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열린책들 세계문학 46
존 르 카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주 추운 눈길을 홀로 걸어가는 듯한 이야기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한 첩보 소설이다. 동독의 사회주의와 영국의 민주주의가 대립하는 시대에서 각 국의 첩보조직들이 치열하게 싸운다. 이들에게 싸움에서 진다는 것은 곧 자신들이 세운 이념의 종말이자 절망일 것이다.

주인공 앨릭 리머스는 영국의 베테랑 첩보요원이다. 동독에서 베를린 지부장으로 첩보활동을 하다 동독의 첩보조직의 수장 문트에게 모든 첩보요원을 제거당하는 실패를 겪고 쓸쓸하게 영국으로 귀국한다.

그는 모든 책임을 지고 은퇴 직전의 쓸데없는 잡일을 담당하는 금융감독과로 발령나고, 그 곳에서 철저하게 망가진다. 술을 먹고 직장에 나타나고 동료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자신이 해야 하는 업무를 하지 않는 등 스스로 온갖 불명예를 만들어낸다.

처음에 이 부분만을 읽었을 때는 이야기에 쉽게 몰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떤 이야기이건 주인공의 서사에 쉽게 몰입하는 편인데 이렇게 엉망인 주인공이 첩보 활동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야기 자체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리머스가 철저하게 계획한 복수의 서막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때부터 리머스의 편에서 이야기에 깊게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실업자가 되어 직업 소개소에서 중개해준 도서관 정리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리즈 골드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내가 리머스가 복수를 다짐하며 일부러 망가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가 리즈에게 자신은 할 일이 있다고 말한 순간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든 사람에게 더 이상 할 일이 무엇이 남아있단 말인가. 자신을 그렇게 만든 문트에게 복수하는 것 외에는 리머스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리머스가 자신의 외로움을 감싸줄 리즈에게 곁을 내준 것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는 리즈가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말려들지 않게 하기 위해 그녀에게 이별을 고했지만, 오랜 첩보활동으로 베테랑이었던 그도 그렇게 냉혹한 현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거라는 상상은 하지 못했다. 애초에 복수와 사랑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관리관을 통해 문트에 대한 복수를 제의 받은 그는 그것을 허락하고, 일부러 사람들에게 자신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감옥까지 갔다 오면서 은퇴한 첩보요원의 몰락을 훌륭하게 수행해낸다. 그는 영국의첩보 관련 기밀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거액의 돈을 주겠다는 은밀한 제의를 받게 되고 그것에 호응하는 척하며 적의 소굴로 들어간다. 그의 최종 목적은 그에게 접촉하는 동독측 첩보조직을 이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문트를 파멸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작전을 실행함과 동시에 더 이상은 돌이킬 수 없다는 강한 두려움을 느끼고, 그 고독함 속에서 리즈를 떠올린다.

그에 대한 리즈의 사랑과 리즈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들이 함께하면서 매우 깊어졌다. 어느 순간 그들은 서로가 매우 외로운 존재고, 서로의 외로움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리즈를 위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을 했던 것이다. 리즈가 공산당원이라는 것은 리즈가 리머스에게 털어놓았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실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여 생명을 죽이는 인간 자체의 문제라는 것을 리머스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머스는 드디어 동독 첩보조직의 2인자인 피들러와 접촉하게 된다. 피들러는 오랜 시간 동안 문트가 영국이 심어놓은 이중 스파이라고 의심하고 있었고, 문트를 제거하고 싶어했다. 피들러의 욕망은 리머스의 복수와 맞아떨어졌고 리머스는 문트가 그의 목적에서 빠져나올 수 없도록 문트에게 불리한 여러 단서들을 그물을 깔아놓는 것처럼 피들러에게 제공한다. 피들러가 드디어 모든 단서를 종합해 문트를 고발하게 되면서 리머스는 돌이킬 수 없는 두려움이 현실로 드러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게 된다.

