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게로 온 시 너에게 보낸다 - 나민애가 만난 토요일의 시
나민애 지음, 김수진 그림 / 밥북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어나 보니 사람이었고, 자라다 보니 시인이 아버지(나태주)였던 '시 큐레이터' 나민애.
시인의 딸로 산다는 것. 그러다보니 시를 이해하고 공부하게되며 시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 그녀.
시들의 쓰임새에 맞게 조금 더 쉽도록 알려주는 그의 해석을 모아둔 책이라 할 수 있는데, 확실히 시만을 읽는것보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이해하는게 더 편했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감정과 공감되는 구절은 되려 시보다 그녀가 풀어낸 이야기들에 집중이 되었다.
시 큐레이터 나민애가 정성스레 고르고, 단락과 단락에 숨어있는 마음들을 끄집어내어 말해주는 걸 읽고있으면 그래 맞아, 나도 그래요 라고 공감의 맞장구를 치게 만들어준다.
그녀가 일러준 시의 조각들이 나에게 와서 울어주고 털어주는 그 생각들 처럼 어느 하나 허투루 적힌 단어들이 없듯 시가 나에게로 찾아와 제 역할을 하고 쓰임새를 찾아가니
나 역시도 '나'라는 개인적인 서사 중 '시'라는 부분이 갖는 의미가 이렇게 다정하고 사랑스러웠음 한다.

36-37P_ 윤호(1956-) 시 '완생'
'당신은, 끝난 것이 아니라 완성하신 겁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마지막 인사가 아름답게 단정하다. 역시 어머니의 마음은 그의 아들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시의 마지막 문장 '구십 생애를 비로소 내려놓으셨다.' 는 문장으로 어머니의 삶이 끝난걸 알 수 있다.
시의 제목인 '완생'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큰 하늘에서 이젠 작고 여린 존재가 되어진 어머니가 눈한번 깜박이면 그 찰나에 돌아가실까 하는 마음에 아들은 마음이 쪼그라들어간다.
그리 좋아하시던 홍시를 구해와도 게장을 발라드려도 넘기질 못하시는 분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떨까. 그게 마냥 먼 이야기이며, 마냥 타인의 삶에서 한장면이라 생각이 들진 않는다.
내가 나이를 먹는 만큼, 나의 부모 역시도 같은 시간의 테두리안에서 자기만의 인생의 끝을 달려가고 있는걸 아니 말이다.
가끔 드라마나 영화에 '호상'이라 말하며 장례식장에서 위로아닌 위로를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호상?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상사라는 말인데, 호상의 기준이 무엇인가.
이렇게 좋은 분이 가신게 마음이 아프지만 그분을 기억하고 함께 생각 할 수 있도록 모이게 해주신 분에게 감사하는 의미라 하더라. 그렇지만 나는 쓰고 싶지 않은 단어 중 하나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외롭지 않도록 곁에서 함께 눈을 맞춰주며 그녀의 완생에 함께 한다는것.
윤호시인처럼 나도 그때쯤이면 담대하고 굳건하게 보내드릴수 있을까?
86-87P_ 이은봉(1953-) 시 '큰아이에게-엄마, 엄니, 어머니로부터'
어머니는 어머니가 되는 순간, 영혼의 일부분에 자식의 방이 생겨남을 느끼게 된다. 그 방에 자식의 세계가 생겨나고, 커지고, 자라난다. 그래서 어미니는 자신의 삶과 함께 자식의 세계를 더불어 살게 된다. 어머니는 오래 사랑하고, 항상 사랑하고, 영원히 사랑한다. 그 마음은 물리적인 법칙보다는 신비로움에 가깝다. 자식이 어디에 있든 어머니의 마음은 자꾸만 자식 곁으로 가려고 한다.
상추를 씻다가, 된장국을 끓이다가, 콩나물을 무치다가 너를 생각한다는 엄마, 엄니, 어머니.
별거 아닌 것에 전부 '나'를 갖다붙이는 엄마. 그냥 당신만 생각해도 될 건데 왜 또 승질 더러운 딸을 생각하나 모르겠다.
우리 주야 이거 좋아하는데....(경상도에서는 이름의 끝 글자만 따서 부른 경향이 있다. 우리 언니는 정아~ 나는 주야~)
그렇게 병아리 눈물만한것만 보아도 딸을 생각하는 걸 보면 엄마에게서 자식이란 존재는 정말 떼어낼 수 없는 일부인가보다.
