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부터의 수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9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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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의 전초전

읽으면서 죄와 벌이 많이 생각났다. 주인공의 의식이 범상치 않은것부터 시작해서 삶의 의미를 주인공의 입장에서 진지하게 고찰한다는 점에서 많이 비슷하다. 다만 죄와 벌의 주인공은 살인자임에도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면서 동정심을 비롯한 여러가지 감정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인물은 도저히 그럴수가 없다. 의식의 흐름이 도저히 종잡을 수 없고 그게 다른 사람들에 대한 피해의식으로까지 발전되는데 읽으면서도 내가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몇몇 사건 속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삶에 대해 갖는 태도와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인식하는 순간들이 나타나는데 공통적으로 비참함과 고독함이 내재돼 있다. 친구라고 할 수 없는 인물들의 모임에 굳이 참석해서 온갖 모욕을 당하고, 그걸 화풀이하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자신과 잠자리를 한 여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자신보다 못한 인생이라 생각한건지 그 여자의 현재 감정과 향후 인생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며 자신이 신이라도 된 것처럼 행세하는데 솔직히 정말 못 봐줄 정도였다.

자신이 공언한것처럼 그는 지하의 인간인데 다른 사람의 인생을 뭘 그리 비판하고 재단한단 말인가. 그가 지상의 인간이었어도 타인의 삶을 그렇게 평가해서는 안된다. 자신보다 우월한 재정상황과 지위를 갖은 친구들에게 화를 낼 수 없어 자신보다 비참한 상황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을 찢어놓는 인간은 얼마나 비겁하고 불쌍한가.

지상으로 올라오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기질을 타고난 것처럼, 자신은 이미 틀렸다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없고 화합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에게 누가 기꺼이 손을 내민단 말인가?

별개로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작가의 통찰력은 놀라울 정도다. 그러한 사람들의 삶의 단면들을 관찰하여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기본적인 관계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간단히 말해 누구와도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스스로 고독한 삶을 살기를 자처하는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데 있어서 도스도옙스키는 천부적이다.

작가의 천재적인 통찰력이 집대성한 작품이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이 작품은 특히 라스콜니코프를 떠올리게 했는데 그도 결국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자신이 비범한 인물인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살인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그의 잘못을 감싸주는 친구와 여인이 있었고,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는 마침내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 곁에는...... 아무도 없다.

작가는 라스콜니코프를 통해 인간이 죄를 짓기 전과 그 후의 감정변화를 세밀히 보여주고, 선과 악으로만 표현될 수 없는 인간 그 자체를 조명하고 있지만 이 지하인간의 삶에는 그러한 의미가 없다. 오직 지하세계와 그 세계를 지탱하는 자신만이 있을 뿐이다. 그 곳에서 고독함은 습기처럼 그를 감싸고 그 속에서 그는 간신히 숨 쉴 뿐이다.

오직 고독함만이 가득한 지하에서 그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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