사실은 피들러가 의심했던 것처럼 문트가 영국에서 매수한 이중 스파이가 맞았던 것이다. 그리고 관리관을 비롯한 영국 첩보 조직은 문트를 죽일 수 있는 피들러를 제거하고, 문트에 대한 모든 의혹을 깔끔히 정리하기 위해서 리머스를 이용했던 것이다. 문트는 피들러가 리머스를 이용하여 자신을 고발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리머스가 은퇴한 첩보 요원이 아닌, 사실은 영국에서 보낸 스파이라는 사실을 역이용하여 자신이 영국을 위한 이중스파이라는 피들러의 주장을 한번에 무너뜨린다. 결국 리머스는 문트를 비롯한 영국의 꼭두각시가 되어 사실은 문트를 지키기 위한 프로젝트에 강제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관리관은 리머스에게 문트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하지 않느냐며 그를 유혹했지만, 사실은 문트를 지키기 위해 그를 철저하게 이용했던 것이다.

리머스를 이용하여 많은 영국 요원들을 죽인 문트를 보호한다는 영국의 판단은 냉정하고 비인간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비인간적이었던 것은 리머스가 영국의 스파이라는 것을 폭로하기 위해 리즈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리즈가 공산당원임을 이용하여 재판에 불러 리머스가 사실은 빈털터리가 아니었으며, 여러 사람에게 난폭한 행동을 하고 난동을 부렸지만 이후에 다른 누군가가 리머스의 뒤를 봐주며 손해배상을 했다는 사실이 리즈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리즈는 자신이 리머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 모든 사실을 알 리 없는 리즈는 속수무책으로 영국에서 원하는 역할을 해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영국 스파이와 한통속이 돼버린 피들러는 죽을 수 밖에 없게 된다.

리머스와 리즈는 문트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감옥에서 탈출하지만 문트의 약속과는 달리 리즈는 어긋난 신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동독과 서독을 막는 벽을 넘기만 하면 살 수 있었던 리머스는 리즈의 시체가 있는 동독에 그대로 남아있게 되고, 동독 측 군인들에 의해 사살된다.

결국 리머스와 리즈는 거대한 체스판의 말들에게 불과했다. 영국이 문트를 보호하고자 했던 이유는 문트가 동독 첩보조직의 고위직으로서 영국이 필요한 고급정보를 공급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영국은 그를 돈으로 매수하고, 그의 잔인한 살육을 방관하며 수많은 범죄를 눈감아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 한번 무고한 두 명이 희생됐다.

리머스는 피들러가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동질감마저 느껴 재판에서 피들러를 구하려고 애쓰지만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자신도 모르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모든 것이 짜여진 각본대로 돌아갔고 결국 이용당하는 삶에 지친 리머스는 타살 같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작품은 분위기부터 주인공 리머스의 인생까지 모두 굉장히 어두운 느낌을 준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를 홀로 헤치며 나아가는 인간의 외로운 모습이 그려진다. 그래서 그런지 주제의식마저 꽤나 무겁게 느껴진다. 도대체 이념은 무엇이며 이념 간의 대립이 뭐길래 이렇게 인간이 잔인하게 이용당하고 죽어야만 하는 것일까.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사라지고 평범하고 하찮은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감정과 시간마저 파괴된다. 전쟁은 사람들을 갈라놓고 통제하며 의심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공산주의에 대한 작가의 비판의식 또한 돋보인다. 왜 이념 간의 대립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지 근본적인 원인을 고민하게 만든다. 왜 냉전시대가 있었고 그 속에서 수많은 개인들은 고통을 받았는가? 결국 공산주의가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이유와 맞지 않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 자유를 갈망한다. 인간은 자유롭지 못할 때는 물론이고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자유라는 이상을 갈망하고 그것을 위해 싸운다. 그렇지만 공산주의는 어떠한가.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당연하고, 이념에 반대되는 말을 했다고 해서 감옥에 수감하는 일이 발생하며, 서로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상황에 놓여진다. 그것이 정녕 옳은 것인가?

