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월; 초선전
박서련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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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루프를 읽으며 최근작이었던 체공녀 강주룡이 궁금했고, 제법 마음에 드는 주제의 선정과 함께 글의 흐름이라 최근에 나온 폐월; 초선전도 기대감으로 아무런 지식 없이 바로 구입하며 휴가기간동안 읽으려 쟁여두었다.

성장소설이었던 '고백루프', 많은 저자들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각자의 이야기를 내어 주었던 '요즘 사는 맛',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며 실제 여성 노동자의 일생을 그린 전기소설의 '체공녀 강주룡'까지. 나에겐 제법 괜찮은 작품의 흐름을 보여주기에 당연히 차기작도 마음에 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구매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삼국지(연의) 속 등장인물,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 달마저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는 초선의 이야기. 저자는 초선을 1인칭 화자로 삼아 직접 자신의 생을 말하며 남성 영웅 서사인 삼국지에서 외전 버전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아름다움을 무기로 삼은 초선, 자신이 말해주는 그녀의 삶 전체. 여포와 동탁을 분열시키는 막중한 임무를 담당하였으나 서사 바깥으로 밀려난 자신을 다시 중심으로 끌어와 어린 거지들과 밥을 빌어 먹고 살던 이름 없는 시작부터 충신의 후손이라는 거짓과 왕윤의 양녀가 되어 스스로 초선이 되는 과정까지. 어찌보면 당돌하고, 어찌보면 또 영약하기 그지없으나 결국 자신이 잘난 것을 알고 그 잘난 점을 내세워 모두를 홀린 여인.



마음에 남은 문장은 없으나 이토록 잘난 여자는 결국 어찌하든 제 삶을 살아 나가며 길이 열리는 구나를 느끼지만 이 이야기를 굳이 중 후반부터는 수위가 높은 장면이 세세하게 묘사되는게 맞을까도 의심이 들었다. 저자가 이 여인의 서사를 알려주기 위해 필요했던 파트였던 걸까를 의심하게 되면서 이 책이 아무런 연령제한이 없어도 되는건가? 요즘 책은 이래도 되나 싶기도 했다. 뭔가 집에 우물을 만들기 위해 일꾼들을 들이는 순간부터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기 보다는 그냥 황급히 내용 전개를 위해 어떻게든 끌고 가려는 황급함이 보였다. 수위높은 장면을 위해서 어떻게든 초선을 가기로 만들려고 했던 과정, 가기들끼리 한방에 지내며 일어난 일들, 동중영이 월사를 먼저 알아차리는 것 부터 하여 정말 내 취향은 아니었다는 것.


초선의 이야기를 제삼자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으로 담담히 풀어냈다고는 했으나 여성의 서사 문학의 감흥을 낳을 것이라 했지만, 색이 빠지면 어떠한 자극적인 요소도 없으니 그것에만 힘을 준 느낌을 받았다. 어려운 형편의 시절이든 왕윤에게 발견되어 양녀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더 멋있는 서사를 기대했던 내가 미련했다는 느낌이었다. 삼국지를 안 읽어서 그런가. 그래서 인물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던 탓을 해야할까. 암튼 나는 이 책이 아쉽고 아깝다 싶어진다.



... 좀 더 알아보고, 출판사 제공 책소개를 좀 더 꼼꼼히 보고 구매 했어야 함을 다시한번 느끼는 이번 해 첫 실패 도서의 기록이다.(주관적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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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오렌지와 빵칼
청예 지음 / 허블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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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과학소설로 분류가 되는구나? 감정을 조절하는 기간 한정 뇌 시술이라는 것 때문에 과학소설로 분류되려나? 나에게 오영아의 삶은 세밀하게 그려진 초현실적 리얼리티 그 자체인데 말이다. 그래서 더 깊게 오영아에게 스며들 수 있었고 오영아의 다음 선택이 궁금했다. 그래서 오영아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 센터를 추천하게 될 것인지 기대하게 되더라.



스스로를 통제하고 동시에 해방을 누린다는 이율배반적인 상태를 완성한다는 말을 계속 곱씹었다. 통제와 해방에 대한 정의와 그걸 균형맞춰 써 먹을 수 있고 손에 쥘 수 있수 있는 능력에 대하여. 자유와 절제의 또 다른 맛이다. 그래서 복잡했고, 어떻게 풀어야 잘 알아먹었다고 할 수 있을지를 고심했다. 그리고 오영아의 삶이 마냥 허구처럼 느껴지지 않아 어딘가 모르게 찝찝하리만큼 내 삶을 들킨 것 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저자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사람들 속에서 버텼는지도 궁금해지고, 다른 책들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 원장이 공허하게 미소 짓더니 큰 손으로 내 등을 훑었다. 어설픈 위로는 안 받느니만 못하지만 살다 보면 필요없는 일들을 서로 용인해야 할 때가 있다. 나 또한 원장과 동일한 표정으로, 텅 빈 감정을 나눠주었다. 돌아서면 금방 휘발될 이 웃음은 너무 가벼웠다.

