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간 - 도시 건축가 김진애의 인생 여행법
김진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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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건축가로 알려진 그녀이지만 나에겐 알쓸신잡에서 잡학박사로 더 친숙한 김진애. 건축가로서 세계와 국내를 돌아다니며 건축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나라와 지역이 갖고있는 재미요소들을 참 잘 알려주는 이야기꾼 중 한명이었다.

원래 그녀가 잘 하는 일, 밥벌이의 주된 업인 도시건축가라서 인간이 문명을 이루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밖에 없던 그 여행에서 느껴온 감정과 여행 후 남겨진 흔적들을 떠올려보며 한참동안 제약이 많았던 그간의 일상을 위로해주길 바라면서 읽기 시작했다.


홀로 갈 것인가? 무엇을 위해 갈 것인가? 누구와 갈 것인가? 풍족과 가난 어떤걸 선택해 짜 볼 것인가? 꼭 가야 할 것인가?

이러한 고민들은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초반에 결정해야하는 갈래들이다. 나 혼자 갈 수 있을지, 가야만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연인과 가는지 아이와 가는지, 부모와 갈지, 반려견과 갈 수 있는 여건인지도 우리는 많은 결정을 하고 선택을 해야 한다. 재정상태에 따라 시간 여건에 따라 결국 그러다 내가 꼭 거길 진짜 가야 하는가? 티비속 걸어서 세계여행을 틀어봐도 나쁘지 않을텐데? 라는 생각에 주저앉기도 여러번이었다. 나만 그러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는 듯 김진애는 이러한 출발 직전까지의 갈팡질팡 하는 마음을 3개의 파트로 나뉘어 자신의 여행역사들을 여시로 들며 일단 나는 다 해봤으니 이야기는 들려줄게. 대신, 선택은 결국 너의 몫! 이라는 듯 말해준다.

​(일때문에 가더라도 일단 사무실 밖을 나가는 그녀의 업과 삶이 부러울 뿐이다.)




📖 프롤로그_ 짧지만 농밀한 비일상적 체험으로 가득한 여행의 시간은 그래서 일상의 시간으로 돌아왔을 때 두고두고 곱씹게 만든다. 여행은 각 여행길 하나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인생의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여행의 시간은 비록 짧아도, 여행을 품은 인생의 시간은 무척 길어진다. 인생의 시간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 중, 여행만 한 게 없다.

여행을 하는 시간과 거리는 당시엔 제일 중요한 요소이겠으나 결국 이후에 회상하는 순간엔 모두 행복했고, 즐거웠고, 때로는 고생도 많았으나 가길 잘 했었구나 싶은 결말로 미화된다. 그 순간이 너무 달콤해서 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려면 오늘을 잘 버티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다잡아본다. 한번이 어렵지 그 한번에 매료되면 빠져나올 구멍이 없다는 것. 유일한 여행의 단점이겠다.




📖 홀로여행의 근력_ 첫 홀로여행은 비록 시작은 당황스러웠으나 끝은 대성공으로 마쳤다. 엄청난 기대감과 상시적 긴장감으로 가득했으나 여행의 목적은 확실히 이루었다. 내 발로 걸어보고 내 눈으로 보고 나니 막연함이 없어졌다. 알고 있던 것도 생생한 앎으로 다시 내 삶에 들어왔고 머리로 알고 있던 것에 영혼이 불어넣어졌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소득은 홀로여행을 '해냈다'라는 뿌듯함으로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가 커졌다는 것이다.

나의 홀로여행은 많이 늦은 나이였다. 다들 한번쯤은 꿈꾼다는 대학시절 워킹홀리데이도 아니고, 고3 졸업여행도 아니다. 제대로 된, 그러니깐 내가 홀로여행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결혼 후 남편과 휴가 일정이 맞지 않아 혼자 작정하고 떠난 여행이 내 인생 각잡고 계획한 홀로여행이었다. 쫄보와 겁보를 모두 탑재한 인간이라 몸만 컸던 어른이었다. 홀로 비행기를 타는것도, 혼자 수화물을 올리는 것도, 누구에게 이끌려가는 것 없지 혼자 지도앱을 보고 지하철을 타는 것도 모험이고 도전이었다. 어린시절 처음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던 그 '해냈다'는 기분을 다 커서 다시금 느끼는데 이게 뭐라고 짜릿하고 어깨를 으쓱이게하나 모르겠다. 나 자신에 대한 신뢰? 나 자신에 대한 신뢰! 로 물음표에서 느낌표로 바뀌는 그 짜릿함을 김진애 못지 않게 나도 누려본 감정이라 반가웠다.



📖 홀로여행의 근력_ 홀로여행은 나를 발견하게 해주는 최고의 기회다. 나의 가능성과 한계, 나의 기질과 성향, 나의 동기와 목표, 나의 역량과 준비 태세, 나의 심리와 행위, 나의 불안과 약점 등을 홀로여행이라는 의외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홀로여행에 근력이라고 표현한게 가장 맘에 든다. 근력도 좋고, 보기좋은 굳은살이라해도 자랑스러운 흔적이다. 내 성향과 행동거지를 아니 더이상의 도전을 하지 않는 틀안에 갖혀진 삶 말고, 선 좀 넘어봐도 되는 그런 패기도 해봐야 느는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선 넘는 정도가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그런 악행은 아니지 않는가. 뭘 좀 아는 어른은 도덕적 행위에서의 선넘기 말고, 나 자신이 지정해둔 한계치의 선넘기를 해보자는 거다.



