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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배달민족사 4
김란기 지음 / 서울P&B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꽤 멋진 디스토피아를 보았다. 이 작품 속의 23세기는 '돈'과 '독'이라는 양대산맥에 의한 백인의 세계지배가 완성된 세계로서, 전쟁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년 계획표를 작성하고 전쟁수행 명령을 거부할 경우 백신 공급을 중단한다(사망자가 1일당 2만 5천 정도 발생). 언제부터 언제까지, 스코어(!) 10만 명에 달하거나 수도를 점령당하면 패배. 승자 및 사상자 숫자를 맞추는 전쟁복권 발행과 TV중계, 저 나라와 저 나라는 전쟁한 지 벌써 8개월이나 지났으니 미국제 무기의 추가 판매를 위해 한바탕 벌일 것. 교과교재는 호전적인 역사관, 계산적인 도덕관, 복종적인 정치관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한국인의 평균 부채는 1천만 달러, 은행 잔고는 예금이 아닌 부채로 계산된다. 그야말로 '멋져 버린다'. 어느 사이버펑크 작품집에서 "[1984] 정도는 유원지로 보이게 하는 세계가 널리고 널렸다"는 말을 읽은 바 있는데, 바로 이거다! 하지만 이대로 당하면 한국인이 아니다. 타임머신을 만들어 시간을 돌려서 아예 시작 부분을 바꿔 버린다는 계획. 이봐요… 당신들 너무 멋지잖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필력이 상당히 맛깔스럽고, 내용 전개에도 설득력이 있다. 400년(200년 아님)이나 미래의 무기체계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거야 어차피 23세기의 전쟁 자체가 백인들에게 구경시키기 위한 대규모 검투시합이었으니만큼 당연한 일이며, 400년이나(오타아님) 발전한 과학기술의 마법에 가까운 발전상도 나름대로 잘 드러내고 있다. 현대무기체계에 대한 자료는 조금 부족한 것처럼 보이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조금 노골적으로 해석하자면 현대를 배경으로 한 시간이동 국가적 깽판물이지만 어디까지나 '말이 된다'는 사실은 높이 살 만하며, 배달공화국이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국제사회에 편입되는 과정은 그동안의 어떤 작품에서도 찾아보지 못한 기발한 발상을 자랑한다. 더군다나 단순한 정신적 자위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버팀목으로서, 작중에서도 자신들이 역사의 도피자인지, 아니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수정자들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곳곳에서 드러나 보이고, 미래에서 온 손님으로서 현대 사회에 적응하려는 시행착오의 사소한 장면장면의 삽입은 이 작품이 그저 무미건조한 정신적 자위물로 전락하지 않게 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작품의 큰 줄기를 이루는 미래문명에 의한 역사의 수정과 사소한 사건의 적절한 조화로 이루어진 균형은 상당히 괜찮은 느낌이다. 밀리터리 SF와 가상역사, 그리고 현대 국제관계물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 보기를 추천한다.
다만 문제라면 캐릭터성이 너무 평면적이라 지나치게 '악당스러운 악당들' 이랄까, KKK랑 시온 놈들 좀 빨리 화형시켜 주세요. 이렇게 죽여버리고 싶은 놈들도 [창룡전] 이래 오랫만이다.