유치원 교사인 영아. 은우라는 아이의 행동에 다른 원아들이 울고 은우느 떼쓰고. 그 상황을 잘 수습하길 원하는 원장. 아이들이니 봐 줘야하고 아이들이니 보듬어야한다는 생각으로 원장은 큰 사건으로 만들지 않길 바라며 영아의 선에서 모든게 마무리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위하는 척 하고 고생한다는 듯 상사이자 인생의 선배로서 다 지나가리라 라는 뉘앙스를 던져준다. 해결해주거나 나서지는 않는다. 이건 네 일이니 네가 알아서 깔끔하게 끝내고 나 까지 끌어들이지 말라는 듯 선하고도 단호한 미소다. 그래서 더 싫다. 솔직한 마음을 미소로 덮어버린 그 행색을 보면 나이를 먹고 직급이 올라갔을 때 나도 모르게 똑같은 사회적 선함을 이렇게 보일까봐 무서워진다.



📖"늘 내가 더 고맙지."

고맙다는 말만큼 무고한 거짓이 또 있을까.

영아가 이러한 삶을 살도록 지대한 영향을 끼친 2인 중 한명. 룸메이트이며 세상에 혼자 떨어진 듯 살던 시절 살뜰하게 챙겨준 은주. 자신의 의견에 맞춰 공감해주길 바라는 존재로서 항상 자신의 견해는 없는 YES걸이 되어주길 바라는 인물이다. 요즘 흔하게 하는 말로는 가스라이팅이라 할 수 있겠고, 더 편하게 말하자면 일종의 세뇌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세상의 일에 선봉자가 되어야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건 모두 선하고 옳은 것이며, 사회를 위해서는 엄격히 규율에 맞춰 살아야만 한다는, 결국 지 멋대로 자기주장이 옳음을 말하는 인물이다. 그러니 굳이 토를 달아 피곤한 입씨름을 하기 보다는 그냥 고맙고 네 말이 무조건 옳다는 식의 받들어 모시는 것이 익숙한 영아를 보면서 싫지만 대놓고 싫어 할 수 없는 자신의 인간관계와 현실적인 조건에 매번 져 주는 모습을 보게된다. 그리고 그만큼 자기 감정을 누르고 사는것에 만성이 된 생기 잃은 영아가 눈 앞에 그려진다.



📖삶은 이런 식으로 노력을 자주 비껴갔다. 단일 선택지가 선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덕들이 병렬적으로 쌓이면 악행으로 치닫기 쉬웠다.

나는 백번 양보하는 배려였는데, 받아들이는 상대는 당연하게 삼키거나 때로는 지 입맛에 안 맞게 챙겨준다고 싫은소릴 해대는 걸 볼 때. 맥이 빠지고 굳이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하나를 떠올리게된다. 나에게는 수고로운 배려였고, 상대에겐 마뜩잖은 행실로 읽혀진다. 선함과 도덕적 욕망의 추구를 들이 밀어붙였을 때 되돌아 오는 것이 모욕으로 종결되는 상황. 좋아하길 기뻐하길 바랬으나 쓴소리와 함께 싫은 내색이 빤히 드러나는 모습은 '내가 이딴 취급 받자고.....'를 계속 떠올리게 만들어 내가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게 내 신상에 이로운게 맞는지를 계속 되묻게 된다.

선한 사람이 되고자 고양이 밥주는 행위가 캣맘들에겐 눈에 거슬리는 행색으로 돌아 올 때, 환경 생각하는 이에게 텀블러를 사 주었더니 복수 구매하는 사람이면 그 의미가 퇴색된다며 되려 성질을 내는 상황(5년이나 지났잖아? 5년간 2개인데? 그게 맥이는 걸로 보이냐?). 공정거래나 동물복지를 하는 제품을 구입하면서 25마트의 염가판매 매장을 멀리하고 통장 잔고의 잔액을 보며 쓴웃음 짓는 자신을 볼 때. 영아의 노력은 이토록 정확하게 목적과 결과를 일치하지 못하고 항상 비틀어짐을 겪는다. 삶의 노잼 시기를 옴팡지게 다 겪는 온통 지뢰밭인 길을 저벅저벅 걸어가는 기분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쉬운 선택지를 택했다.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보다 일상에 모순을 더하는 일이 쉬웠다.

... ...

사람은 다 그렇게 살고 있다. 사람다움의 본질은 때때로 얄팍하다.

이렇게 쉬운 선택지를 택하면 관계는 생각보다 유순하게 흘러간다. 그렇지만 속으로 하는 욕지거리는 늘어나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내 눈빛은 한없이 더럽고 경멸하는 걸 마주한듯 탁해진다.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상대와 이야기 할 때엔 공감과 동조만 하면 되니 머리를 굴리며 내 생각을 피력할 에너지를 줄일 수 있다. 다만, 그러니까 다만 나 혼자 상념에 잠기거나 홀로 시간을 보낼 때 순간순간 과거를 떠올리면 내 속에 들어앉은 악만 품은 놈이 불쑥불쑥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려한다는게 문제라는 것이다. 뭐 다들 이렇게 사니까 내가 이런 것도 지극히 정상일거라는 생각을 하며.