📖 효도여행은 누구에게나 미션_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이다. 더 알고 더 나누고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부모와 같이하는 여행에서 부모는 다 큰 자식의 듬직한 모습에 의지하면서 갖은 모험을 시도해볼 수 있고, 자식은 인생에서 놓쳐버렸던 즐거움을 발견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며 뿌듯하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함께 할 수 있는 것 자체로 감사한 것이 효도여행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고, 그 자금으로 두분을 편하게 차를 태워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뿌듯함. 다 큰 자식에게서 받는 당신들의 젊음시절의 보상이라 해도 모자란 서비스이다. 당신들이 키우고 먹이느라 놓친 인생의 재미진 순간을 내가 먼저 누려봤으니 이번엔 제가 선두로 나서서 함께 해 보는 것. 이게 서로가 느끼는 가장 뿌듯하고 기분좋은 순간이 아닐까.(다만, 이 여행에서는 주의 할 것이 있다. 앞서 말했지만 욱하는 감정과 울컥하는 심보를 빼 놓고 가야한다. 토끼가 용궁으로 갈 적에 간을 빼두고 와서 아쉽다고 말하듯 우리도 그러한 답답한 감정을 내방 침대위에 고이 재워두고 와야한다. 안그럼 효도여행이라 시작하고 대판싸움난 여행으로 끝날 수 있음을 명심하자.)



📖 가난한 여행vs부자 여행_ 인생이란 불공평하게도 또는 아주 공평하게도, 돈이 없을 때는 시간이 많고 돈의 여유가 있을 때는 시간에 쫓길 확률이 높다. 돈과 시간을 모두 손아귀에 쥔 사람들을 우리는 부러워하지만 그런 사람은 소수의 유한계급일 뿐이다.

내가 제일 잘 쓰는 말 중 하나인데 '얄궂다'는 표현이 가난한 여행과 부자 여행을 한 후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얄궂게도 돈이란 녀석과 시간이라는 놈은 어째 균형을 맞춰 손잡고 다가오는 법이 없다. 돈없던 학생시절은 시간은 많았으나 멀리 갈 수단이 없었고, 돈 좀 버는 사회물을 먹어본 놈이 되고나니 내 삶의 패턴보다 회사에서 꾸려둔 1년치 사업계획에 휘둘리다보니 평생 가장 긴 휴가를 쓰는 건 신혼여행 딱 하나 뿐이었다. 대기업처럼 안식년이든 근속휴가든 그딴건 딴세상 이야기인 지방 기업의 근로자로 살다보니 어쩌면 내 삶에서 가장 긴 휴가였던 그 때를 더 야무지게 쓰지 못한게 한이 되기도 하더라. 암튼 얄궂어 얄궂어! 어째 똑같진 않더라도 엇비슷하게 다가와 SNS에 한번쯤 허세부릴만한 호화로움을 안 쥐어주나 모르겠다.


📖 에필로그_ 여행은 이 사람을 이렇게 조금 변화시켰고 더 성숙하게 만들었구나. 고맙다! 안심이 된다.

보고 배우고 느끼는 것 만큼 사람을 변화시키고 성숙시키는 것도 없을 것이다. 내가 직접 딛어보고 바라보며 부딪혀 보는 것만큼 빠른 습득력을 보이는 것도 없었다. 그게 여행이라면 프로 여행러들은 100% 공감하겠지? 책상에 앉아 곧은 자세로만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나가봐야 그 참맛이 느껴졌다. 단짠단짠보다 더 짜릿한 단씁단씁한 여행의 감칠맛. 미리 습득한 걸 써먹었을때 느끼는 단맛과 예기치 못한 상황에 처했을 때 오는 쓴맛, 그럼에도 어찌어찌 해결하고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 할 때 느끼는 최고 당도의 단맛까지. 이 묘한 단씁단씁에 녹아들면 결국 상습 여행러가되고, 틈날때마다 항공편을 뒤적이는 나로 변해가더라. 이게 살짝 허세와 절약없는 삶처럼 보이겠으나 그건 또 아니라는 거지. 이렇게 갈려고 악착같이 회사에 붙어있으며 일개미처럼 살고있으니 삶에 제대로된 원동력으로 봐주면 좋겠다.


가장 많이 공감을 했던 2부 관계속의 여행. 5년의 연애와 9년의 결혼기간동안 함께했던 짝꿍과의 여행은 행복했던 순간들로 가득하다. 그렇다. 기억은 미화되고 자기 맘대로 각색되지만 분명 행복했던 기억이 많아서 그렇지 않을까 단정지어본다. 아이와의 여행에서는 친자식은 없으나 조카들과 함께 떠났던 제주여행은 부부 둘만 떠났을때보다 많은 제약이 있었다. 그 덕에 나의 엄마아빠가 피곤에 서린 주말 휴식을 마다하고 차를 몰고 나오셨음을 기억 저편에서 끄집어 낼 수 있었다. 어린시절 이렇게 많은 배려와 양보덕에 나는 행복한 기억들을 갖고 자랐음을 느꼈다. 그렇다. 겪어봐야 깨닫는 순간이 많다. 또 다른 관계속 여행인 효도여행 파트를 보니 나의 엄마와 엄마의 엄마와 함께 했던 3대 모녀여행이 기억나 클라우드를 뒤적거리게 만들었다. 아이랑 함께할 때보다 많은 쉼표가 필요했다. 계획형인간이 시간단위로 쪼개어 쓰던 빠듯한 일정잡기의 가이드처럼 보내던 삶에서 뒷짐지며 그녀들을 뒤따라 자분자분 걷던 순간이었다. 언제 또 오겠나 싶어 명소들을 구석구석 둘러보기보단 자연따라 시간되는 대로 흐르듯 가다가 벤치에 앉아 햇살쬐고 바람을 만져보는 그런 느림보 여행. 해가 지기전에 돌아와 일찍 여독을 푸는 이른 하루의 정리까지. 그녀들 덕에 또 다른 여행의 방식을 배웠던 날들의 기억. 여행의 다사다난함과 지난날 다녀왔던 행복한 시절을 떠올리기에 딱인 파트였다.

국내보단 국외를, 더 많이 다녔던 김진애의 추억여행기록이다보니 해외를 많이 가본이들이 공감할 점들이 많아보였다.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갔느냐 보단 누구와 갔던것인가를 되새겨보는 2부의 글이 더 좋았었다.



귀에걸


국내도 아직 못 가본 곳이 너무 많은 방구석여행자로서 김진애가 말해주었던 어떻게 누구와 어디를 갈 것인지를 고민하며 좀 더 재미난 올 해를 만들어 볼 이유가 확실해 진 느낌이다.





