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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골짜기의 단풍나무 한 그루
윤영수 지음 / 열림원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시작부터 생소하다. 단풍동 가계도가 나오고, 책 속의 등장인물이 소개된다. 어른이족의 종류에 맑은이, 하얀이, 황인, 햇빛족, 땅옷족 등 책 속에는 생소한 부족이 등장한다. 이야기에 앞서 어른이들이 사는 세상에 대해 소개한다. 어른이종족은 어미산 땅속에 묻혀서 52년의 세월을 보낸 후 엄마, 아빠가 될 존재들에 의해 땅에서 캐어져 나온다. 태어날때 몸집이 가장 크고, 나이가 들수록 몸은 작아지고 심지어 노인이 되면 주름조차 없는 애기의 모습으로 된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거꾸로 나이를 먹는 셈이다. 심지어 노인은 아이처럼 말썽을 피우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어른이의 세상은 흙,물,나무, 불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기 13년씩 52년을 한 주기로 한다. 그외에도 더 세부적으로 어른이들의 시간에 대해 언급한다. 다음으로 나오는 단풍동의 여덟 샘과 마을 지도를 보면 어미산이 마을의 가운데쯤 자리를 잡고 있다.
단풍동의 어른이족 중 맑은이는 몸이 투명하고 예지력을 가졌고, 음식을 먹지 않으며 발바닥의 빨판을 통해 물만 먹는다. 하얀이는 반투명한 몸에 발의 빨판을 통해 수분을 흡수하고 예지력은 없으니 신체와 누뇌의 능력이 조화롭다. 그외의 종족은 음식을 먹고, 피부를 통해 배설한다. 예지력 때문에 맑은이는 어른이들을 이끌고, 하얀이는 맑은이를 도우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맑은이의 중심에 있는 대표적인 집안인 자오와 운흘은 어른이들의 존경을 받는 집안으로 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 중 운흘의 둘째 아들인 연토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하전과 미단의 둘째 아들인 연토는 이상하게도 아비 하전의 관심밖에 존재한다. 자라는 내내 연토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다. 무녀인 영기는 극진히 연토를 아끼지만 연토에게는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 연토는 훗날 알게 되지만, 하전과 미단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한다. 거리를 두면서.
연토에게 운명의 존재인 검은머리짐승 준호가 나타난다. 그의 존재를 연토는 미리 직감한다. 어른이족에게 검은머리짐승은 상종못할 존재이자 함부로 죽여도 상관없는 대상이다. 맑은이가 가까이 하기에는 냄새나는 짐승일뿐. 그런 준호를 연토는 감싸주고 자신의 방에 들인다. 죽어가는 준호에게 음식을 주어 살게 하고, 운흘의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검은머리짐승은 인간이었고, 어른이세상의 존재와는 많이 달랐다. 예지력이 없는 준호는 맑은이들에 의해 마음이 읽히고 그들은 검은머리짐승을 이용한다.
어른이족들에게도 인간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본처를 두고 바람을 피우기도 하고, 사업을 하고 빚을 지는가 하면, 사기를 당하기도 한다. 성인식과 혼례식, 장레식의 풍습이 있으며 심지어 시누이의 시집살이도 존재한다. 어른이족을 유지할 수 있는 근원은 자식을 캘 수 있는 어미산이 존재함인데 그 어미산을 지키는 삼신어른 생은 운흘 집안의 하전의 동생이다. 어른이족 안에서의 계급은 엄격하였고, 단풍동을 지탱해나가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간은 지속되지 않았고, 인간의 세계처럼 단풍동은 청매동, 붓동, 살촉동, 호랑가시동에 둘러싸여서 위기의 순간을 맞는다. 그들의 자손이 위태로워지는 순간 조상의 예언은 그들을 구한다.
맑은이들은 머리만 굴릴 뿐 세상을 이끌어갈 힘도, 감당할 능력도 없어. 그들이 가진 예지력 역시 미래의 위기에 행여 도움이 될지 모를 하찮은 열쇠, 자기들 스스로도 어디에 어떻게 꽂아야 할지 모르는 미래의 끊겨진 장면들일 뿐이다. 앞날의 충격적인 장면, 수많은 위험을 보는 그들로서는 세상의 모든 일, 삶의 시간에 대해 회의적일 수밖에 없어. 다른 이를 품거나 안심시킬 아량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지. 그들에 비해 운흘 연토, 너는 아냐. 앞날을 볼 능력이 없기 때문에 네게는 옳다고 믿는 일을 밀고 나갈 힘이 있어. 살아 있는 이들의 노력으로 운명이 바뀐다는 것을, 맑은이들이 보는 미래의 그림 역시 우리가 노력함으로써 바뀔 수 있는 밑그림일 뿐임을 너는 네 행동으로 증명하지. (본문 중)
여지껏 소설은 나에게 재미삼아 단숨에 읽는 장르였다. 하지만 이 책은 많이 달랐다. 우선 7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에 한번 놀랬고, 책을 펼쳐들고 읽으면서도 생소한 용어와 우리 삶의 형태와 다른 어른이들의 이야기가 까슬거리게 낯설었다. 100여페이지 읽는 동안 낯설음에 적응하였지만 읽는 동안에도 내용을 다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생각의 틀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내용에 쑥 들어갈 수 있었고 아마 그부분에서 힘들었던 것 같다. 인간과 다른 어른이의 삶은 다양한 생각꺼리를 던졌다. 철없던 시절 막연히 나에게도 예지력이 있다면 그래서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던 것, 심지어 어른이 된 지금도 어찌하면 가까운 미래라도 알 수 있을까 애쓰는 내 모습의 민낯을 본 듯한 대목도 있었다.
언제 어떤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땅의 부드러운 재 한줌으로 돌아갔다가 기적처럼 새 생명을 얻게 된다면, 무언가를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지력을 다시 가지게 된다면 나 자신이 얼마나 귀하고 어렵게 태어난 존재인지 나 스스로 깨닫게 되기를.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기꺼이 순종하는 어떤 풀과 나무들의 부분과, 어떻게 살아갈지 끝없이 방황하고 희망과 좌절을 되풀이하던 어떤 동물들의 부분과, 자신들의 생명인 땅을 지키기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않던 어떤 어른이들의 부분이 합쳐져 내 몸과 정신을 이루었음을 내가 기억해낼 수 있기를.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생명들과 욕심없이 어울려 삶의 환희를 함께 노래할 수 있기를.
연토와 준호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오만함, 이기심이 많이 드러난다. 어른이족이 인간의 마음을 읽고 드러나는 속내는 우리의 마음을 닮았다. 우리가 자연을 대하는 이기적인 행동, 자연과 상생이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고 이용하는 인간들의 행동을 역지사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야기를 쓴게 아닐까. 자연을 대변하는 어른이족, 인간인 검은머리짐승은 이야기 속의 결말처럼 서로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에 서로를 이용하지 않고 협력할때에만 이상적인 관계가 유지될 것이다. 방대한 분량이지만 탄탄한 구성과 세밀한 묘사로 지루할 틈없이 집중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한국형 환타지는 좀 어렵다는 수식어가 이 작품 덕택에 따라다닐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