그래서 영아는 곪았고, 3분 남짓의 짧은 시술이 더 강력하게 들어먹힌건지도 모르겠다. 감정 조절 기간 한정 뇌 시술. 4주의 기능을 부여받았다. 뭐,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에서도 조정협의기간을 4주라며 매번 신구아저씨가 말했던 거니까. 4주는 약 한달. 짧을 수도 길 수도 있는 모호한 시간이며 내 주변 사람들과 한번 정도는 마주하며 시간을 공유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렇다. 이제 기간 한정 도른자로 살아도 된다는 뇌의 신호에 반응 할 시간이라는 거였다. 카타르시스? 비직비직 나오는 웃음과 광기. 스트레스가 눌려 터진 자리에는 이름없는 불행들에 반응하는 웃음이 피어올랐다.



📖스스로를 통제하고 동시에 해방을 누린다는 이율배반적인 상태를 완성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자유의 왕국이었다.

저자가 가장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이야기의 핵심처럼 느껴지는 문장이다. 통제와 해방. 둘 다 알게되었다. 그 자극 하나로서. 센터에서 받은 시술에 대한 기한은 끝이 났고. 이제 영아는 통제 기능이 발달한 원래의 영아로 돌아갈 것이다. 속은 아니라 할 테지만 입밖으로는 언제든 YES를 말하는 모두에서 선하고 착하며 공감 잘 해주고 알아서 잘 하지만 불행은 다시 차곡차곡 쌓아가는 도덕성 짙은 사람으로. 쾌락은 기억하지만 그리워하고 실행에는 옮기지 못하는 절제된 인간으로서. 그리고 다시 이 시술을 추천던 수원의 옆으로.

그리고 추가 시술 없이 자유로운 낯선 폭력을 행사하며, 무딘 빵칼로 해낸다. 수원이 말하는 '너도 해냈구나'라는 그 행동을.

엔딩이 쓰다. 이 시술에 관해 추천했던 은우모와 수원이 왜 자신의 이름을 대고 센터로 가게 했던건지. 그럴 수 밖에 없는 달디단 자극들. 돌아가야하는게 사회적으로는 맞다고 하지만 개인주의적으로는 거부하고픈 유효기간 연장의 유혹까지. 모두가 같은 갈등을 겪는건 맞겠지만, 이걸 통제하는 통제력을 더 키워 아닌척 살건지, 똑같이 피실험자 한 명을 연구소로 밀어 넣을 것인지가 관건이겠지.

달고 상큼한 오렌지 파운드를 먹기 위해서는 끝이 무디지만 그럼에도 칼이라는 이름을 가진 빵칼을 쥐고 썰어내야한다는 것. 그게 인간관계와 같은 반응이라 봐도 되겠지. 이 구역 미친자로 살고 싶지만 현실은 있는듯 없는듯 눈에 띄지 않고 거슬리지 않는 잔잔한 주변인1로 남고싶어하는 사람의 심리를 깔끔하게 담아냈다. 그래서 영아에게 많은 공감을 했고, 내 자아 일부를 옮겨 심은게 아닌가를 생각하게 했다.

개운하지 못한 결과인건 안다. 지속하기 어려운 감정인 것도 공감한다. 그럼에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영아의 다음 행보가 걱정이 되면서도 또 나 대신 속시원하게 한마디 툭 뱉어주길 바라게된다. 내가 못하는거 부디 영아라도 개운하게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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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제스틱 극장에 빛이 쏟아지면
매튜 퀵 지음, 박산호 옮김 / 미디어창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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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선정된 매튜 퀵의 장편소설. 오스카상 수상작인 실버라이팅 플레이북 원작 작가의 신작으로 2022년 아마존 최고의 문학과 소설로 선정된 책. 인류애가 상실된 사회에 꼭 필요한 구원서사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서간문의 형식을 띄고 있다.

편지를 쓰는 주인공은 루카스. 그리고 편지로 그의 이야기를 전해 받는 사람은 정신분석가인 칼이다. 둘은 같은 사건으로 인해 아내를 잃었다. 동질감에서 시작된 마음의 공감이 시작이었을테고,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야 하니 내가 힘을 내려하니 칼 당신도 무너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루카스는 편지를 쓰는 것 같았다. 결국은 루카스는 자기가 살아보려고 자신을 다잡는 마음의 표현처럼 느껴졌다. 똑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니 나의 암울의 끝을 드러내어도 될 만한 사람. 그리고 한껏 슬퍼하고 그리워 하더라도 이해해줄 사람이라고 여긴걸로 보였다. 더욱 사사로운 마음의 조각들까지 모조리 알려주고픈 사람. 그러니 이 글을 쓰는 행위만으로도 루카스는 위안을 받는다. 그러면서 어떻게 치유 해야 할지, 이 어이없는 사건의 전개와 남은 자들의 마음은 어찌 추스려야 할지를 스스로 묻고 답하는 모습을 보게된다.