이는 리즈의 눈을 통해 더욱 증명된다. 리즈는 공산단원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의 몇몇 요소에는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감옥에 잠시 머무를 때 감옥의 관리자와 리즈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사회주의의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 자기는 작못을 저지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역사의 진행을늦추려고 애쓰는 사람들. 한마디로 반역자들의 감옥이죠.」그녀는 짤막하게 결론지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데요?」「개인주의를 타파하지 않고는 공산주의를 건설할 수 없어요. 돼지가 우리를 지은 자리에 큰 건물을 세울 수 없는 것과마찬가지예요.」리즈는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이야기는 누구한테 들었어요?」「나는 이래 봬도 이곳 인민위원이에요.」 그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감옥이 내가 일하는 곳이죠..」「정말 똑똑한가 보군요.」 리즈는 그녀에게 다가가면서 말했다.
「나는 노동자예요. 여자가 쌀쌀하게 대꾸했다. 「두뇌 노동자가 더 높은 범주에 속한다는 생각은 타파해야 돼요. 노동자를 분류하는 범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요. 오직 노동자가 있을 뿐이죠.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사이에는 어떤 안티테제도 없어요. 레닌의 글을 읽어 본 적이 없나요?」「그럼 이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지식인인가요?」여자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진보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는 반동주의자들, 저들은 국가에 맞서서 개인을 옹호해요. 흐루시초프가 헝가리에서 일어난 반혁명 사태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알고 있나요?」



소름끼치는 말이다. 개인주의는 말살되어야 하고, 오직 역사를 올바르게 진행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은 희생되어야 하며, 그것을 지연시키는 자는 당연히 없어져야 한다는 사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해서 진행되는 역사가 과연 그들의 이상처럼 올바를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죽이는 것만큼 인류를 효과적으로 멸망시킬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럼 민주주의는 모든 면에서 옳은 것인가? 완벽한 이상이 존재할까? 이것에 대해 고민하면서 불현듯 예전에 대학에서 수강했었던 철학 강의가 생각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선이 있다고 했다. 모든 인간은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진리이자 인간이라는 고귀한 존재 이상에 있는 최고의 선이란 무엇인가? 공산주의의 주된 요소는 획일화, 통일성, 비인간성이라 하면 민주주의의 요소는 개방성, 개인화,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최고의 선의 범주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어디선가 학자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정확하진 않지만 민주주의가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채택됐다고 해서 그것이 완벽한 시스템은 아니라는 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이 자발적으로 따를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시스템은 맞는 것 같다. 민주주의가 있기에 국가의 통치자를 뽑을 수 있는 투표라는 권리가 생기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말할 수 있고,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으며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리머스와 리즈는 그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이용당하고 희생됐다. 리머스는 다수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 당연한 세상에 리즈만은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느닷없이 재판에 리즈가 등장했을 때도 그녀가 자신이 벌여놓은 사건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직 그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동독에 온 목적과 자신의 신분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즈는 사살된다. 리머스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세상에 살면서 많은 짐을 떠안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게 되었다니, 그가 리즈의 시체 옆에서 죽음을 선택한 심정이 이해가 된다. 마음 아픈 대목이다.

나는 리머스와 리즈의 죽음이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의 확산을 위해 소수의 희생이 정당화된 수많은 사건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냉전시대 때의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닌, 그저 이념에 가려져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민주주의였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다른 두 이념의 대립이 가져온 결과는 소통의 부재와 끊임없는 의심 및 검열, 그리고 개개인의 안타까운 역사일 뿐이다. 이념의 대립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려는 욕망으로부터 시작됐고 그래서 파괴적일 수 밖에 없었다.