📃 출판사 창비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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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우연 - 제13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63
김수빈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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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의 시선에서부터 시작된다.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여기며 이름보단 1학년 9반 25번이라 자신을 설명한다.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색이바란 사진처럼 희미한 얼굴이지 않냐며 말하는 여고생은 스스로에게 낯가림을 한다.

수현의 절친이며 중학교때부터 단짝. 눈빛만 봐도 아는 사이. 성향이 정 반대라 더 끌리는 지아. 어쩜 그 또래들처럼 엄마보다 아빠보다 내 속을 더 잘 들여다보는 나란놈의 해답지를 쥐고있는 듯한 똑부러지는 친구.

이른바 아이돌같은 존재이며, '모두의 한정우'라고 불리우는 수현의 짝사랑이자 친절하고 상냥해서 호감이 가는 정우.모두에게 친절하니 나만을 위한 배려라고는 안 느껴지게 만들다보니 진짜 속 마음이 궁금해지는 마음의 겹이 많은 반장.

예쁜 얼굴, 전교 1등. 초승달 같은 고요. 소문도 많고 주변에선 관심이 많지만 그 모든 관심들을 무시하는 단단한 벽을 두고 살아 더욱 마음이 쓰이지만 돌아오는 차가운 반응에 모두가 꺼리게되는 1학년 9반 속 단독 행성같은 아이.

수현이 전날 꿈에서 내도록 울었던 그 날. 꿈에서 돌아보던 얼굴. 그래 그 아이. 정후의 뒷자리 우연으로 기억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우연이 겹치는 걸 알게되며 그 친구로 인해 수현이 울었던 그 이유를 알게된다.

그리고 the_eagle_has_landed. 모두의 닫힌 마음에 들어와 무사히 안착하며 아무도 모를 이야기들을 들어주는 진짜 universe까지.

한 반에 이렇게 겹치지 않는 캐릭터들이 모일 수 있을까 싶지만 그게 가능했던 시절이다. 반아이들이 많았던 나의 2000년대 학창시절도 그랬고, 그보다 더 적어진 2020년의 지금도 담임들이 어떻게 조합을 했길래 이럴 수 있을까 싶도록 다양한 아이들이 한 반이 되어 지냈던 시절의 이야기. 그렇다보니 서로를 비교하고 질투하기도하고 동경하기도 하며 내가 네가 될 수는 없지만 나는 네가 모르는 그 너머의 모습도 보고 이야기 해 줄수 있음을 느낀다. 수현도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위축되어있던 마음속 또 다른 수현을 만나게 되는 우연을 접하게 된다.



📖 마이클 콜린스의 달_ "네가 엄마 나이쯤 되면 알게 될 거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약간 심심할 정도로 평범한 인생이라는 거."

엄마의 큰 눈도, 아빠의 짙은 쌍꺼풀도 닮지않은 수현. 한반에 두어명은 있을듯한 흔한 이름도 갖고있으니 특별한 존재로서의 삶을 동경하지만 엄마는 타박하지않고 부드럽게 말해준다. 심심할정도로 평범한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와, 나이듦에 따라 그 삶이 얼마나 간절해지는 지를 말이다.

어릴적엔 남보다 튀었으면 싶고, 옆자리의 쟤보다 멋진 재능을 갖고 있어 세상이 자신의 위주로 돌아가는 주인공인 하이틴드라마가 되길 바라게된다. 20년 후에 다시 이야길 하자는 엄마의 한마디를 듣고있으니 엄마도 수현의 나이에 똑같은 상상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꼭 주인공이어야만 하는 삶을 원했으나 살아보니, 겪어보니 주연만큼이나 조연도 삶이 바쁘고 쉼 없이 돌아감을 느끼셨다고 보여졌다.




📖 검은 고양이 아폴로_ 슈퍼맨이 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렇게까지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드넓은 백사장에는 예쁜 조개껍데기도 있고 바다에서 떠밀려 온 미역 줄기도 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모래알이 있다. 나는 그저 조금이라도 반짝이는 모래알이 되고 싶은 것뿐이다.

글쎄, 수현은 남들보다 특별한 존재이곤 싶으나 천성이 튀는것을 두려워하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니 마음은 슈퍼맨이지만 스스로 억누르고 있는듯 했고, 그러니 드넓은 백사장을 채우고 있는 모래알 중에서도 좀 더 반짝이고 싶어했다. 흔한건 싫지만 그렇다고 뚜렷하고 월등한건 두려운 것. 그럼에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픈 마음이 가득한 아이.

반장 선거라던가 장기자랑, 수련회 무대에서 누가 추천을 해서 단상위로 올라가면 정말 잘 하지만 거기까지 스스로 올라갈 용기가 조금 부족한 아이. 수현의 머뭇거림이 공감이 되었다. 나의 학창시절과 참 많이 닮아있어 더 반짝이는 모래알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은 더 환히 닦아주고싶게 만들었다.


📖 우주 미아_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사람이 사는 데 이유가 꼭 필요해? 사람이니까 살아가는 거지. 사람만이 아니야.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살아갈 권리가 있고,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는 거라고."

심도있게 파고드는 것도 중요한 습관이겠지만 때로는 이렇게 지아처럼 직관적으로 순간을 마주하는 것. 때로는 살짝 힘을 빼고 힘조절을 하는 것.

장거리 레이스마냥 살아온 순간보다 곱절의 삶을 기대하는 이 친구들을 위한 조언 같다. 지아 몸 속에는 세월을 다 겪은 중년이 들어 앉은거 같아 놀라울때가 많다. 인생 2회차인가 싶은 지아의 말에 나 마저도 그냥 살아야하니깐 사는거지~ 라며 오늘을 살짝 느슨하게 살아볼께 싶게 만든다.

지아 고녀석 버블티 한잔 사주고 인생에 대해 논하고 싶게 만든단 말이지.