루카스는 칼에게 18통의 편지를 통해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내어둔다. 머제스틱 극장에서 일어난 참사였다. 역시나 칼 또한 극장에서 아내를 잃었다. 루카스의 집에 한 소년이 찾아온다. 밉지만 마냥 미워할 수 없는 아이가 온다. 자신에게 상담치료를 받던(그는 고등학교 상담교사다) 학생이며 사건의 가해자인 제이롭의 동생이다. 가해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 앨리는 루카스의 집 뒷마당으로 도망치듯 들어와 텐트를 치고 살기 시작한다.(이 상황부터 나는 이해하기 어렵더라. 남의 집에서? 그것도 침입에 이어 거주를?) 천성이 선량한 그는 앨리까지 잃어선 안된다는 생각에 고등학교 졸업이 가능한 프로젝트는 물론이고 어떻게 살아갈지, 주변 사람들과 지낼 수 있는 관계 형성에 도움을 준다.

옳고 그름이 분명한 사람, 그리고 선과 악을 정확히 줄로 그어 이분화 하는 인간이라 '어우 나는 못할거 같아.'를 연신 연발하며 읽어가며 루카스의 선함의 끝은 어디일지를 예상해보며 읽어가는 재미도 있다.(독자와 책의 주인공 성향이 정 반대면 이 또한 색다른 흥미를 끌기 좋은 것)




📖당신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당신의 영혼이 내 영혼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었죠. 마치 숨을 쉬는 것이 우리의 폐와 코가 하는 일인 것처럼, 모든 영혼의 목적은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사랑이라는 것을 남녀와 연인관계, 가족, 사랑하는 대상으로 구분짓는 것을 넘어 사물과 주변을, 모든 인류와 만물을 사랑하고자하는 기본적인 마음의 성향. 루카스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려주는 문장이다. 사랑이 가득한 사람. 그래서 포용할 그릇이 아주 큰 사람.

이 이야기는 앨리의 삶이 낙오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뒷받침하는 인물의 유용한 배경지식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서간문의 끝에는 달아둔 문장이 있다. '이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할게요. 당신은 날 도와줘야 하지만, 린드라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 후에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돕는 일도 다시 시작해야 해요.' 를 통해 자신이 갖고 있는 아주 좋은 능력을 유용하게 써줌으로서 똑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더 확실히 이해하고 빨리 일상으로 복귀 할 수 있도록 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루카스는 가족을 잃은게 빨리 잊혀지는 게 아니다. 애도와 그리움은 그리움이고, 남겨진 이의 남은 몫의 삶도 똑같이 소중함을 알려주고픈 문장이었다. 정에 기대는 마음도 있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날카로움도 같이 갖고 있는 사람이라 이 사람은 뭔가 마음을 먹으면 꼭 해내고야 말겠구나를 느끼게 만들기도 했다.




📖사람을 치유하는 일에 누군 선택하고 누군 내치고 그럴 순 없잖아요. 온전해지고 싶은 사람은 다 치유해야 해요. 그것도 온 마음을 다해 완전하고 철저하게요.

매사에 걱정이 많고 앞선 생각으로 굳이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한 우려를 하는 사람으로서 삶에서 일어날 가정을 하며 미리보기 한편씩을 수시로 만드는 사람이다. 앨리를 그저 상담 교사와 학생으로 아는 것으로 끝났을 때, 제이콥이 그러한 일을 벌이지 않았을 때를 생각해보면서 그렇다면 이러한 마음쓰임의 과정이 없었을 것이고, 모든 이들을 설득해가며 한 사건으로 인해 다수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의 복잡한 과정의 수순을 이어가지도 않았을 텐데를 떠올려본다. 온전해지고 싶은 사람이기 이전에 온전한 삶이라 상실의 슬픔에 대한 습득과 극복의 과정도 없었을 거라는 거지. 그런걸 보면 자기극복과정을 넘어 집단의 심리 변화와 편견을 바꾸는 과정이 얼마나 큰 노력이 드는지를 느끼게 된다.


📖당신에게도 당신만의 상처와 악마가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모든 치유자는 처음에 상처받은 사람이었다고요. 그들의 목표는 그 고통을 감당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그 고통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요. 그러다 보면 고통이 스스로 치유된다고 했죠.

칼은 답장을 하지 않았고, 루카스는 이전에 보낸 편지에 이어 내용을 전하고 싶어 자신이 쓴 편지를 미리 복사해 사본을 둘 만큼 철저했고, 그리고 꼼꼼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흥미로워 할 것이라 여기면서 자신으로 인해 살아갈 용기와 변화되는 세상에 대한 재미를 느끼길 바라는 기대감이 가득해 보였다. 그러니 자신의 상황과 고통을 의미있는 것으로 남겨보고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하고 있음을 보여주고팠으며 잘했다고 칭찬받길 원하는 기대심리도 가득했다. 하지만 침묵을 유지하는 칼. 그로 인해 이러한 고통마저 감당하기로 하는 루카스를 통해 이 사람은 쉬이 지칠 사람은 아니겠구나를 생각해본다. 편지의 말미에 두렵다고는 했으나 아주 잠깐 그러할 뿐 또 한켠에서는 답장을 쓸까말까를 고민할 칼을 먼저 떠올리며 또 편지를 쓰려고 자세를 고쳐앉을 루카스가 눈에 그려진다.



📖내가 아는 거라곤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내 인생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암울한 시기에 나를 가라앉지 않게 해준 유일한 힘이었다는 것뿐이예요.

