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들한들
나태주 지음 / 밥북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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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나브로로 처음 여는 말에서 시작되는 문장마저 작가님 스러움이 느껴진다.


4P_ 소낙비 내리듯 벚꽃 떨어지듯 쏟아진 것이 아니라 이슬비 내리듯 가랑비 내리듯 한 잎씩 두 잎씩 누군가의 가슴속으로 떨어져 내린 꽃잎, 꽃잎.
... ... 미세먼지로 눈이 아프고 숨이 막히는 봄날. 그래도 당신이 있어 보고픈 사람, 자다가도 문득 생각나는 사람, 당신이라도 있어 잠시 다행이예요. 부디 당신도 그러시나요?

 

시작 부터 참 좋은 말이다. 한번에 반하는 것도 아니며, 한번에 찌리릿하고 나를 알아보는 것보다 알게 모르게 내 곁에 있어 감사하고, 조심스레 내 생각에 자리잡아 조금씩 영역을 넓히는 사람.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보다 더 커져버린 그대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 생각만해도 뿌듯하고 기분이 몽글몽글해지는 감정이다.
그게 이성간의 감정일 수도 있고, 나를 아껴주는 존재에 대한 감정일 수도 있는데, 그걸 느끼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 내가 잘 살고 있는거구나. 행복이란 감정을 온 몸으로 느끼는구나.'라는 거겠지.

 

시작부터 참 예쁜 말로, 젖어들게 하는 문장들.
매 장의 앞부분에 작가님의 손글씨가 적혀있는 시 한편씩 수록이 되어있다.
매장 앞엔 대표적인 시 인, '풀꽃' / '사랑에 답함' / '시' / '멀리서 빈다'
봄/여름/가을/겨울 의 계절의 온도 처럼 매 장마다 앞부분의 손글씨 시는 봄의 풀꽃 같으며, 가을 바람 속에서도 사랑을 이야기하는 시 같으며,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느낌의 멀리서 빈다를 보게된다.

 

33P_ 부탁
인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 앉아만 있는 것도 나의 소일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생각하는 일도 / 나의 중요한 과업
어느 날 나 혼자 있는 거 /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는 거
그대 문득 보거든 / 왜 그러냐고
왜 그러고만 있는 거냐고 / 채근해 묻지 말기를 바란다.


가끔 그러고픈 날들이 있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아줬으면 하는 날. 나를 걱정하는 눈빛과 괜찮냐는 질문을 하는 그런 시선을 느끼지만 그냥 모른척 지나가주기를 바라는 그런 날.
그러한 날엔 이 시가 아무래도 딱 드러 맞지 않을까. 미주알 고주알 다 나누고 픈 것도 나의 일이며, 때론 모든걸 삭히고 나 혼자 감당하는 것도 나의 일 중 하나.
감정의 기복이 아니라 생각의 브레이크 타임 같은거라 생각하면 쉽지 않을까.


158P_ 너무 외로워 마세요
너무 외로워 마세요 / 당신 혼자라고 너무 많이 외로워 마세요
언제든 당신 옆에 누군가 / 숨 쉬고 있다고 생각하고
당신 등 뒤에서 누군가 당신을 위해 / 기도하고 있다고 믿으세요.
....


더 자세히 묻지 않아도 상대의 얼굴과 눈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물어 뭣하겠는가. 그대의 눈에 벌써 눈물이 서려있는 것을. 그러니 외로워말고 서러워말고, 힘들어하는게 뻔히 보이는데.
그런 당신을 다 알고 있으니 굳이 말하며 아픈 순간을 곱씹게 하지도 않으려 한다. 말 안해도 아니깐 괜찮다고 다독이는 말들에 스르륵 무너진다.
무너지더라도 그대 곁에 위로하는 이가 있으니 너무 걱정말라는 문장들.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그 한마디가 주는 힘을 알기에 손으로 문장을 스윽 그어 읽어내려가며 위로를 받는다.


아는데, 아는데, 그래도 알지만 듣고픈 말이니까.

 

'한들한들'은 봄과 잘 어울리는 연노랑과 연분홍같은 가루가 묻어나올 듯한 페이지들이 가득하다.
시로서 위로받는 방법도 다양하다. 그 중 나태주작가님은 '잘한다 괜찮다 고맙다'고 등을 톡톡톡 두드려주는 느낌을 받았다.
시험치고 돌아오는 조금 이른 하교길. 가채점하고는 더욱 쳐진 어깨. 알면서 틀렸고, 아는데 잘못 선택한 답변에 자책하고 숙여지는 고개까지.
왠일인지 나보다 일찍 들어온 엄마. 지금쯤 회사에 있어야되는데 어쩐일이지? 벌써 내 시험 성적을 아시는건 아닐텐데 라는 당황까지.
그런 걱정을 싸악 잊도록 해주는 엄마의 한마디. 고생했어 우리딸. 괜찮아 그럴수도 있는거라며 어깨를 싸악 보듬어주는 손.
이번 '한들한들'은 나에게 그런 순간을 안겨준 시집이었다.


시집의 마지막 부분에 작가님은 '시한테 진 빚'이란걸 적어두셨다.


168P_ 좋은 시를 골라 읽음으로 자신의 내면의 어둠을 밝히고 비뚤어진 부분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정말로 좋은 시를 읽으면 바른 마음이 생기고 어두운 마음이 조금씩 밝아지고 삶에 대한 욕구도 생긴다.
정말 공감하는 내용들이다.
내가 만약 중1때 국어선생님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 선생님의 수업이 기다려지고 예쁨받으려 교과서의 시집을 외우고 다독과 교내 도서관봉사까지 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분명 달라졌을 거다.
사람이 좋았고, 그 사람의 생각이 좋았고, 나도 따라 하고픈 맘에 책과 시집을 곁에 두었기에 그나마 썩 괜찮은 어른이 된건 아닐까 하는 짐작도 해본다.

 

나도 '시한테 진 집'이 있는 걸 보니 감사하게 살아야겠단 생각이 커진다. 이 빚을 어찌 갚을지는 '한들한들'을 한번 더 읽으며 고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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