리머스가 리즈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 하찮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고 했다. 리머스가 그 때 느낀 감정은 내가 최근에 가장 많이 붙들고 있는 감정이기도 하다. 매일 반복되어 아주 소소하고 하찮게 보이더라도 결국엔 내 인생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할 순간이기에 고마워하고 최대한 그 순간들을 붙들어두려고 한다. 출근을 하면서 외투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의 온도를 느끼며 어제보다 얼마나 추운지 가늠해보고, 퇴근하면 가족과 저녁식사를 하며 그 날 있었던 에피소드를 공유하고,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주인공의 인생과 나의 인생을 비교해보기도 한다. 그런 하루의 반복이 예전에는 지루했는데, 요즘에는 그런 날들이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연말이 다가와서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도 있겠지만 꽤 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으니 아마 내가 그 전보다는 조금 더 내 삶을 사랑할 줄 알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리머스와 리즈는 함께 잠들고 깨어나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도 서로의 하찮은 순간들을 함께 공유하고 사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안정감을 그들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서로의 리듬에 맞춰 함께 걷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을 넘지 못한 그들의 끝이 너무 공허하게 느껴졌다. 아주 추운 겨울로부터 그들은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리기와 존재하기
조지 쉬언 지음, 김연수 옮김 / 한문화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달리기를 해야만 하는 이유를 가득 담아 찬양하다

다시 읽는 달리기 고전이다. 요즘 같이 날씨가 쌀쌀한 때 움직이지 않는 몸을 밖으로 꺼내 달리다보면 기분좋은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을부터 겨울까지가 가장 달리기 좋은 시기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달리기에도 권태가 존재한다. 회사일이나 컨디션 등 온갖 핑계를 만들어 달리지 않을 이유를 찾는다. 그럴때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나 이 책을 집어들어 다시 달리기 위한 중무장을 한다.

저자의 말을 통해 나는 다시 한 번 달려야 하는 이유를 깨닫고 달리게 된다. 달리기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하는 놀이이자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활동이다.

달리다보면 숨이 차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오고, 아직은 멈추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다시 한 발을 내딛고, 결국 목표를 달성하면 기쁘지만 달성하지 못했다 해도 다음을 기약하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반복된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꼭 무언가에 도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든 사랑이든 우정이든 삶의 모든 범주에 적용될 수 있다. 말 그대로 희노애락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활동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달리는게 아닐까.

이와 더불어 달리기는 매순간 자신의 한계를 점점 더 멀리 보내 결국 그것을 뛰어넘는 멋진 스포츠다. 물론 모든 스포츠 활동이 그러한 느낌을 가지게 할 수 있지만 달리기는 나의 두 발로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마침내 정복한다는 느낌을 준다.

흔히 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으로 비유된다. 숨이 턱 끝까지 차고 다리는 금방이라도 풀릴 것처럼 비틀거려도 내 앞에 놓인 길을 열심히 달려 결국 종착지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앞으로 닥칠 많은 고비를 그와 같이 넘을 수 있다는 경험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유난히 힘든 경주를 마쳤을 때 그래도 내가 해냈다는 쾌감을 느끼고, 다음에는 더 잘하고 싶다는 목표의식이 생기고, 힘들었어도 끝까지 완주해낸 내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오로지 내 자신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남들이 나보다 더 멀리 뛰든 빠르게 뛰든 그런건 하나도 상관없이 오로지 내 이상만을 향해 달릴 뿐이다. 살아가면서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은데 달릴 때에는 내 심장박동수와 지면을 힘차게 딛는 다리, 내 숨소리만이 존재한다.