📖 인력의 방향_ 나는 어렸을 때부터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하고, 내키지 않는 일을 할 때도 많았다. 특별한 사람은 될 수 없으니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라도 듣고 싶은 얕은꾀가 아닐까, 항상 내 마음을 의심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하고 싶지 않았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했던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그렇지만 모든 순간이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니다.

나의 시절과 너무 많이 닮아있는 수현이다. 수현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했고, 수현과 같은 나이에 나는 '선한 어른'이 되고싶다며 싸이월드 프로필에 적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에서야 생각하면 이불킥하기 딱 좋은 겉멋이 든 프로필이겠지만, 그때의 나는 매우 진지하게 적었던 기억이 있다.

딱히 무언가가 되겠다는 목표도 없었다. 공부도 그냥저냥이고 욕심도 뚜렷하게 없고, 잘하거나 특출난 것도 없었다. 그렇다보니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모두가 나를 미워하지만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가장 컸다. 그런생각의 끝에는 좋은 사람, 선한 어른, 착한 사람으로 답이 나오더라.

칭찬을 해줘도 당연한듯 '그래, 다~~~ 내가 잘해서 이뤄진 결과야!'라며 스스로를 칭찬하기보단 아니라며 손사래치던 나를 꺼내보면 부끄러움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주목받고 싶지만 주목받을 땐 되려 숨고싶어하는 많이 예민하고 소극적임. 내면의 활달함은 가장 친한 친구나 스스로에게만 보이며 모두가 알아주면 다시 숨는 위축된 표현력.




상대가 궁금했고, 알고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길을 잃은 듯 한 친구에게 수현만의 반짝이는 모래알들로 길을 알려주고픈 마음이었겠지. SNS로 자신의 존재를 숨겼지만 솔직히 털어놓았고, 진심을 말했으며 그 때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라는 것도 다 말해주어 한순간의 흥미로 시작된 장난이 아니었단걸 확실히 이야기해주어 이들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음을 느꼈다.

살다보니 그 시절만큼 상대가 궁금한 적이 있을까 싶어진다. 그리고 나 또한 어떤 이에게 나만큼이나 알아가고픈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고민하는게 10대시절 겪어온 감정들이었다. 이제는 시들해졌고 기력을 잃어가는 관심과 호기심이라는 감정을 이 친구들이 자극시켜주어 감사하다.


이것저것 재는 것 없이, 얽혀있는 이해관계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게되는 그런 시선 말고, 나를 진득하게 바라봐주고 악의 없고 선한마음으로 마음을 열길 기다려주는 따뜻한 눈길. 조급하게 보채지도 않고 한발짝 멀리 떨어져 기다려주는 마음덕에 다들 닫혀있던 조금씩 열어주고 있음도 느꼈다.

나를 궁금해 해주어 고맙고, 기다려주어 기쁘고, 외면하던 사소한 모습에 힘을 싣어주는 그 마음 덕에 고요한 우연이겠지만 그것들이 모여 큰 너울을 만든 힘이 센 우연으로 돌아와 준 거 같아 수현의 진득함에 감사한 순간이다.

◎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작성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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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운 배 - 제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혁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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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문학상의 스물한 번째 수상작이며 작가의 데뷔작. 그리고 낯설지 않은 단어의 책 제목과 함께 내가 몸 담고 있고, 밥벌어 먹고있는 분야의 이야기라 2023년의 첫 책은 만사 다 제쳐두고 이게 먼저겠구나 싶었다. 출간 당시 '새로운 시대의 리얼리즘 소설'이라는 평으로 회사란 무엇이며 조직의 실체와 모순에 대해 그려두었다고 했다.


1부의 이야기들. 선주에게 인도되기 전 배가 누웠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에 대한 질문보다 배가 누운 그 자체에 집중한다. 사측의 잘못은 없다. 재난재해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는 사건의 결말을 이미 적어 둔 후 풀어가려한다. 결과는 나와있으니 모든 과정은 결과에 맞춰 짜여진다. 자연이 만들어둔 결과이니 이는 사측은 보험사를 통해 보상을 받으려는 과정을 그린다. 문대리가 보게될 이 조선업의 꼴이 어떻게 될지도 눈에 그려지지만 잡지사에서 일하다 도망치듯 중국 조선소로 입사한 그 였지만 업이 달라진다 한들 조직이라는 큰 틀은 어딜가나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오너는 조선업을 앞세워 자금줄을 끌어당겨 필리핀 휴양시설에 몰아넣고 산업의 불황으로 안그래도 어려운 조선소는 제대로 찬서리를 맞는다. 어느 선주가 배가 누워있는 조선소에 일을 맡기겠냐는거지. 회사의 중대 사안에 대한 책임은 머리 굵은 자들의 사임으로 이어진다. 모든 책임을 떠앉고 사임하는게 답은 아닌데 어느 곳이든 그런 액션을 취하면 한동안은 잠잠해진다.

2부는 1부와 다른 이야기로 탄성을 주어 이야기를 끌어당긴다. 1부가 암울했고 이래도 되나 싶으며 당장이라도 진흙탕에서 빨리 발을 빼는게 상책이라고 보여지는 곳에서 빈자리의 사장석이 황사장으로 바뀌면서 빠르게 내달린다. 시스템이 바뀌고 조직이 개편되고 곪아있던걸 긁어냄으로서 진짜 제대로된 회사가 되나 싶은 방향으로 돌아선다. 그때 오너는 2년 정도 누워만 있던 그 배를 일으켜 세우라고 지시한다. 모든 시스템을 뭉개고 오직 이유없이 누워있는 배를 일으키는 것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된다. 이제 좀 돌아가나 싶은 회사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썩어버린 그 배를 일으키고 황사장은 썩은 일부인냥 또 다시 내려놓고 조선소를 떠난다.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을 정면으로 맞딱들이며 흘러갔고 맞춰갔던 문대리 역시 조선소를 떠나게된다.


