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량의 상자 - 상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상상한다
아득하고 황량한 대지를 혼자서 걷는 남자
남자가 짊어지고 있는 상장는 아름다운 소녀가 들어있다
남자는 만족한 얼굴로 어디까지라도 어디까지라도 걷는다
그래도
나는 왠지 몹시ㅡ
남자가 부러워지고 말았다.

사실 내가 이 책을 볼 마음이 든 것은, 어느 분께서 야쿠시지 료코를 두고 추젠지 아키히코 여성판이 있다고 경악했던 데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참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책을 잡을 수 있었는데, 전체 1060페이지짜리 책을 2시간만에 끝장내 버렸다. 료코 정도가 아니잖아 이건-!!! 야쿠시지 료코가 권력과 재력과 미모와 실력과 방약무인으로 주변을 휘두른다면, 추젠지 아키히코-교코쿠도는 이론과 지식과 그 무엇보다도 정보공개의 순서조작으로 주변을 지배한다. 많은 곳에서 셜록 홈즈의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코난 도일 그 심령술 의사 선생이 사람 많이 망쳤지... 날 포함해서...) 미스터리와 공포와 추리가 뒤섞인 혼탁한 세계가 ‘선별된 정보공개의 순서에 따라’ 점차 맑아져 가는 장면은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 맑은 물 밑에 보이는 것은ㅡ.
아름다운 외모와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지닌 기묘한 소녀 유즈키 가나코가 유일한 친구 구스모토 요리코와 함께 멀리 호수를 향해가던 중, 흰 장갑을 끼고 정장을 입은 남자에게 떠밀려 전차에 짓이겨지고 만다. 심장마저 망가진 채 기계에 의지해 간신히 생명을 이어가던 그녀의 주변에서는 지나치게 복잡한 인간관계가 펼쳐지고, 정체모를 납치 예고장이 날아들며, 그리고는 일행이 면회를 들어간 단 몇 분 사이에 움직일 수 없는 중환자가 마치 연기처럼 납치되고 만다. 온통 수수께끼와 거짓으로 점철된 복잡한 실타래에 다다미방 탐정과 삼류잡지 기자와 무투파 형사와 허접한 글쟁이와 심령술 탐정이 도전한다- 는 이야기. 뭔가 중요한 걸 많이 빼먹었지만 그 부분은 직접들 찾아보시기 바란다.
작가 스스로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추리소설이라면 온갖 비난을 뒤집어썼을”만 하다고 표현한 트릭을 선보이지만, 조금도 비난하고 싶지 않다. 추리보다는 공포, 공포보다는 심리.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것은 말 그대로 “뒷맛이 나쁜”, 아니, 끔찍한 현실인식이었다.
교코쿠 나츠히코의 작품을 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단 두 시간만에 1060페이지를 처치해 버리고 다른 작품을 찾아 서점으로 가기로 했다는, 이 한 마디로 감상을 끝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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