그냥 들어주는 것. 어떠한 결론을 내리기보단 가만히 귀를 귀울여가며 꼼꼼하게 이야기를 받아들여주는 마음. 그게 루카스를 살게 했으며, 밝고 희망차지 않은 이야기라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 말 할 힘이 났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외면하고 벽으로 둘러쌓인 세상이 아니라 어느 한명 즈음 내 이야길 들어줄 자세를 갖추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자기세상속에 갖혀있지 않을 구실을 만들어준 편지들이었고, 긴 시간이었다.


가족 구성원 일부를 잃은 이. 그리고 가족이 그 사건의 가해자여서 모두에게 질타를 받는 이. 모두 마음이 쓰이는 인물의 배경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죽음과 그의 만행이 용서되고 이해될까? 상대를 보면 울컥울컥 할텐데, 루카스의 직업과 천성의 심성이 사람을 한명 살리고, 마을사람들의 시선을 바로 잡는데에 한몫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성정이 더욱 궁금해지고, 그게 될까를 의심하며 편지글을 읽었던 것 같다. 루카스의 상황에 나를 대입해 보더라도 스스로의 상황에 더딘 자가치유와 더 커지는 가해자에 대한 분노가 불규칙적으로 오르락거릴텐데, 그리움의 심연이야 겉으로는 애써 괜찮은 듯 포장하더라도 절망과 분노의 울컥거림을 앨리의 성장서사에 마음을 쏟아질 수 있는 그의 치유방식은 놀랍도록 침착하고 선했다. 그래서 나는 못 할거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음 편지에는 감정을 토로하는 것도 있을거라는 추측을 했던 것 같다.(결국 없다. 루카스는 그저 천성이 그러한 인물이었다)

결국 선한 사람의 영향력 덕에 사람들이 변하고, 마을이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었다. 마치 저녁 노을을 바라보면 나 역시도 얼굴이 붉게 물드는 것 처럼 그렇게 스미는 방식. 그래서 사람들의 영향력이, 마음의 진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으면서 이렇게 마음 먹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어려웠을지를 긴 편지글을 통해 이해하게된다.

그래서, 나는... 나같은 사람도 그게 될까? 이러한 마음을 먹으며 상대를 구원하기 전에 나부터 구원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본다. 복잡한 머릿속의 생각들을 글로 적어두는걸 좋아하긴 하지만 누구에게 맘 편히 내어본 적이 얼마나 있나를 떠올려본다. 매일 쓰는 블로그의 글 이라도, 때때로 비공개를 걸어두고 마음의 벽을 촘촘히 세우는 것에 익숙해져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온전히 내 마음을 내어두는 것부터 시작한다면 간헐적 선한 사람으로, 빈도수가 늘진 않더라도 때때로 선한 사람으로 바뀔 수 있을거라는 조금 긍정적인 믿음으로 루카스를 닮아보고파진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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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의 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4
조예은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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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습하고 찐득거리는 계절에 딱 어울리는 호러소설이다. 내가 공포영화도 잘 못 보는데 글은 괜찮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초딩시절 수련원에서 담력체험 한답시고 링과 주온을 틀어주며 야맹증인 놈을 뒷산에 손전등도 없이 다녀오라고 했던 날것의 교육. 90년대엔 이렇게 사람을 강인하게 키우려했으며 정작 당한 당사자는 두 무릎에 상처딱지를 남겼고, 뭐만 하면 놀라제끼는 인간으로 만들었지.

그런 쫄보가 읽어도 적당히 스산하고, 적당히 쫄아들고, 또 깊이 파고들면 짠해지는 글을 완독하게 만들었다. 결국 인간이 제일 무서운 거라는 이야기로 마무리되게 만드는 소설. 돈, 죽음, 칼, 그리고 조예은의 문장들.

출판사에서 제공한 홍보문구와 영상은 그야말로 물개박수 치게 만들도록 잘 찍어냈더라.


이야기는 적산가옥을 배경으로 1940년대에 머물렀던 준영과 2020년대 윤주의 이야기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이어진다. 준영은 윤주의 외증조모로 이곳 적산가옥에서 상주 간병인으로 살았던 이야기의 기록을 남겼고, 그 기록을 윤주가 읽어가며 같은 장소 다른 시간. 같은 장소 다른 사건을 겹쳐보여주게된다. 외증조모였던 준영이 왜 윤주에게 상속받도록 한 것인지. 그리고 준영이 조선인 간병인으로 들어와 있으며 맡게된 유타카는 어떤 인물인지 알려주며 이야기는 깊어진다. 윤주의 곁에서 착한 사람, 한없이 윤주를 아끼던 남편이 될 우형민은 무엇을 위해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녀의 곁에 있는 건지를 알아가며 준영의 이야기의 끝과 왜 자신이었으며, 그 자신에게 알려주려한 건 무엇인지를 알게 될 즈음 결국 모든 것은 사람에서 부터 시작되었고, 사람의 욕망과 죽음은 잇닿아 있음에 씁쓸해진다.



📖그런 식이었다. 불행과 큰 재난을 비껴가는 그의 능력은 그저 행운이 아닌, 어린아이의 살을 베어내 얻은 결과였던 것이다.