그렇게 온몸으로 달리면서, 인생의 길을 만들어가면서 내가 그 길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달릴 때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자신이 어떻게 달라졌고 또 달라질수 있는지에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최선의 상태를 느껴라. 어떤 목적도 바라지 말고 일하라. 이 세상만사가 모두 혼란스러운 순간에도 편안해지고 자신감을 얻고 최고의 상태를 느끼게 해주는 일. 그런 일을 발견하면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지키도록 하라.
- P1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하로부터의 수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죄와 벌의 전초전

읽으면서 죄와 벌이 많이 생각났다. 주인공의 의식이 범상치 않은것부터 시작해서 삶의 의미를 주인공의 입장에서 진지하게 고찰한다는 점에서 많이 비슷하다. 다만 죄와 벌의 주인공은 살인자임에도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면서 동정심을 비롯한 여러가지 감정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인물은 도저히 그럴수가 없다. 의식의 흐름이 도저히 종잡을 수 없고 그게 다른 사람들에 대한 피해의식으로까지 발전되는데 읽으면서도 내가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몇몇 사건 속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삶에 대해 갖는 태도와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인식하는 순간들이 나타나는데 공통적으로 비참함과 고독함이 내재돼 있다. 친구라고 할 수 없는 인물들의 모임에 굳이 참석해서 온갖 모욕을 당하고, 그걸 화풀이하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자신과 잠자리를 한 여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자신보다 못한 인생이라 생각한건지 그 여자의 현재 감정과 향후 인생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며 자신이 신이라도 된 것처럼 행세하는데 솔직히 정말 못 봐줄 정도였다.

자신이 공언한것처럼 그는 지하의 인간인데 다른 사람의 인생을 뭘 그리 비판하고 재단한단 말인가. 그가 지상의 인간이었어도 타인의 삶을 그렇게 평가해서는 안된다. 자신보다 우월한 재정상황과 지위를 갖은 친구들에게 화를 낼 수 없어 자신보다 비참한 상황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을 찢어놓는 인간은 얼마나 비겁하고 불쌍한가.

지상으로 올라오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기질을 타고난 것처럼, 자신은 이미 틀렸다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없고 화합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에게 누가 기꺼이 손을 내민단 말인가?

별개로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작가의 통찰력은 놀라울 정도다. 그러한 사람들의 삶의 단면들을 관찰하여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기본적인 관계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간단히 말해 누구와도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스스로 고독한 삶을 살기를 자처하는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데 있어서 도스도옙스키는 천부적이다.

작가의 천재적인 통찰력이 집대성한 작품이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이 작품은 특히 라스콜니코프를 떠올리게 했는데 그도 결국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자신이 비범한 인물인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살인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그의 잘못을 감싸주는 친구와 여인이 있었고,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는 마침내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 곁에는...... 아무도 없다.

작가는 라스콜니코프를 통해 인간이 죄를 짓기 전과 그 후의 감정변화를 세밀히 보여주고, 선과 악으로만 표현될 수 없는 인간 그 자체를 조명하고 있지만 이 지하인간의 삶에는 그러한 의미가 없다. 오직 지하세계와 그 세계를 지탱하는 자신만이 있을 뿐이다. 그 곳에서 고독함은 습기처럼 그를 감싸고 그 속에서 그는 간신히 숨 쉴 뿐이다.

오직 고독함만이 가득한 지하에서 그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하로부터의 수기

대체 무슨 근거로 저 모든 현자들은 인간에겐 뭔가 정상적인 욕망이, 뭔가 선량한 욕망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일까? 무슨근거로 인간에겐 반드시 합리적으로 따져 유리한 욕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상상했던 것일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독립적인 욕망 하나뿐이다, 이 독립성이 어떤 대가를 요구하든,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간에. 거참, 대체 욕망이라는 게 뭔지…….
- P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밤 기도

그러고서 즉시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을 느꼈어요. 나는 그 격변 속에 거의 파묻혔고, 그폭풍 속에서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너무나 커다란 무언가가 그순간부터 내 인생을 가득 채웠고, 나는 이제 그 누구도 사랑할 수없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난 내 아들만 사랑할 수 있는데,
그 아이의 이름 역시 마누엘이에요. 그건 두 사람이 같은 물질로만들어져 있기 때문이에요. 그 물질은 바로 그 사랑의 살과 뼈와피와 시선이에요.
- P3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