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혼란

우리는 무수히 많은 순간들을 경험하지만, 우리의 완전한 세계가 고양되는 순간, (스탕달 Stendhal이 기술한 바와 같이) 모든 진액을 빨아들인 꽃들이 순식간에 한데 모여 결정(結晶)을이루는 바로 그 순간은, 언제나 단 한순간, 오직 한 번 뿐입니다. 그것은 생명이 탄생하는 시간처럼 마술적이며, 체험된 비밀로 삶의 따뜻한 내면에 꼭꼭 숨어있기에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어떤 정신의 대수학도 그 한순간을 계산할 수 없고, 어떤 예감의 연금술을 가지고도 추측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독자적인 감정을 통해서도 그 순간을 붙잡기란매우 어려운 것이겠지요.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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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사정

기중구는 허공에 팔을 크게 한번 휘두르더니오륙 미터쯤 떨어진 다리의 콘크리트 지지대를 겨냥해서 양파를 던졌다. 뜻밖의 퍽 하는 둔탁한 소리에 그는 깜짝 놀랐다. 기중구가 그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렇게 양파한 알에 기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인가.
어떤 생각이 어긋난 뼈처럼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고할 때가 있으니까요.
그날 툇마루에 앉아서 기중구는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붕대로 감긴 자신의 열 손가락을 내려다보면서.
가끔 그 딱딱해지려는 생각을 멀리 던져버려야 합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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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해야 할 일은 숲의 그림자처럼 무성하게 자라나서, 외부세상의 풍경을 서서히 그림자로 덮어버렸습니다. 나는 그 집의 어두움 속에서 내면에만 파묻혀 살았습니다. 천천히 퍼지는 그의 저작의 살랑거림과, 점점 더 채워지며 가득차는 나뭇가지속에서, 그리고 사방에 온기를 전하는 따뜻한 그 분이 함께하는 삶 속에서...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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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사람들 2 열린책들 세계문학 130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윤우섭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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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치유의 굴레에서

처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었을 때처럼 작품에 완전히 빨려들어가는 느낌으로 읽었다. 이야기를 이끄는 작가의 탁월한 문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딘가 묘하게 아침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자극성 때문이기도 했다.

먼저 주인공인 바냐의 인간성을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냐는 선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또한 약자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없는 관용으로 그를 품어줄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고 그녀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었지만, 그와 그녀가 떨어져 있는 동안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돼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 여자를 비난할 수는 없다. 사람 마음이란 것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겠는가. 어저께는 그 사람이 좋았다가도 내일은 그 사람이 싫어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특히 사랑은 이성으로 제어하기가 힘들다. 내 안의 피어나는 불꽃을 직접 물을 뿌려가며 끄고 휘날리는 재를 바라보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나따샤가 사랑하게 된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지독히 모욕하고 재산을 다 빼앗기 위해 불명예스러운 소송을 건 남자의 아들이라는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나따샤는 자기 마음에서 피어나는 불꽃을 가만히 바라보는 여자가 아니라 그 불꽃으로 자신의 몸을 태울 수 있는 여자다. 한 마디로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던질 수 있는 여자라는 뜻이다. 자신의 아버지의 체면이든 자신을 향할 아버지의 저주든 그런 것들은 그녀의 정열을 막을 수 없었다.

다만 내가 나따샤와 알료사의 사랑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사랑을 견고히하기 위해 너무 이용한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도대체 바냐가 어떻게 그렇게 나따샤와 알료사의 사랑놀음에 인내심을 갖고 대할 수 있었는지 경이로울 정도다. 나중에는 알료샤의 이상만을 좇는 헛소리에 짜증이 날 정도였는데, 사랑하는 여인의 행복을 위해 그걸 다 들어주고 같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그렇게 노력하다니. 그야말로 살신성인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

나따샤와 알료샤의 사랑을 읽으면서 사랑하는 사람 간의 본질이 서로 닮은 것인지에 관해 생각해보게 됐다. 나따샤는 앞에서 말했듯 사랑에 자신을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인데 이 점은 알료사와 같다. 그렇지만 나따샤는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인지하고 전후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인 것에 반해 알료사는 어린아이같이 자신의 흥미를 잡아끄는 모든 것을 자신만의 감정으로 해석하여 상황을 분별있게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결이 다르다.

나따샤와 바냐는 그러한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두 사람 모두 타인을 도와주고 싶어하고 내면에 풍부한 사랑이 있어 그것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다. 나따샤가 알료사를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품었을거라고 생각하는 점은 이미 이야기의 곳곳에서 나오기도 했지만 나따샤의 그러한 성품에 기인하여 유추해볼 수 있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따샤는 안타깝기도 하다. 서로 교감을 나누는 충분히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었음에도 알료사를 사랑함으로써 그를 품어줘야 하는 사랑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결국 알료사가 책임감이라는 압박을 느끼게 만들어 그녀를 떠나게 했던 주요 원인이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공작 다음으로 알료샤를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그가 까쨔를 사랑하게 되면서부터는 거의 그를 혐오하는 수준으로 그를 바라보게 됐다. 두 여자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모든 결정을 두 여자에게 맡기는 듯한 행동뿐만 아니라 본질 없는 이상을 추구하며 현실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그 유약함까지 너무 싫었다.

