어창비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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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배려할수록 더 힘들어질까 - 나보다 남이 먼저인 에코이스트를 위한 정신적 호신술
윤서람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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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어주고 잘 받아주고, 그러다 잘 참아주며 잘 져주는 사람. 배려하는 삶이 습관이 되어있으며 두루두루 잘 지내고 싶고, 큰 소리 안나게 둥글게 살길 바라는 사람이 있다. 어떤 어른이 되고싶냐는 질문에 직업이나 장래희망을 이야기 하기보단 '선한 어른'이 꿈이라며 뜬구름 없이 대답하던 여고생은 시간이 흐르고 세월의 풍파를 맞아 그냥 '어른'으로 살고있다. 인생의 1/3이상을 돈벌어먹는 직장인 어른이자 다양한 분야에서 성인으로 분류되다보니 면상에는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있으며, 인자한 미소 너머에는 복화술하며 나만 알 수 있도록 성질부리는 꼬장꼬장한 성질머리로 바뀌었다. 절대 타인이 듣지 못할 정도에서만 욱하고, 분노하기만 하는 좁쌀만한 화딱지를 내는 존재로 커 버렸다. 스스로를 이구역 도른자로 칭하지만 그것도 가장 친한 사람들, 내 팔 한쪽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최측근들에게만 그러하지 절대 이해관계가 얽힌 광범위한 존재에겐 찍소리도 못하는 '순한 사람'을 자처하는 삶.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게 유순한 들러리 일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내가 너무 피곤하다. 그 모든 성질머리는 표출하지도 못한 채 속으로 꾹꾹 눌러 쌓다보면 언젠가 목끝까지 차올라 빵-하고 터져버릴거 같을 때가 많다. 그게 나란 사람의 자학 가득한 현실이다.

그래서 이 책을 골랐다.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을 보다보면 나를 극단적으로 내몰아 정상이 아닌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될까 멀리하곤 했는데, 계속 이렇게 살아선 안되지 않을까 하는 자기반성을 하다보니 올해는 글러먹었고, 내년에라도 인간 개조(?)를 하고픈 마음에 신간 알림이 뜨자마자 바로 선택 후 배송 받았다.

책 소개 문장은 이러했다. '나보다 남이 먼저인 에코이스트를 위한 정신적 호신술' 내가 살면서 육체적 호신술은 많이 배워봤다만 이 나이 먹도록 정신적 호신술은 한번도 익혀본 적이 없었음에 제 한몸 건사할 정도의 자기 방어술을 익혀보기로 한다. 물론 글로서 완벽히 습득은 어렵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긍정가득한 마음으로 보호태세를 갖춰보려한다.



📖프롤로그_ 남들로부터 지나치게 주목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문제가 생기면 자기 탓부터 하며, 유독 자기 자신에게 엄격합니다. 또한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매우 싫어하고,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을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에코이스트'라고 부르며, 오은영 박사는 이 에코이스트의 특성이 바로 오늘날 MZ세대의 전반적인 성격에 해당 한다고 설명한 바 있어요.

일단 프롤로그에서부터 생소한 단어를 접했다. '에코이스트'와 '나르시시스트'. 나르시시스트는 대충 알거 같은데 에코이스트는 너무 생소하다. 유명한 포털에서 이 단어를 검색해보면 다양한 연관 문구들이 뜬다. 마음돌봄 심리학, 공황장애, 자기혐오, 가스라이팅, 나르시시즘, 심리상담, 강박. 뭔가 요즘 많이 떠오르는 핫한(?) 단어의 조합이다. 그런데 썩 좋다고 여길만한 단어가 없어 씁쓸하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개선이 필요해 보이는 상황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여기 프롤로그에 옮겨진 문장과 동일했다. 나르시시스트의 이기주의와 반대되는 성향 그 자체였다. MZ세대의 전반적인 성격에 해당한다고 했는데, 인구통계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분류해 놓은 1980년 중후반 태생부터 2010년대 초반생인 MZ. 애매한 80년대 후반 태생인 나도 결국 이 세대에 속했고, 그렇게 곁다리 걸치고 있는 사람 느낌이지만 뭐가 좋다고 유행같은 성향을 따라하고 있었다. 장점으로 순화 할 수도 있겠지만 다양한 성향을 가진 인간들 속에 섞여 살면 마냥 좋아보일 순 없었다. 살아보니 그렇더라. 물과 기름인냥 섞이기 힘든 두 부류 속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덜 힘들게 살고, 덜 아프고 살 수 있을지를 얻어가고 싶어졌다.