조선인 간병인 준영. 이야기의 시작은 준영이 나이들어 이야기의 주요 배경이 되는 적산가옥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그 죽음으로 인해 이곳을 상속받게된 윤주의 시점으로 번져간다. 그 전에 이 적산가옥을 말하자면 준영이 오게된 시점부터가 순서겠지.

일제강점, 조선땅에서 유복하게 살던 일본인 상인 가네모토. 그에겐 외아들이 있는데 전혀 닮지 않은 외모(닮았다면 모친과 닮았다고 기록되어있음)와 함께 집밖에 내어놓기 부끄러운 듯한 뉘앙스로 그 아일 봐줄 상주 간병인으로 고용되어 들어온다. 병약하고 예민하고 폭력적인 걸로 알려진 아들 유타카. 양자로서 아버지에게 육체적, 정신적 폭력과 착취를 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이를 해할 때 얻어 낼 수 있는 예지력같은 녀석의 능력. 불행을 비켜가고 재난을 피하고, 사치스러운 부를 독식 할 수 있었던건 유약한 양자에게 폭력과 상처를 내면 더 뚜렷하게 볼 수 있는 미래 때문이다.

양자로 얻게되어 가족이 생긴 기쁨과 함께 살아 갈 수 있는 의지는 개뿔. 이 녀석이 곁에 있어야만 돈이 들어오고 이 땅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기에 집밖에 내어 두어서도 안되고, 집 안에서 혼자 죽게 내버려 둘 수 도 없는 가네모토의 황금오리이자 개인의 소유물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이다.

결국 모든 악의 시작과 독의 정점은 사람이다. 지주와 농민에게 빼앗은 땅으로 곡식을 수출해 부를 축적했고, 사업에 모든 성공을 거머쥐고, 치고빠지기의 귀재처럼 그려지지만 그 중심엔 도련님으로 불리우는 아들이 있었어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유타카는 알면서도 아버지라는 인간의 곁을 떠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 "그럴 일은 없어. 나도 아버지도 곧 죽을 거거든." 자신의 죽음마저도 예견하고, 아버지의 죽음 또한 알고 있는 소년. 죽음을 거스르지도 않을 것이며, 이러한 인간 살상의 과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삶. 유카타는 도망가면 잡혀 올 것이 뻔하고, 벗어나려해도 결국 아버지의 손 안이라는 걸 알기에 그냥 다 내어두고 죽을 순간만을 기다리는 듯 했다. 족쇄를 채워넣지 않았지만 집 안에 상주하는 직원들의 눈과 귀가 사지를 묶어 놓은 듯한 상태라 죽을날만 기다리는 산송장의 기운을 담고 있어 측은함이 더 깊게 번지게 만든다.




📖이 또한 새로운 방식의 노략질을 위한 발판 아닐까 하는 의심부터 해무에 가려진 낙원의 섬을 발견한 것만 같은 흥분까지. 첫째로 당황스럽고 둘째로 기뻤다. ... ... 설레면서 동시에 두려웠다. 급변은 어쩄든 현 상태의 종말을 의미했으므로, 곧 다가올 붉은담장집의 결말을 기다려야 했다.

코앞에 다가온 광복. 어쩌면 나라가 얻게될 자유보다 자신의 걱정과 근심의 원흉이 사라진다는 기쁨이 더 크게 와닿을 것이다. 헌데 그것만 바라보기엔 내가 모시는 사람, 내가 보살펴야 하는 가족 이외의 또 다른 인물의 안위가 걱정되어 마냥 기쁠 수도 없는 복잡한 마음의 종종거림. 이미 유카타에게 들은 단어들도 있었고, 그렇다면 이 작고 유약한 소년에게도 끝이 코앞에 다다른거라 봐도 무방한 것인데, 이녀석이 거짓말을 한게 아니라면 얼마 남지 않은 것인데 그러면 그 이후에 자신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잡고 있어야하는지를. 그렇다고 섣불리 서두를 수도 없어 바라만 봐야하는 입장. 준영이 할 수 있는 건 고작 따스한 땅콩빵을 품에 안고 돌아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게 다라서 마음이 쓰인다.

가족이라는 고리에 엮인 이보다 더 마음을 써주는 사람. 돈을 위해 죽음이든 칼이든 서슴치 않는 상황을 알지만 그럼에도 무던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흔들리지 않고 지켜내는 것. 그 무던함이 유카타를 좀 더 살게 만들었고, 윤주에게 정신차리고 버텨야 함을 미리 언질해주는 준영의 성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작가의 말_ 산 자가 죽은 자의 삶을 대신 이야기해주는 것과는 다르다. 그건 타인의 눈으로 추측하는 것에 불과하다. 오직 호러만이 죽은 자가 죽은 입으로 자신의 소리를 낸다. 그 장르 안에서 상식은 쓸모없다. 실체 없는 유령들에게 경계란 무의미하니까. 그들은 육체가 사라졌어도 집요하게 남아 말을 건다.

준영의 이야기 만큼이나 이곳으로 정착하려는 윤주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교차된다. 준영 못지 않게 윤주 또한 평범한 세상에 살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예민하게 주변을 살피지만 정작 자신의 앞에 마주하고 있는 가장 가까운 이에게 충격을 받게 된다.