📖 14_ 이 모든 참 같은 거짓, 거짓 같은 참이 모조리 참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으로 자리 잡았고 곧 진짜 보상금이 회사 계좌에 찍힐 터였다. 문서라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문서란 엉성하고 허술한 현실에서 부스스 떨어져 내린 각질에 불과했다. 하지만 누가 문서를 우습게 보는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이 문서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현실을, 회사를, 정부나 국가를, 종교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누운배 한 척이 그렇게 됐듯 사실이라는 것은, 참이나 거짓이라는 것은 힘으로 쥐고 흔들 수 있었다. 세상은 성기고 흐릿한 실체였다. 그것을 움켜쥔 힘만이 억세고 선명했다. 힘은 우스운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우스운 것도 우습지 않게 만드는 것이 힘이었다.

우리 부서장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백방 입으로 씨름해봐야 득이 될 건 없다. 우리는 서류싸움이다. 기록이 남아있느냐와 그렇지 않느냐로 판가름난다. 근거 자료가 있어야만 대응을 할 수 있다. 모든건 기록해두어야한다. 믿어줄 사람은 없다. 말보다 종이 한장의 힘이 얼마나 센지 느낄 것이다.

기록이라는 것이 모든게 진실 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자료가된다. 내 의견에 뒷받침 할 만한 요소가 되는 그것이 문서였다. 사건이 일어 날 때엔 언제 어떻게 벌어질지 예고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성글어버린 틈을 메꾸는 것이 문서이고 흔적이었다.

📖 16_ 이길 사람은 바위와 돌멩이처럼 이미 정해져 있었다. 늘 말들 하듯, 직급이 깡패였다.

꼬우면 니가 사장 하던가를 책 속에서 들으니 속이 다 시원한 만큼 속이 다 허해진다. 현실이나 책속이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말이 서글퍼진다. 그렇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겪과 별반 다를게 없는 굴레다.

📖 20_ 이전에도, 또 다른 회사에서도 똑같이 해왔다는 말 같잖은 소리는 집어치우십시오. 모른다, 확인하겠다, 말만 하지 말고 미리 준비해서 들어들 오세요. 이 회의는 주간 공정 회의입니다. 회의 이름에 걸맞게 지난주 생산 실적을 확인, 정리하고 다가올 한 주의 생산을 제고할 방안을 미리 세운다는 관점에서 준비들 해오세요. 이 회의에 참석한 여러분은 모두 관리자고 책임잡니다.

관리자와 책임자이지만 부서 대표로 들어가는 회의에서는 서로가 적이다. 싸움닭이 될 뿐이었다. 내 탓이 아니라고 명시를 해야만 잘못을 덜 수 있기에 확정짓는 듯한 뉘앙스의 말은 꺼내지도 않는다. 확인해보겠다는 말이 태반이다. 알지만 모르는 사안이다. 알고있지만 이 판에서는 뱉지 않는 팩트들은 다 뒷전에 숨겨두고있다. 그래야만 제 모가지를 건사할 수 있고 언제 반격해 올지 모르는 이들을 역습할 이른바 원기옥을 키우는 거지.

부서장이나 임원진 회의는 늘 그랬다. 확인해보겠다는 말을 금지시키면 눈알 굴리는 소리밖에 안 날테지.

📖 36_ 결국 쉬어가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쉬고 다시 이 그칠 줄 모르는 바담 풍이 불어닥치는 난리동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 쉬어가든 쉬지 않든, 결국 인생을 담배 연기처럼 바람 속에 태워 날려버리는 것은 다르지 않아 보였다. 나는 다른 길을 찾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황 사장 같은 사람조차, 또 이전 팀장도 그렇게 되고 말았다. 나는 이미 3년이나 일했고 결혼, 출산, 승진, 어쩌면 이직까지 수많은 일이 밀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

...

배운다는 걸 똑같이 따라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따라 하는 건 배우는 방법이다. 따라 하려고 배우는 게 아니라 더 잘하려고, 가르치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배우는 거다. 여러분 모두 아직 젊고 많은 일을 배워나갈 때니 이 말을 기억해줬으면 싶습니다. 우리가, 또 어떤 사람도 여러분보다 더 나은 인간이기 때문에 여러분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먼저 태어났고 먼저 배웠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어떤 것을 가르칠 뿐입니다. 그것이 선생, 먼저 난 사람이라는 말뜻입니다. 배우고 익히되 우리처럼 되지는 마십시오. 부디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퇴근 직전의 최부장의 고별인사였다. 많은 도움을 받았고 덕분에 가르치는 사람으로써, 또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깨닫고 배웠다는 말. 아직 나는 이러한 말을 하는 사수나 부서장을 만나진 못한 듯 하다. 내가 몸담고 있는 업에서는 감사하다고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이는 없었다. 사라질때엔 다들 바람처럼 자신의 모든 흔적을 쓸어담아 치부까지 싸악 들어내서 갖고 가버리더라. 더러는 도망가듯 사라지기도 했다. 같이 일해서 고맙고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더 나은 이유가 아니라 먼저 태어났기에 했던 순리의 과정이라고 말해주는 사람. 이런 사람이라면 분명 일하면서도 배울 것들이 손에 쥐어질텐데 역시 소설속에나 있는 인물일까. 아르바이트를 제외하고 연관성이 없는 업종을 건너뛰기 하듯 이직해왔다. 문대리보다 더 의외의 이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웨딩업, 철강업, 지금의 조선업까지. 역시 사람의 인생이 대학 전공에 따라 가진 않지. 그렇게만 이어진다면 너무 순탄했겠지.

문대리가 먼저 말한 쉬어가는 것밖에 안되는 타이밍이라 했던 말과 고민의 답을 최부장이 툭 내어두고 갔다. 이 길이 옳지도 끝이지도 않았다. 이 길로도 갈 수 있다는 경우의 수 일부를 제시해준 듯 했다. 각자의 이정표가 있으니 에둘러가든 뛰어가든 그건 각자의 방식이고 이곳이 꼭 답은 아니란뜻 처럼 보였다. 요즘 광고로 많이 보이는 잡코리아의 카피가 떠올라 피식 웃었다. 선배와 옥상에서 나누는 이야기였지 아마. 꿈은 꾸는 자의 것이 아니야. 버티는 자의 몫이지. 버텨, 버틸 수 있다. 버 튀어.....(튀어) 그리고 그 선배는 튀었다. 퇴사하며 인사하고 다른 곳으로 이직했지 아마. 약간 다른 길로 새어버린 이야기이지만 문대리에게 숨구멍을 툭 밀어준 최부장의 마지막 멘트가 좋았다.

