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성의 사나이 그리폰 북스 16
필립 K. 딕 지음, 오근영 옮김 / 시공사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1960년대, 2차 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이 승리하여 유럽은 독일이, 아시아는 일본이 점령하여 미국 대륙마저 독일(독일제국)과 일본(태평양연안연방)이 반쪽 내서 나눠먹은 세계관. 단편이 중심인 그의 작품 중에서 흔치 않은 장편에서도 충분히 필력을 가진 것을 보여줄 수는 있었지만 너무 동양적 신비주의와 반공산주의 의식(시대의 트렌드였던)에만 치중하여 지금 보기엔 지나치게 고전이라는 느낌을 준다. 언제 보아도 미래의 이야기로밖에 느낄 수 없는 단편들에 비하면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설정이 설정이니만큼 필립 K. 딕의 자신있는 분야이면서도 그가 그려내는 미래의 모습에 가리워져 잘 보이지 않았던 인간에 대한 깊은 고찰이 드러나는 면도 있다. 개인이 집단과 상황, 환경에서 받아서 겪을 수 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에 대해 깊이 고찰해가는 그 내용은 진지한 철학서에 못지 않은 깊이를 가지고 있다.
필립 K. 딕의 작품이 모두 다 그렇듯이,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평화로운 세계 안쪽에 웅크리고 있는 거짓과 오류는 필립 K. 딕 작품의 근간을 이룬다.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는 일본인 갑부들이 미국 골동품을 수집한다는 설정이 나오지만, 그런 골동품들은 대부분 모조품이다. 애초에 역사가 250년밖에 안되는 미국의 골동품이라는 것 자체가 희화적이며, 그것을 만들어내는 인간들의 모습은 잘못된(?) 역사를 바꾸려는 것도 아니고, 그 세계를 뜯어고치려는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개인이 이런 비틀어진 사회에게 어떤 영향을 받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심도있게 추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동안 필립 K. 딕이 지속적으로 이야기해 왔으면서도 잘 인식되지 못했던, 그가 말하고싶은 진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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