적산가옥을 배경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남편이 될 사람과 아내를 나란히 두고 믿음과 사랑이나 행복의 미래를 꿈꾸기 보단 이 사람을 밟고 올라가 더 많은 부와 상대를 배제하여도 상관없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이들. 그 끝으로 가는 방식이 어찌 되었든 간에 그들은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상대의 고통이나 감정의 피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나마 유타카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봐 주었고, 가장 좋아하는 땅콩빵을 사다주며 그의 안위를 걱정했던 유일한 사람. 그래서 자신의 미래를 어찌 할 순 없겠으나 준영의 생에 앞을, 그리고 준영의 자손이 겪게될 큰 시련을 미리 알려주고팠던 마음을 볼 수 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에게 치유 받은 이가 자신의 선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이었다. 준영은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를 치유해주는 간병인 간호사 이기 이전에 유일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말벗이며 걱정을 해주는 존재였기에 서늘한 적산가옥에서 잠시나마 위안을 얻지 않았을까를 생각해보면 어떠한 실체없는 유령이라 한들 결국 사람의 독한 심성에서 시작된 것이고 그 악함이 결국 다시 업보로 너울처럼 넘어오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걸 확신하게 되는 글이다.

귀신이든 나발이든 사람, 늬들이 제일 무서워.(나는 꼭 사람이 아닌 것 처럼 말하지만 나도 뭐 결국 사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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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비실
이미예 지음 / 한끼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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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유행하던 말이 있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무서운 말. 어느 조직이드 일정량의 진상, 무능력자, 얌체 등 일명 '또라이'가 존재한다는 법칙이다. 어? 우리 조직에는 그런 인간은 없는데? 라고 느끼는 순간. 자신이 그 또라이가 되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는 무서운말. 그게 번뜩 떠오른 진짜 빌런들 사이에 숨은 가짜 빌런 찾기.


이야기는 7일간의 합숙 리얼리티 쇼 '탕비실'에 섭외된 이들의 촬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로부터 '함께 탕비실 쓰기 싫은 사람'으로 뽑혀 캐스팅 된 각각의 직장인들이다. 출판사 소개글이었던 내용인데 다음 문장이 마음을 쿵 하게 내려 치더라. 평소 자신이 동료들을 위해 베풀었던 친절과 배려가 동료들에게 더없이 불쾌하고 오싹한 소름으로 전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찰영이 시작된다는 것. 누군가에게 밉상으로 보였던 점들이 정작 본인은 남을 위한답시고 일부러 하곤했던 행동들이라는 것. 그러한 면면들이 모여 미워하게되고 눈살찌푸리게 만들었다는 사실.

그래서 진짜 싫은건 누구일까? 그 사람의 행동이 싫었던 걸까, 그저 그 사람 자체가 싫어서 모든게 미워보였던 걸까를 생각해보며 읽다보면 밉상짓에 짠함이 베여있고, 잘해주려 했던 마음도 슬쩍 보여서 씁쓸하기까지 하다.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뒷말을 듣는 것이 으스스했다. 텀블러는 자기에 대한 이 설명을 얼마나 납득할 수 있을까? 내가 이걸 듣고도 앞으로 그를 선입견 없이 대할 수 있을까?

각각의 사무실 빌런으로 뽑혀 여기까지 온 사람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여기까지 온 이유를 가지고 닉네임이 불려진다. 싱크대에 안 씻은 텀블러를 늘어놓는 자칭 환경 운동가라는 사람은 이름이나 직책보다 텀블러로 불리운다. 그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자료화면을 통해 보게되는데 전후 사정을 모르는 출연자들로서는 화면속 동료들이 싫어했던 꼭지들에 대한 말만 담아듣게된다. 일면식도 좋고싫음도 없던 이가 색안경을 끼고 보게 만드는 아주 좋은 인간 분류의 방법. 내가 이러한 면들 때문에 싫었으니 너도 당연히 싫어하겠지? 라는 동조를 구하는 뉘앙스다. 이래서 사람의 입이 제일 무서운 거지.



📖나는 살면서 싫어하는 사람을 더 알아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 항상 그랬던 것 같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건 쉽지만 정말로 알아보려고 노력하는 건 어렵다.

보통은, 아니 대부분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굳이'라는 단어를 덧붙여가며 싫은 점에 대한 이유를 찾아내며 인과관계를 따져보는건 아니니까 말이다. 싫음에 대한 정확한 것은 잘 없었다. 그냥 단면적인 모습이 싫었고, 그게 계속 거슬리고, 그러니 그가 하는 모든것들이 아니꼬워 보이면서 사람 자체가 싫어지는 수순을 밟게 된다. 그러니 노력은 필요 없지. 알아볼 이유가 뭐 있을까. 그냥 시작부터 '싫다!'로 시작되는 벽이 생긴 것이니 알고싶은 마음을 안 가지게 되는 느낌이다. 그게... 정말 나만, 그리고 여기 주인공만 그러할까?

그렇다. 이건 진상 콘테스트의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을 싫어하게되는 과정, 인간과 인간 사이에 좋고 싫음이 변해가는 흐름. 그리고 알려고 하지 않으며 타인의 입으로 전해진 단면적인 상황에 전체를 덧입히는 과정으로 그렇게 사람은 구분짓는 걸 드러내고 싶었던 거다.