나민애 큐레이터가 마지막 문단에 적은 내용을 너무나 공감했다. '이 시를 읽어도 다 알 수 없다. 어머니가 가진 사랑이란 자식이 쉽게 알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라고 한 것 처럼.
글쎄 나는 아이가 없어서인지 이러한게 진짜 내리사랑의 방식인지 언니도 언니 아이를 바라보면 이러한 생각이 드는건지.
우리 엄마만 이렇게 애닳는 마음들인지.
나도 엄마가 하시는 것 처럼 따라가야되는데, 그림자도 못 밟는 수준의 마음이라 늘 죄송스러워진다.
이렇게 생각만 하다가 퇴근 후 친정엄마에게 전화해서 오늘 하루 므슨 일이 있었는지 뭘 했는지 물어보며 또 썽질부리겠지.
아왜- 그걸 또 왜 날 줄라고 그래요. 엄마나 좀 잡솨! 라고.
124-125P_ 양애경(1956-) 시 '사랑'
시인이 말하기를 사랑이란 둘이 함께 걸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와는 반대로 둘이 걷다가 어느새 혼자 걸어가게 되는 것을 일러 우리는 '이별'이라고 부른다. 사랑과 이별을 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일로 바꾸니 그 뜻이 참으로 잔잔하다.
나민애 큐레이터도 말했지만 이 시에선 '사랑'이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쓰지 않았다. 그래도 읽다보면 이게 사랑인거지 라며 느끼게 된다.
손을 잡고 나란히 걸으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 종종 듣게되는 결혼식 축사의 단골 문장들.
시에선 '문득 정신 차려 보니 혼자 걷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그 앞에 적힌 문장이 더 아려온다. '둘이 같이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라는 대목.
함께 하고있는 줄 알았으며, 쭈-욱 함께하리라 믿었던 마음들인데 사라진 상대에 대한 아련한 마음.
그래 상대가 다른 이를 보더라도, 아님 이세상에 없더라도, 사랑이 끝나버리는건 아니지. 다만 실존하는 존재로서의 대상만이 보여지지 않을 뿐이지 여전히 애닳고 짠하고 눈물나는 존재임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

200-201P_ 나기철(1953-) 시 '엄마'
대문을 열고 들어와 마루에 가방을 휙 던졌는데 집이 텅 비어 있는 기억 말이다. 집에 아무도 없으면 어깨가 축 처진다. 나를 반겨주던 얼굴이 없으면 세상이 텅 비어버린 것 같다. 사람이 없으면 집의 의미도 달라진다. 어떻게 보면 집은 곧 엄마고, 엄마가 곧 집인 셈이다.
어릴땐 하교해서 달려가면 맞이해주는 엄마라는 존재로 인해 돌아가는 길이 즐거웠고, 나이가 들어선 나를 맞이해줄 아내가 아른거려 퇴근하고 가는 길이 그리 즐거울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나민애 큐래이터가 말한 '집에 돌아올 때 누군가를 부른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 준다면 감사한 일이다.'라고 해석했다.
맞아.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있을 사람이 있는 곳. 그래서 현관문을 열면 다다다 뛰어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환한 얼굴로 맞이해주는 사람이 있는 정말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곳. 그래서 우리는 '집'이 갖는 의미가 돌아갈곳이며, 나의 자리라고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플때 엉엉 울며 엄마를 찾고, 놀랄때 움츠려드는 어깨와 함께 엄마야 라고 소리를 지르고.... 그냥 시도때도 없이 엄마를 찾나보다.
그렇게 그분이 품고있는 단어들과 의미하는 바는 상상 이상의 단어의 조합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도 줄줄이 엮은 문장이 아니라 시로서 숨겨두니 더 애틋해진다.
같은 시를 보아도 각각 살아온 시간의 사전의 언어들로 해석하기 마련이다.
나민애 큐레이터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아버지(나태주작가)의 영향을 안 받을순 없었을 거라 생각을 한다.
생각을 담을수 있는 광주리의 크기와 깊이가 확실히 달랐을거라 여겨진다. 어깨넘어 배우는 것들을 무시 할 순 없는걸 너무도 잘 안다.
그래서 남들보다, 아니 이걸 읽는 나보다 좀더 따숩고 다정하게 풀어줌을 느낀다.
나를 위해 울어주고 '정성껏' 슬퍼해준다는걸 알려준 그녀의 문장. 그덕에 생전 처음 만난 시의 페이지들 속에서도 나를 위해 울어주고있더라.
참 고맙기도 하지. 나를 얼마나 잘 안다고 몇몇 단어들의 조합이 감히 나를 위해 이렇게 울어주나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