프롤로그부터 나를 너무 잘 까발려 주었다. 나라는 존재의 성질머리를 고대로 옮겨둔 문장에 뜨끔하면서 이런 행실이 나만 그런게 아님에 살짝 안도하며 너나 나나 뭐 결국 그렇고 그런 족속이라는 생각하며 순순히 들어보며 조목조목 짚어주는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나르시시스트의 먹잇감이 되는 사람들_ 웬만하면 갈등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갈등이 두려웠다기보다는 갈등 상황에 놓이는 게 굉장히 귀찮았던 것 같아요.

이야기는 총 4가지로 크게 나뉘어 각각의 성향에 대한 예시와 개선&극복의 방안을 제시하고있다. 1장 내 주변에는 왜 나르시시스트들만 가득할까 라는 주제로 공동체 생활 속 나와 다른 성향의 사람으로 인해 자신들만 느끼는 고충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들이 의도 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매번 이해해주고 들어줘야 하는 입장인 에코이스트에 대한 입장과 함께, 성향이 형성되는 시기인 어린시절 누가 곁에 있느냐와 어떤 성질의 사람이 훈육을 담당하느냐에 따라 변화하며 성장하는 인물 성장 과정을 담아두고 있다. 어떻게 보면 위에서 언급했던 가스라이팅이라 할 수도 있겠고, 또 어떻게 보면 제일 흔하게 쓰이는 '세뇌'의 반복 학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후 순위가 되다보니 원래 그런 사람이 되어 직면하기 보단 외면이 편한 사람으로 단단하게 자기방어형 벽을 세우고 있음을 느꼈다. 나의 성장 과정을 보면 육아 담당자의 성향은 나르시시스트의 성향이 강하진 않았으나 그 시절을 떠올려보면 가정 밖에서의 보육 활동에서 오는 피드백이 강하게 작용 했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엔 애 기죽이지 말라는 말보다는 양보가 미덕이고, 배려가 기본 옵션이며, 모두모두 사이좋게 라는 예쁜 단어로 잘 포장된 공동체 생활이었다. 거기서 본태성 성질머리로 일명 금쪽이가 있었다면 그 녀석이 왕이 방식이었다. 그래서 문제아로 낙인 찍히기 싫어서 더 숨죽이고 살다보니 이런 인간으로 자랐다. 첫 단추가 잘못 꿰인 것 일 수도 있고, 첫 단추를 보고 어디한번 끝까지 해봐라, 그러면 잘못된걸 알겠지 하는 방관자 마인드의 시대적 훈육이 MZ세대들이 대다수 그렇더라는 말로 뭉뚱그리게 되는 에코이스트 집단으로 만들지 않았을까를 가늠하게 된다.




📖에코이스트가 꼭 알아야 할 행복의 조건_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관찰과 분석에 그렇게까지 에너지를 많이 쓰지 않습니다. 그저 주변 환경과 분위기의 변화에 따라 그냥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나 에코이스트들은 그렇지 않아요. 이들은 완전히 다른 삶의 자세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렇다. 우린 잘못 한 게 없다. 그런데 늘 먼저 고개 숙이는 입장이 되어있고, 사과하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입을 먼저 떼는 입장이 되어있다. 그래야 이 사건이 빨리 마무리되어 우리가 원하는 무탈하고 평온한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살고 있어 머리가 과부하에 걸려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다양한 경우의 수를 갖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심리적인 편안함 일 뿐 현실은 더 복잡함을 인지하지만 그건 후순위에 두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더욱 우울해지고 자존감이 떨어지긴 하나 살다보니 다양한 갈래의 시뮬레이션 덕에 타격을 덜 입는 경우도 있었다. 생각하고 있던 결과니까, 예상하고 있었던 수순이니까, 이미 예측했던 방식이니 에너지를 더 써서 몸은 피곤하겠으나 마음에는 타격이 덜 한거라고 좋게좋게 또 포장을 해본다. 그게 내가 숨쉬기 편한 삶의 방식이더라. 이게 불행의 조건이라 하면 내가 너무 불쌍하다. 그러니 이 방식이 나를 살리는 조건이며, 나를 덜 지치게 하는 능력치라 생각하길 바란다.