📖나는 그들이 내가 베푼 친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의아했다.

누군가는 타인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고자 자신이 번거로움을 자처한 행동이었고, 누군가는 시키지도 않은 일에 대한 것과 더불어 자신을 일거수 일투족 지켜보고 따라하려는건 아닐지. 그리고 왜 이러한 정성을 들여가며 나의 편의를 봐주려하는 건지를 생각하며 감사함보다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걱정과 부담으로 작용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서로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잣대로만 단정지으며 좋아할 거라 기대하고, 싫어하는 짓을 저렇게 고생스럽게 하나를 생각만 할 뿐이다. 왜 말하지 않았냐고? 말 하지 않아도 알아 줄 거라 믿은 것과 함께,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 상대도 그리 알아 줄 거라는 확신만 있었던 것이다. 당연한 공감을 기대했고, 의문을 넘은 의뭉스러운 두려움으로 겨루는 중인 것이다. 이 대립 관계 괜찮은걸까?


📖요약하자면 나를 오해했던 것 같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런 걸 오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게임이 끝난 후 후일담으로 이 리얼리티 쇼를 본 후 동료들의 반응이다. 방송 잘 봤다며 미안하다고 먼저 말을 건넸다. 오해라는 말과 함께 가볍게 사과하고 넘겨보려는 두루뭉술한 반응이다. 오해라고 말은 하지만, 다들 자신들이 본 그대로가 그런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굳어진 뒤 였던 것. 영상을 통해 이미 그가 했던 행동의 목적이 나왔으니 더이상 입밖으로 꺼내어선 안되는 비뚤어진 시각. 오해라 하면 모든게 없던 일이 되는건 아닌데 말이다. 이렇게 한 사람이 빌런이 되어가고 토끼몰이가 시작되며 이구역 또라이를 생성해 가는 것이겠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면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소문과 뒷담화의 덩어리들 인데 매번 마주하고 나도 일원이되고 또 피해를 받는 당사자가 되기도 하지만 도통 적응하기 어려운 심리들이다.


📖작가의 말_ '싫음'에 관한 내 나름의 분출이다. 탕비실은 일상적 휴식의 공간이지만 원하는 만큼 무한정 머물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내게 필요한 것이 구비되어 있지만 그것이 완전히 나의 소유는 아니다. 나에게 허락된 공간이지만 나에게만 허락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꼭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의 축소판 같다.

회사생활을 하다보면 일이 힘든건 적응해 가면 그만이지만 사람 때문에 힘든건 참기가 어렵다. 그래서 퇴사를 하는 사람 여럿을 보았고, 나도 그러한 빌런 몇몇의 고자극 고스트레스로 인해 머리카락이 숭덩숭덩 빠지며 사람이 퀭해지는 걸 경험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그 사람이 숨쉬는 것 조차 싫어지더라. 시작은 단편적인 모습이었지만 그 끝은 눈덩이 굴리듯 커지니 존재자체로 완성이 되는 싫음이었다.

탕비실은 인사만 나누면 되는 공간이다. 굳이 사생활을 공유하며 일명 노가리까고있을 곳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안면있는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잠깐의 찰나 정도겠다. 그러니 딱 오해하기 쉬운 애매함의 아는척의 시간인 것. 그러니 이해를 바라지도 이해를 해주려 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게 탕비실 빌런 생성의 시작점이다. '왜?'는 없지. 굳이 '왜?'를 들먹여가며 잡담지수를 올릴 에너지를 쓸 이유를 못 찾는 거지만 흠집 내는건 세상 재미난 못된 성질이니 계속 그렇게 밉상에 밉상을 얹어가는 온상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싫어하니 같은 동료도 그 점을 동조해주길 바라는 마음. 하지만 나는 그런 미움을 받기는 싫어하고 세상 착한 사람이고픈 어이없는 선긋기.

이게 책에서만 나오는 내용이 아니고, 현실은 더 과장되었고, 더 악독하며, 더 표독스럽게 사랍을 긁어부스럼 낸다는걸 알지만 그러한 못되쳐먹은 짓을 하는건 내가 아니라 늬들이라고 믿고픈 세상이다.

리얼리티쇼야 다른 공간에 있던 빌런들을 모아 술래를 찾고 상금을 타면 그만이지만, 현실은 상금도 없고 이 쇼가 끝나면 해체되는 일도 없는 가족보다 더 자주 보게되는 사람들로 대면하게 될 것이다. 아침부터 퇴근까지 쭉 보게될 현실. 차라리 리얼리티쇼가 낫지 현실은 매번 이렇게 전쟁이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나는 빌런을 동조하는 무리중 하나인가 빌런인가를 생각해보면 딱 경계에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씁쓸해진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빌런일 것이고, 내가 바라보는 시선에는 나 이외의 인간들이 빌런일 테니 말이다.

이래서 형체가 없는 귀신보다 형체가 있으면서 내 앞에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헤실헤실 웃고있는 사람이 제일 무섭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

... ... 이래서 퇴근이 마려운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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