📖 37_ 월급이란 젊음을 동대문 시장의 포목처럼 끊어다 팔아 얻는 것이다. 월급을 받을수록 나는 젊음을 잃는다. 늙어간다. 가능성과 원기를 잃는 것이다. 존재가 가난해진다. 젊음이 인생의 금화라던 황사장의 말 역시 수사가 아니다. 이대로 10년, 20년 또 어느 회사에서 삶을 보내든 그 회사가 모두 이렇다면 내 인생의 금화는 결국 몇 푼 월급으로, 지폐로 바뀌어 녹아버릴 테고 나는 그저 노인이 돼 있을 터였다.그다음은 끔찍하다. 명예퇴직, 권고퇴직, 그런 말 아닌 말로 수십 년 회사 일에만 길들고 늙은 사람인 채 양계장에서 풀어준 노계처럼 세상에 나올 것이다.

그렇다. 회사다 갖다 쓰는 내 젊음은 다음달 한장의 급여 명세서와 바꾸게된다. 20대에 들어와 나는 어느새 30대 후반으로 접어들었다. 젊음을 주고 꼬박꼬박 그만큼의 급여를 받아갔다. 퀭한 눈과 굽어진 어깨, 고장난 손목이 그간의 세월의 찌꺼기로 남아있는 듯 하다. 10년치의 젊음과 쾌활함은 결혼하고 집을사고 차를 사게 해주었다. 또 10년치의 내 노고를 이 회사는 기꺼이 받아줄 것인가는 모를 일이다. 지난 10년만큼의 값어치가 유지될지는 내 손이 아니라 오너의 연봉계약서 마지막 싸인에 달려있겠지. 연봉 협상이 아니라 연봉 통보가 될 터였다. 정치싸움에 기꺼이 참전할 용사는 되지 못할 문지기 수준의 병사인데 이젠 내 능력을 믿어야할지 어느 줄에 모가지를 받쳐야할지는 아직도 고민중이다. 회사란 그런 곳이니까. 여기도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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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2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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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올해 처음 완독했던 이혁진 작가의 '누운 배'를 다 읽고 곧장 이어서 읽기 시작한 것 역시 이혁진 작가의 작품이었다.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에 있는 '관리자들'을 선택하여 이어 읽었다. 특정 작가의 작품을 연달아 읽은 적은 없는듯 한데 확실히 세밀한 묘사로 인해 글을 읽는 게 아니라 영상을 보고 있는 느낌이 강해서 이해하기도 쉽고 그만큼 집중도 잘 되었다. 과연 이 책도 그러할지 기대를 해본다.


📖 2_ 관계가 대등하지 않으면 거래도 공정할 수 없다. 우위에 선 쪽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반장도 알고 본인 역시 인부들에게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바라는 것이 있었고, 소장이 그 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반장은 뭐가 계속 찜찜하면서도 어쨌든 이야기는 됐자고, 한 다리 걸쳐 놓은 셈이라고 생각했다. 텔레비전에서 강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도움을 주는 것뿐 아니라 받는 것도 관계를 업그레이드하는 방식이라고.

소장은 이걸 사람 부리는 방식이라며 한대리에게 대단한 스킬을 전수하듯 말한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이 돌부리에 맞아 돌아가고 고여있던 웅덩이에 같이 휩쓸려 흐려지고 처음의 맑고 청량했던 빛이 혼탁해진다 하지만 처음부터 흘러내려오는 물이 똥물이라면 결과는 더한 오물로 변하는걸 멧돼지 사건으로 깨우치게 되었다. 첵의 초반이지만 바로 알겠더라. 아.... 이 집단의 우두머리들에겐 배울게 없겠구나. 날때부터 영감을 받고 스스로 터득한 잔재주는 아닐테고 소장도 막내시절 자신을 가르치던 선임을 통해 짓밟히듯 깨지고 배워먹은 버릇일텐데 왜 이런건 가르쳐주지 않아도 잘만 받아먹고 더욱더 고약해지나 모르겠다.

📖 3_ 책임은 지는 게 아니야. 지우는 거지. 세상에 책임질 수 있는 일은 없거든.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멍청한 것들이나 어설프게 책임을 지네 마네, 그런 소릴 하는 거야. 그러면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자기 짐까지 떠넘기고 책임지라고 대가리부터 치켜들기나 하거든. 텔레비전에서 정치인들이 하는 게 다 그거야.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지우는 거, 자기 책임이라는 걸 아예 안 만드는 거, 걔들도 관리자거든. 뭘 좀 아는.

소장이 이렇게 말하고 흡족해 할 모습. 자신이 즉흥적으로 내뱉은 말이지만 본인이 생각해도 그럴싸하게 느껴졌는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웃었을 장면을 생각하니 뭔 사단을 내더라도 낼 인물이구나 싶어졌다. 책임은 지는게 아니라 지우는 거라는 말. 어차피 방패막이는 따로있다는 소리.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두었다는 꿍꿍이. 왠지 이 말을 듣고나니 산업재해로 인해 관리자들과 대표들이 책임지고 사퇴하겠다는 기사와 뉴스 꼭지를 볼 때 이들도 책임을 지는게 아니라 책임 지어지도록 마련된 허수아비가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었다. 그렇다. 처음 씌워진 잘못된 생각으로 모든 것들이 옳게 보이지 않았다.