까쨔를 사랑하고 나따샤를 향한 마음이 식었음에도 나따샤에게 결혼하자고 하는 부분에서는 너무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나왔다. 그가 아무리 나따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미안해서 그러한 약속을 한 것이라도 그런 진심같지도 않은 약속은 오히려 자신을 아직도 불타게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에 더 깊은 생채기를 남기는 것이라는걸 진정 알지 못한단 말인가? 더 황당한 것은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그 순간엔 진심이라는 것이다.

나따샤를 향한 이성적인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녀를 진심어린 우정으로 사랑한다면 더더욱 그런 약속을 하면 안되는 것이다. 그는 이미 까쨔에게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따샤를 버릴 수 밖에 없다는 죄책감을 똑바로 대면하기 힘들어서 그 마음을 결혼이라는 의미없는 약속으로 잠깐 위장했을 뿐이다. 더더군다나 그것을 진심으로 말할정도로 비겁하고 자신의 진짜 마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멍청이이다.

작품에서는 그의 이러한 행동이 진심이라는 이유로, 순수한 마음을 가진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묘사되지만, 그건 그를 두 여자가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좋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제3자인 내가 볼 때는 멍청이 한 명이 그보다 성숙한 두 여인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다 결국 자신을 품어줄 수 있는 좀 더 편한 사람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공작은 단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데, 소시오패스다. 타인을 이용하고 버리는데에 일말의 죄책감이 없고 오히려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순수하게 좋아하는 정말 혐오스러운 사람이다. 공작의 그런 순수한 악의가 드러나는 부분은 2권에서 바냐와 이야기를 할 때인데, 그의 그러한 모습에 거의 감탄까지 했었다. 세상에 이렇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는걸 좋아하다니!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도덕 자체는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사회규범의 의미라기보다,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어느정도 제어하기 위해 서로 약속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보지 않아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는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도록 하는 사람인데, 이 점은 알료샤와 비슷하다. 정말 재밌게도 두 사람은 피로 이어졌음에도 순수한 악의와 순수한 선의의 양극단에서 서로의 죄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다. 공작은 자신의 이익에 충실하여 다른 사람을 짓밟는 사람이고 알료샤는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며 진심으로 그 사람을 위하지만 결국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하면서 의도치않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절묘한 설정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나온다. 알료샤와 나따샤처럼 어미새처럼 품어주는 사랑, 알료샤와 까쨔처럼 비슷하여 끌리는 사랑, 나따샤와 바냐처럼 서로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사랑,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 등등.

나는 그 중에서도 가장 고차원적인 사랑이 바냐와 넬리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에 등급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넬리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성품과 다정함을 갖고 있는 아이였지만, 어린 나이에 인간같지도 않은 짐승들에게 많은 상처를 입어 부서질대로 부서진 상태였다. 아마 바냐가 넬리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넬리는 몸과 마음의 상처에 잠식당해 비참하게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인간으로 인해 너덜해진 영혼의 고통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그녀를 거둬준 바냐는 정말 선한 인간이다.

그런 그의 끊임없는 노력과 사랑,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넬리는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많은 변덕과 의심은 상처를 치유해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그런 것에 지칠 수 있지만, 사람한테 받은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하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더욱 힘든 일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위해서 더욱 사랑으로 감싸안아야 한다.

종국에 바냐와 나따샤, 넬리, 나따샤의 가족들은 모두 화합하여 다시 평안한 상태로 돌아간다. 멀고 먼 상처의 길을 지나 다시 서로를 사랑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서로를 치유했다. 새삼 사랑이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의 본질이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리고 이 작품까지 모두 사랑을 통한 구원이라는 서사를 그리고 있다. 그것을 매 작품마다 다양하게 그려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통찰력은 정말 위대하다.

그런데 그의 위대함은 작품을 끝맺는 방식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마지막이 그랬다. 나따샤의 마지막 말, 이것은 한 바탕의 꿈이었다는 말과 그녀의 눈빛에서 바냐가 읽은 의미, 당신과 행복할 수 있었을텐데는 순간적으로 자신을 감싸는 감정의 허무함을 겪고 결국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뒤늦게야 깨닫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끝나서 더 기억에 남았다. 불타는 감정도, 고통도 모두 언젠가는 소멸되는 것처럼 너무 한 순간에 자신을 매몰시키지 말자. 어떤 것이든 온전히 받아들이되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만큼 중심을 지키며 살아가고 사랑하는 것, 그것만큼 인간에게 도전적인 것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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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무의식중에 나를 뜨겁게 만들어놓고 느닷없이 얼음을 쏟아붓는 사람, 자신의 격정으로 스스로를 자극하더니 갑자기 반어적인 언어의 채찍을 움켜쥐는 사람, 이렇게 번갯불처럼 번쩍이고, 뜨거움에서 차가움으로 돌변하는 그 사람에게서 나는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실은 잔인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설수록, 그는 점점 더무정해지고 불안해하며 나를 밀어냈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그에게, 그의 비밀에 다가가서는 안 되었으며 다가갈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 비밀, 내가 점점 더 뜨겁게 의식하던 그 비밀이 마법처럼 낯설고 스산하게 깊은 곳에 웅크리고있었기 때문입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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