📖감정 표현을 하지 마세요_ 또한 내 입장뿐 아니라 타인의 입장까지 생각할 수 있는 역량이 되기 때문에, 나 자신의 감정뿐 아니라 상대의 감정까지도 존중하는 겁니다. 서로 감정을 표현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잘 아는 지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지, 절대 나약하거나 겁먹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죠.

에코이스트를 지켜줄 적극적 자기주장 훈련 방식에서는 의외의 문장들로 나를 말리고 있다. 과소평가도 하지 말라하고, 감정을 표현하지도 말라하며, 수용하지도 말고, 대화도 말라하네? 긴말도 필요 없고, 먼저 선수치라하니 지금껏 해온 커뮤니케이션 방식과는 확실히 다르다.

표현의 방식이 다르듯 수용의 방식 마저도 다른 두 집단이기에 이 또한 비난과 공격, 지배의 빌미가 되는 감정이니 방어기제를 갖추라는 뜻이었다. 각자의 세계관에서는 수용이 어려운 것이이 이해를 바라기 보단 그 실마리를 시작부터 제외시키자는 것이다.




📖긴말 필요 없고 이 말만 하세요_ NO는 완벽한 문장이라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더 보탤 필요가 없어요. 안 된다고 말한 후에 더 이상 다른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속담이 번뜩 스친다. 자기가 싫으면 그만인 것을 우린 오랜시간 알고 있었고 속담을 통해 각인되어있었다. 미사여구로 부풀일 이유가 없는 답변이다. 저자는 간곡할 필요도 없이 간결하게 마침표를 찍는 것으로 문장을 완성시키길 바라고있다. 이후의 침묵이나 불편한 분위기로 이어지더라도 견디라고 한다. 이 때의 침묵은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나르시시스트들을 불편하게 만들어 수용하게 만드는 시간을 번다고 생각하길 바란다. 나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점, 나랑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에서 관점을 떨어뜨려놓고 기본적으로 깔아두는 공감과 이해의 기본 기질을 제쳐두어본다.(이 단락이 특히 말이 센 편이다. 202P 정서발달이 멈춰버린, 자기가 제일인 줄 아는 망상병 환자, 유치한 사기꾼을 대하고 있습니다. 로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타인의 성향 비하보다는 극단적으로 간극을 두는 것으로 빠른 인지가 되도록 에코이스트를 설득하는 방식이라 미리 언급해주고 싶은 부분이기도 했다.)




📖더는 억울해지지 맙시다_ '손뼉은 마주치지 않아도 소리가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쪽 손이 가만히 있어도 다른 손이 고속으로 와서 부딪히면, 소리는 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가만히 있는 죄 없는 사람을 휘두르고 괴롭히려 드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어요. 당해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너 자신을 먼저 돌아봐. 다른 사람을 욕하는 건 나쁜 짓이야.'라는 말은 선하고 좋은 의도겠다만 왜 꼭 굳이 나에게만 이 조건을 달아두냐는 것이다. '그럼 쟤는?'이라며 손 부들부들 떨고 얼굴 붉어지며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반박하게만든다. 이건 전후사정을 모른 채 빨리 이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제3자가 하는 가스라이팅인 것이다. 말 한 번으로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무서운 혀가 작용하는 과정이다.


나만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는 꾸준이 나르시시스트와 에코이스트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사례를 통해 개선점을 알려주고있다.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고,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는 말로 상대의 변화하는 성향을 기대하지 않길 바라기도 한다. 나도 쉽사리 고치기 힘든 성질머리인데 내 눈 앞에 있는 저 사람은 오죽할까 하는 마인드를 가지고 바라보면 '나도 난데, 쟤도 참 쟤답다'는 해탈의 인격 상대하기 기법이 나온다. 결국 내가 살자고 버티는 삶이니 잘 지켜보고 보호하는게 맞는 방식이었다. 해야 할 것이 많고, 빠듯한 삶이다. 그러니 답 없는 것들에 쓸데없이 에너지 쏟지 말고, 오롯이 내 인생과 내가 아끼는 애틋한 사람들에게만 괜찮은 사람으로 살고싶어진다. 이렇게 말해도 나 또한 쉽사리 바뀔 놈이 아닌걸 아니까 일단 이러한 방어기제 법이 있음을 계속 인지해보기로 한다.


📖위즈덤하우스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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