📖 6_ 어쩌면 저렇게들 뻔하고 뭘 모를까. 역시나 관리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갈라 세우고 갈라 세우고 오로지 어떻게든 갈라 세우는 일이었다. 줄을 세우고 편을 갈라서 저희끼리 알아서 치고받도록, 그러느라 뭐가 중요하고 누가 이득을 보는지 생각도 못 하도록. 인간이란 고작 그런 것이다. 서로 믿지 못하고 지기 싫어한다. 그 속성마저 남들만 그렇고 자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그래서 싸우고, 그래서 싸우기때문에 싸울수록 더 편향되고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그 불신을 극복하지도, 서로 이기거나 져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진흙탕 밑바닥까지 서로 끌고 들어가기만 한다.

몰라서 모른채 하는 것이 아니다. 알지만 직급이 깡패고 갑을관계가 밥줄과 이어지다보니 소장이 장단 지어주는 대로 인부들은 춤출 수 밖에 없었다. 명절에 호주머니 두둑히 채워 나가려면 일을 해야헸고, 소장의 다그치는 완공일까지 어떻게든 해 내야 했다. 그래야만 그들의 손에 돈이 쥐어지니 시키면 시키는대로, 이른바 까라면 깔 수 밖에 없는 실정인데 소장은 그게 바보같아보이고 미련해보이며 자신이 이 무리를 쥐고 흔드는 우두머리라는 확신이 들어 어떻게하면 제 맘대로 더 갖고 놀지 궁리만 하게 되는 행색이다.

📖 8_ 결국 자기 역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살아 있고 계속 살아야 하는 사람의 숙명인 것 같았다. 잔인하고 비겁하게 거짓말하거나 침묵하면서, 자신의 잘못과 죄를 죽은 사람에게 떠넘기면서, 그것이 산 사람의 몫, 생존의 대가 같았다.

계속 물음을 던진다. 독자에게 묻는 문장은 없지만 자연스레 그 문장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니가 현경이었다면? 한대리였다면 어쩔껀데? 라는 질문을 하면서 답을 찾는다. 결국 나도 산 사람일테고, 선일은 그대로 죽은 자로 남아있는데 책임을 물으며 진실을 알린다 한들 이 목소리가 과연 어딘가에 닿기나 할지. 최악의 경우인 소장에게만 닿아 이 판을 떠나는걸로만 시시하게 마침표를 찍을지로 수없이 가정을 해본다.

똑같아지는게 당연한 비율이지 않을까 싶다가도, 그래도 나는 좀 다른 사람으로 살아도 되지 않나 싶은 정의감과 함께 덜 더러운 인간으로 살아보고픈 시도를 하는게 맞을까? 당장 닥쳐온 현실이 빤한데 그게 가능할까? 물을 사람도 없는데 계속 질문을 던진다.

소설은 앞서 읽었던 '누운 배' 처럼 회사라는 집단을 통해 시작된다. 이 집단 역시 계급이 나뉜 이해관계들이며 주인공은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지. 그럴 수 밖에 없는 처지와 함께 소설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빤한 현실의 이야기를 들여다 놓은 듯 해서 씁쓸하고 미안함이 드는 사건 수사 종결을 보인다. 현실로 옮겨온다면 아마도 평일 저녁 어느 지역 뉴스의 3분이 채 되지 않는 작업현장 사건사고 보도로 짤막하게 전달 될 것이고 기승전결의 마지막 결말의 리포터 보도는 관리자의 허술함과 현장직에 대한 아쉬운 부분을 내비치며 좀 더 세심한 관리가 필요해보인다는 말로 마무리가 될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 사건사고들은 빈번히 일어나고 이렇게 보도하고 알린다 한들 이후에도 약간의 전후상황만 다를뿐 별반 다를바 없는 이유로 어떤이는 희생을 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현장에서 빤한 결말이 보이는데도 흐린눈으로 못 본 척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않냐는 식으로 이미 벌어진 일이니 남은 이는 살아가야하지 않겠냐며 남겨진 이들끼리 수근대겠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러한 방식으로 흘러갈게 훤히 보이는 세상이고, 예나 지금이나 변하는게 없이 굴러가는 집단이다.그들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굳이 왜 그래야하는가에 대한 생각으로 울컥울컥 하지만서도 내가 한대리였다면 소장의 지시를 거역하고 손 털고 나올 배포가 있었을지, 아닌 것은 아니라며 말할 당참이 있었을지(옳고 그른걸 구분해 어필하는 것도 손아래사람에겐 당차고 용감함을 양 주먹에 쥐어야 한다. 그게 계급이고 직급빨이다.) 생각하보지만 딱히 답이 안 나온다. '누운 배'의 한 문장처럼 직급이 깡패니까.

여기 이 집단엔 빤한 사람들이 태반이라 현경의 후반 행보가 놀랍고 때론 통쾌하기도 했다. 이 바닥이 한다리건너 알음알음 소개받는 일일텐데 그걸 다 걷어차고 소장이 하는 꼴을 깨 부쉬듯 굴착기를 굴리는 현장감은 영상으로 보지 않아도 현경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눈에 힘이 쥐어지며 턱아래가 지끈거리며 어금니가 아리어진다.

이해관계를 사전적의미로 찾아보면 그에 파생된 갈등이라는 단어도 덤으로 읽게된다. 어쩔 수 없는 갈등이 일어나는 무리라는 뜻도 있겠지. 그럼에도 우리는 얽혀 살아야하는 상황인데 때때로 이 짓이 질리도록 정이 떨어진다. 이러한 이벤트 덕분인데 옳은데로 정석대로, 이른바 FM대로 사는게 그렇게도 바보같은 짓이고 꽉 막힌 사람처럼 보이고 막대해도 될 부류로 치부된다면 이 세상은 참 재미없고 졸렬하게 다가올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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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이해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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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소설 전문가(?)다운 특정 직군에 대한 생각들과 사회생활을 하며 얻게되는 많은 감정들을 담아내었다. 어느 집단이든 계급은 존재한다는 기본 개념은 여전하다. 지금은 같은 사무실에 앉아있지만 퇴근 후 이곳을 빠져나가면 각각 다른 삶으로 스며들게된다. 특히 4명의 인물들은 시작점도 달랐고 도착지도 다를 것이다. 다만 지금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이유는 우연찮게 교차되는 순간에 만났기에 가능한 것이라 말해주고싶다.

연봉, 집안, 아파트, 자동차.... 작가의 말 대로 누군가에겐 스펙이고 누군가에겐 자격지심의 원천일 자본의 표상에 붙들린 채 교환되지 못하는 진심과 욕망. 섞이지 못할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자신과는 너무 다르기에 끌렸을지도 모르고, 자신과 너무 다르기에 부담스럽지만 때론 갖고싶다는 욕심이 울컥하고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제목 '사랑의 이해'는 사랑하지만 상대의 사정을 헤아려 받아들이는 과정의 순간도 찾아오고, 때로는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게 된다는 가정을 하며 이익과 손해를 아우르며 저울질하는 순간도 찾아온다. 그러다 결국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이해의 순간도 찾아오는게 사랑이고 이해였다.


말장난 같지만 다 사랑하기에 가능한 고민이며 결정이고, 결론이었다. 인물들의 직업을 빌어보면 적당히 나이대가 나온다. 상수와 미경은 내 또래일테고, 종현과 수영은 나보다 두어살 아래의 이제 사회생활에 익숙해질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그 정도겠다. 사랑만 쫒을 수 없는 나이. 사랑이라는 환상이 흐릿해지고 현실이 더욱 또렷해지기에 청춘로맨스 영화처럼 사랑하나만 바라보며 직진 할 수 없는 나이. 그래서 때론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지만서도 어찌보면 저런게 현실이지 싶어지는 그들의 애정 종착지. 그래서 또 한번 감탄한다. 직장 내에서 얻어지는 이슈와 에피소드들로 이뤄졌던 '누운 배'와 '관리자들'을 통해 얻어진 단단한 스토리에 로맨스를 딱 두 방울 정도 떨어뜨린 소설. 어디서든 볼 수 있을 듯하며 알려지진 않았지만 다들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흔하지않은 인물들로 만들어 내었다. 다만 드라마는 정말 예쁘고 멋진 배우가 연기했다는게 현실과 많이 동떨어지는 것일 뿐. 암튼 어른들의 사랑은 이렇게 잴게 많고 비교할게 점점 더 많아지는 느낌이다.


📖 갖기 전까지 아무리 따지고 비교하고 뜯어봐야 유리창 너머 보이는 가방, 옷걸이에 걸린 코트였다. 좋아 보일 뿐인지, 정말 좋은지, 그저 그런지 열두 번 환생해도 모른 채 콧물 같은 미련, 재생 휴지 같은 후회만 남는 것이다. 아무리 풀고 닦아 봤자 코밑만 벗겨지고 쓰라려, 다 집어 던지고 이불이나 뒤집어쓰고 싶어지는... ...

좋아하는 감정은 있지만 마냥 드러내서는 안되는 위치. 내가 너무 잘나서가 아니라 상대와 비교 했을 때 내가 너무 모자란 사람이라는 생각을 먼저 하는 수영. 반듯해보이고 누구에게나 호감있는 사람을 내가 좋아할 때에 상대가 포기하거나 실망할 것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 덜 가지진 자들은 항상 이렇다. 내 손해를 먼저 떠올리기보단 상대가 얻게되는 손실비용을 먼저 따진다. 수영이 유별나게 여겨질수도 있겠지만 직군전환이 절실한 불안정한 위치도 한 몫 할테고, 돈으로 등급을 메기고 돈으로 상대를 바라보게되는 은행에서 일하다보니 보여지는 시야폭이 거기에 맞춰진 것이라 느꼈다.

눈인사 한번으로 모든걸 스캔 하며 상대의 재력기반과 기품까지 빠삭하게 알아채는 직업병이 수영의 감정을 더 가두는 것 처럼 보였다.

📖 좋아할수록 많은 것이 보이지만 그만큼 못 본 척해야 할 것도 많아진다. 기쁨과 슬픔은 함께 늘어난다.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는 걸 무시하고싶지만 너무 잘 드러나니 어찌 할 수 없는 마음. 그런데 이걸 티내선 안되는 상황. 상수와 수영은 서로를 택하는 것 대신 다른 이를 선택했기에 끊어내어야 하는 마음이었다. 차라리 미련 두지 말 걸, 애초에 앞뒤 재지 말고 마음만을 믿고 먼저 사랑해 볼 걸 이라는 후회가 와르르 밀려오는게 보였다.

결국 이것 도 다 욕심이었다.

📖 사랑했지만 사랑을 믿지는 않았다. 사랑을 원했지만 사랑만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종현이나 상수에게서 구하려고 했을 뿐 자신에게서 구하려고도, 차라리 깨끗이 체념해 버리지도 않았다. 누구라도 자신과 같은 처지였다면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종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상수, 그리고 그 자신이란 명백히 안수영, 자기 자신이었다. 부서지는 모든 관계가 그렇듯, 자신이 망친 것이었다. 모든 것을 자신이 망쳤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망칠 수 있는 것은 모두, 스스로 망쳐 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사치와 자유로, 유혹하고 유혹당할 수 있는 그 힘과 권리로.

욕심이었고 고집이었다. 사랑하지만 사랑을 믿지 않은 자의 결말이었다. 무엇하나 손해보기 싫은 이의 결론일 수도 있겠고, 어느하날 선택하더라도 행복하지 않을거라 결론을 낸 이의 마침표 일 수도 있겠다. 나로 인해 상수, 종현, 미경에게까지 쥐어질 행복하지 않을 삶에 수영 자신이 일조했다는 몫을 남기기 싫어 모두의 손을 놓아버린 걸 지도 모르겠다. 아님, 내가 완벽한 행복을 얻지 못 할 바엔 모두의 행복 또한 있어서는 안된다는 수영의 내재된 이기심이라 봐야할까?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 사랑갖곤 평생 사랑할 자신이 없다는 말이겠지.

결국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앞세우지만 사랑만 놓아 둘 수 없는 현실에 주저하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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